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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젠더 시리즈” 편집자의 서문 / 11
서문 / 13 감사의 말씀 / 17 서론 __ 19 이 책의 논점 / 28 유대인 여성들의 역사에서 유대교 여성신학으로 / 50 1장. 여성신학의 관점에서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 읽기 __ 63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에서 여성들을 빼거나 넣기 / 68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의 가부장적 특성들 / 83 홀로코스트 이후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확인 / 89 충분히 가부장적이지 못한 하느님의 실패 / 102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 새로 그리기 / 109 2장. 아우슈비츠에서 하느님이 얼굴을 숨기심 __ 121 홀로코스트에서 하느님의 사라지심 / 124 외면하시는 하느님 / 133 현존, 부재, 그리고 젠더 / 142 이스라엘, 하느님께 현존하다 / 150 3장. 아우슈비츠에서의 거룩함에 대한 여성신학적 의미 __ 163 아우슈비츠를 언약으로 거룩하게 만들기 / 163 아우슈비츠에서 여성들이 당한 모독 / 172 아우슈비츠를 씻어내기 / 185 아우슈비츠를 거룩하게 만든 여성들 / 193 아우슈비츠로 추방된 거룩한 것들 / 221 4장. 아우슈비츠에서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기 __ 231 관계의 붕괴 / 239 관계의 지속 / 252 아우슈비츠에서 하느님을 대면하기 / 267 5장. 아우슈비츠의 어머니/하느님 __ 285 홀로코스트 이후 신학에 대한 모성주의적 관점 / 285 (신성한) 모성애와 하느님의 섭리 / 293 아우슈비츠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모성적 얼굴 / 311 죽어가지만 죽지 않는 하느님 / 325 6장. 아우슈비츠에서 하느님의 구원 __ 335 1부 유대 민족의 영원한 현존(혹은 정지하는 기차) / 335 티쿤(Tikkun)을 그려보기 / 350 구원의 신호 / 363 2부 유대교 신비주의와 구원의 내러티브 / 376 유대교 여성신학과 구원의 과정 / 385 쉐키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 394 아우슈비츠에서 본 하느님의 비전 / 406 공주와 죽음의 도시 __ 415 히브리어 및 이디쉬어 선별 어휘록 / 425 참고문헌 / 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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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나 그것이 끼친 나락의 고통은 결코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이 아니었다. 많은 수감자가 그 악의 원인에 맞서 저항하고, 그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었던 능력이야말로 구원하는 것이었다. 여성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에 기울인 관심은 작은 차이밖에는 만들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관심의 여러 사례로 실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서로 절대적 증오 아래 놓인 사람들(상처와 질병, 심한 설사, 그리고 화장지가 없어 모두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옮긴이) 사이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신적인 특성(divine quality of self-giving love)이다. 멸절수용소의 상황이 비록 하느님을 파괴할 수는 없지만, 신적인 특성이 나타날 수 있는 걸 파괴하는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회복시켜주는 행동들이, 치유하고 고쳐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한다. 아우슈비츠가 그것을 파괴할 수 없었던 한에는, 하느님의 추방된 현존(God’s exiled presence)을 세계 안에 회복시켜주는 축복을 아우슈비츠가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서론」중에서 아우슈비츠에서는 (성서와 랍비 문서의 관용구대로) ‘전사’(Man of War)인 가부장적 하느님이 명백하게 엄청난 위험에 처했다. 신학이 신의 권능과 정치적 테러를 서로 가까운 것으로 만들 때, 그건 아우슈비츠에서 실제로 일어났듯이 하느님을 파멸시키고 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권능은, 남성적 인간의 권력에 대한 하나의 관념(idea)에 불과하게 되어, 결국 그 권능은 인간이 마음대로 차지하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일단 유대인들이 그들의 하느님을 빼앗기자, 하느님이 돌아서서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하느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실권을 가진 실세들이 하느님의 신비한 권능을 가로챘다. (위젤은 히틀러만이 유대인들에게 그의 약속을 지켰다고 비꼬아 지적한다. 나치가 하느님의 권능을 차지했고, 하느님은 그것에 맞서기엔 무능했다.) ---「1장」중에서 줄리아나 테데스키(Giuliana Tedeschi)의 회고록은 또 다른 그런 여성적 신현(hierophany)을 증언한다(비록 그녀가 그런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밤 아우슈비츠에서 테데스키는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질 만큼 극심한 절망’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밤에 그녀는 벌을 받아 소매 없는 얇은 셔츠만 입은 채 막사에서 쫓겨났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 인간적 존엄성이 유린되고, 남편과 아이들과 강제로 헤어진 채, 눈앞에는 화장터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한 번도 ‘우주 속에 홀로 떠 있는 모래 한 알’처럼 그렇게 작고 외롭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얼어붙은 땅 위에 엎드린 채 그녀는 통곡했다. 바로 그때 두 개의 손이 옷을 들어 자신의 어깨 둘레에 둘러주는 것을 느꼈다. ---「2장」중에서 수용소 안에서는 극도로 끔찍한 일들이 순식간에 일상이 되었고, 많은 사람은 점차 그것에 익숙해졌다. 예컨대, 사라 놈베르크-프리지티크는 곧바로 시신들을 마치 ‘나무토막’처럼 밟고 지나가는 데 익숙해졌다.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아우슈비츠에서 단지 짧은 시간만 지나도 주변에 쌓여 있는 시신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무감각해졌다. 질병과 끊임없는 파괴의 장소, 죽음과 삶의 종말이 동시에 제멋대로이고 엄격하게 통제되어 거의 구별되지 않는 그곳에서는, 거룩함을 분리해 내는 가능성 자체가 모든 의미에서 쫓겨난 것처럼 보였다. … 희생자에게나 홀로코스트 이후의 증언자에게나 아우슈비츠는, 악마적 힘 때문에 하느님이 세상에서 추방되거나 외면당할 때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표징이다. 곧 철저한 도덕적 · 물질적으로 황폐한 모습이다. 그러나 수감자들의 행동이 하느님을 아우슈비츠 안으로 초대했던 바로 그곳에서, 아우슈비츠는 희생자들의 총체적 현실로서 적어도 언약과 구원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었다. ---「3장」중에서 비인격화는 유대인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심각한 폭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놈베르크-프르지티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이렇게 관찰했다. ‘약한 자에게 잔인하고, 강한 자에게 아부하는 것이 여기에선 법칙이었다.’ 빵을 놓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고, 다른 여성들이 잠든 사이에 여성들은 서로의 빵을 훔치기도 했다. 놈베르크-프르지티크에 의하면, 육체적으로 약하고, ‘경험도 없고, 야비하지도 않고, 이기적이지도 않은 이들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그녀는 첫째 막사에 있던 한 소녀를 기억하는데 (‘진주알만 한 눈물방울이 그 소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소녀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 끔찍한 세상에서 어머니의 따뜻함을 그리워했으니, 틀림없이 곧 사라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렝겔도 기억한다. ‘독일인들은 우리를 서로서로 싸움 붙여서, 서로가 악의를 품고, 서로 경쟁하고, 서로 증오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처럼 보였다. 좁은 침상은 (문자 그대로) 부러질 임계점에 이를 만큼 사람들로 채워졌고, ‘차지할 공간을 두고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말다툼이 나타나곤 했다.’ ‘이전엔 정직한 가족들의 어머니들이었고, 타인의 머리핀 한 개도 가져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비정한 도둑들이 되어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조금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마도 나치가 그들 자신의 도덕으로 우리에게 전염시키고자 했던 것 같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성공했다.’ ---「4장」중에서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지만, 이사벨라 라이트너가 아우슈비츠의 막사에서 한 산모의 출산을 묘사한 장면은 내가 말하려는 바를 잘 보여준다.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여성들은 산모를 둘러싸고 갓 태어난 아기를 산모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산모가 돌보게도 하지 않았다. 만일 산모가 아기를 보았다면, 결코 아기와 헤어지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결국 산모와 아기 모두 목숨을 잃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라이트너는 그 산모를 죽어가는 이를 날개로 감싸는 쉐키나(the Shekinah whose wings enfold the dying)의 전형적인 자세로 묘사한다. 그녀의 허벅지는 ‘천사의 날개처럼’(like wings of angels) 갓 태어난 아기를 감싸 보호하고 있었다. 다른 많은 아기처럼 그 아기 역시 (아버지도 없이) 결국 땅에 버려져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이 서로에게 품은 사랑 덕분에 그 존재의 의미만큼은 소멸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그 산모와, 그녀가 끝내 한 번도 안아보지 못했던 아기를 둘러싸고 함께 있었다. ---「5장」중에서 이 책은 홀로코스트를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 다음 세대에 전하려고 했다. 첫째는 형상 신학, 곧 창조(creation)의 신학이다. 둘째는 그 기억에 대한 해석, 곧 역사(history)의 신학이다. 셋째는 아우슈비츠가 결국에는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 곧 구원(redemption)의 신학이다. 이 마지막 믿음에는 유럽 유대인들의 멸절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저항뿐 아니라 우주가 함께 저항한 악이었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인간의 저항은 우주의 저항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학은 역사를 품고 난 후 역사를 넘어선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면, 한 번 창조된 그 형상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무엇을 인간 안에 남긴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곧 하느님이 사람과 사람을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존재로, 서로가 서로에게 현존하도록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얼굴을 다시 찾아내거나 잠시라도 회복하는 것은 곧 인간의 현존을 회복하는 일이다. 홀로코스트 희생자가 마지막 순간에 다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바라보는 바로 그 한 순간에도,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사라질 수도 없었다. ---「6장」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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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의 비전은 용감하고 대담하다. 하느님의 여성적 형상은 단순한 주장에 머물지 않고, 치밀하게 서술되고 설득력 있게 논증된다. 이 책은 홀로코스트 이후의 페미니스트 신학뿐 아니라 극심한 고난 속에서 여성들이 경험한 하느님 이해를 성찰하는 데 크게 공헌한다.”
—Yearbook of the European Society of Women in Theological Research “멜리사 라파엘은 홀로코스트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에 관한 획기적인 책을 썼다. 이 책은 폭넓은 독자층을 만나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킬 가치가 있다.” —The Ecumenist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 깊이와 용기, 그리고 상상력의 폭에 경탄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읽은 구성신학 가운데 단연 가장 뛰어난 저작 중 하나이다. … 학생들과 함께 이 책을 읽을 때, 하느님과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앙 문제를 둘러싼 깊은 관상적이며 때로는 참혹한 신학적 깨달음을 얻게 된다.” —Christopher Pramuk, 가톨릭 신학자, “Making Sanctuary for the Divine.” “라파엘은 훼손된 몸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행위가 곧 윤리적 행위이자 신학적 행위이며, 바로 그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Katharina von Kellenba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