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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836-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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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문

조르주 상드의 첫 등장

1. 프레데리크 쇼팽이 바르샤바Warszawa의 가족에게
2.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3.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요제프 브로조브스키에게
4. 다구 백작 부인이 노앙Nohant의 조르주 상드에게
5. 다구 백작 부인이 노앙의 조르주 상드에게
6. 프레데리크 쇼팽이 사라고사Zaragoza의 안토니 보진스키에게
7. 조르주 상드가 코모Como의 다구 백작 부인에게
8.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외젠 들라크루아에게
9. 조르주 상드가 프레데리크 쇼팽에게
10.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11.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12.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13.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14.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15.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16. 펠리시앵 말피유가 파리의 프레데리크 쇼팽에게
17. 외젠 들라크루아가 파리의 피에레에게
18.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피에르 르루에게
19.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20. 프란츠 리스트가 제네바의 아돌프 픽테 소령에게
21. 다구 백작 부인이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우리의 마요르카섬에서

22.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23.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24.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프랑수아 뷜로즈 부인에게
25.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카미유 플레엘에게
26. 다구 백작 부인이 제네바의 아돌프 픽테 소령에게
27.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28.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29.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30.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31. 생트뵈브가 쥐스트 올리비에 부인에게
32.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33.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34.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35. 다구 백작 부인이 제네바의 아돌프 픽테 소령에게
36.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37.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38. 조르주 상드가 라 샤트르La Châtre의 뒤테이에게
39.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카미유 플레엘에게
40.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41.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42.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43.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44. 조르주 상드가 님의 쥘 부쿠아랑에게
45.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46.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47.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48.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49.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50.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51.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52. 프레데리크 쇼팽이 팔마의 에르네스트 카뉘에게
53.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마르세유의 프레데리크 쇼팽에게
54.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55.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56.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율리안 폰타나에게
57.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피에르 보카주에게
58. 조르주 상드가 노앙의 이폴리트 샤티롱에게
59.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60. 프란츠 리스트가 제네바의 아돌프 픽테 소령에게
61.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62.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63.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64. 생트뵈브가 파리의 프랑수아 뷜로즈에게
65.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해설 쇼팽과 상드가 함께했던 시간 ․ 김주영
감수자의 말
편집 후기

저자 소개 3

Frederic Chop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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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쇼팽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다. ch는 폴란드어에서는 'h' 발음이 나지만, Chopin은 프랑스계 성씨이기 때문에 '쇼팽'이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쇼팽의'는 'Chopina'로 격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쇼페나'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Szopen'(쇼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쇼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서쪽으로 4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젤라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교구의 세례 기록에는 그의 생일을 1810년 2월 22일로, 이름을 라틴어로 프리데리쿠스 프란치스쿠스(라틴어: Fridericus Franciscus)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폴란드어로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가 된다. 그러나 쇼팽과 그의 가족들은 생일을 3월 1일로 기록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날짜를 진짜 생일로 인정한다.

프리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영어:Nicolas Chopin)은 프랑스 로렌 출신으로, 16세가 되던 1787년에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니콜라는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1806년에는 그가 가르쳤던 가문 중 하나인 스카르벡(Skarbek)의 가난한 친척인 테클라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폴란드어: Tekla Justyna Krzyzanowska)와 결혼했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브로후프(Brochow)에 있는 교회에서 181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 때 니콜라 쇼팽의 18살짜리 제자인 프리데리크 스카르벡을 대부로 삼았는데, 프리데리크라는 이름도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둘째이자 외아들로, 누나인 루드비카(Ludwika, 1807~1855),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 1811~1881)와 에밀리아(Emilia, 1812~1827)가 있었다. 니콜라는 폴란드에 헌신했으며, 가정에서도 폴란드어를 주로 사용하게 했다.

프리데리크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난 1810년 10월, 니콜라가 바르샤바 고등학교 (대학 전단계 학교, 1804~1831에 존재했음)(영어:폴란드어: Liceum Warszawskie)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됨에 따라 바르샤바에 있는 작센 궁정(영어:Saxon Palace) 1층으로 이사한다. 니콜라는 거기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머니는 하숙집 소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프리데리크의 체격은 왜소했으며, 어린 시절에 병에 자주 걸렸다.

그의 누이인 루드비카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종종 자신의 동생 프레데리크에게 놀이처럼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루드비카는 프레데리크의 재능을 눈치채었고, 결국 그들의 부모는 프레데리크가 공식적인 레슨을 받도록 한다. 공식적인 레슨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체코 음악가 보이치에흐 지브니(영어:폴란드어 Wojciech ?ywny)에게 1816년부터 1821년까지 교습을 받으면서 부터다. 누나 루드비카도 지브니에게 레슨을 받으며 프리데리크 등 남동생들과 가끔 듀엣을 하기도 했다. 쇼팽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7살 무렵에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사단조, 내림나장조의 두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1821년에는 내림가장조 폴로네이즈를 작곡해 지브니에게 헌정하는데, 그 원고는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쇼팽 원고가 된다. 12세 때부터 엘스너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 엘스너가 세운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들어가게 된다.

1817년 작센 궁전은 바르샤바의 러시아 총독에 의해 군사용으로 징발되었고, 바르샤바 강당은 오늘날 바르샤바 대학교의 총장 집무실인 카지미에슈 궁정(영어:Kazimierz Palace)에 다시 세워졌다. 쇼팽가는 카지미에슈 궁정에 인접한 건물로 이사한다다. 이 기간 동안, 프리데리크는 폴란드 입헌왕국의 통치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초대받아 그 아들과 종종 놀았는데, 거기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파블로비치 대공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율리안 우르신 니엠체비치(영어:Julian Ursyn Niemcewicz)는 그의 극적 에클로그 《우리들의 담론Nasze Przebiegi"(1818년)》에서 "꼬마 쇼팽"의 인기를 증언하고 있다.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e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e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핵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환상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e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였고 오로지 몇몇만이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였다. 실내악에 관하여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바르샤바에 살 때 쇼팽은 부흐홀츠의 피아노를 사용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사는 동안에는 플라이에에서 악기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플라이에(Pleyel et Cie)의 피아노를 '그 이상은 없다'는 뜻의 "비 플러스 울트라"로 평가한다. 리스트는 파리에서 쇼팽과 친구가되었고 쇼팽의 플라이에 피아노의 소리를 "수정과 물의 결합"으로 묘사한다. 런던에서 쇼팽은 "나는 3대의 피아노, 플라이에, 브로드우드 및 에라르드가 놓인 대형 응접실이 있다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2018 년 폴 맥널티가 만든 쇼팽의 부흐홀츠 피아노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바르샤바 쇼팽 연구소에서 최초의 시대 악기 국제 쇼팽 콩쿠르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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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상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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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Sand,본명 : 오로르 뒤팽 Aurore Dupin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다. 그녀의 아버지는 폴란드 왕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출신이고, 어머니는 파리 센 강변의 새 장수 딸로 가난한 서민 출신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상드는 프랑스 중부 시골마을 노앙에 있던 할머니의 정원에서 루소를 좋아하는 고독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18세 때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으나 순탄치 못한 생활 끝에 이혼하고,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하여 <피가로(Le Figaro)>지에 짧은 글들을 기고하며 남장 여인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이때 여러 문인,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특히 여섯 살 연하였던 시인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다. 그녀의 아버지는 폴란드 왕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출신이고, 어머니는 파리 센 강변의 새 장수 딸로 가난한 서민 출신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상드는 프랑스 중부 시골마을 노앙에 있던 할머니의 정원에서 루소를 좋아하는 고독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18세 때 뒤드방 남작과 결혼했으나 순탄치 못한 생활 끝에 이혼하고,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하여 <피가로(Le Figaro)>지에 짧은 글들을 기고하며 남장 여인으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이때 여러 문인, 예술가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특히 여섯 살 연하였던 시인 뮈세, 음악가 쇼팽과의 모성애적인 연애 사건은 당시에 상당한 스캔들을 일으켰다. 또한 화가 들라크루아, 소설가 플로베르와의 우정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상드는 이처럼 72년의 생애 동안 우정과 사랑을 나눈 사람들이 2,000명이 넘는 신비와 전설의 여인이자 ‘정열의 화신’이었고,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사랑의 여신’이었다. 상드는 여성에 대한 사회 인습에 저항하여 여성의 자유로운 정열의 권리와 남녀평등을 주장한 처녀작 『앵디아나』(1832)를 발표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같은 계열 작품인 『발랑틴』(1832), 90여 편의 소설 가운데 대표작인 자전적 애정소설 『렐리아』(1833)와 『자크』(1834), 『앙드레』(1835), 『한 여행자의 편지』(1834∼1836), 『시몽』(1836), 『모프라』(1837), 『위스코크』(1838)등 연이어 발표한 소설로도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에 장 레이노, 미셀 드 부르주, 라므네, 피에르 르루 등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영향으로 인도주의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소설을 썼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프랑스 여행의 동료』(1841), 『오라스』(1841∼1842), 『앙지보의 방앗간 주인』(1845), 『앙투안 씨의 죄』(1845), 그리고 대표작이자 대하소설 『콩쉬엘로』(1842∼1843), 『뤼돌스타드 백작 부인』(1843∼1844), 『스피리디옹』(1838∼1839), 『칠현금』(1839), 『테베리노』(1845) 등이 있다. 또한 상드는 1844년의 『잔』을 필두로 해서 소박하고 아름다운 일련의 전원 소설들을 발표했는데,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마의 늪』(1846), 『소녀 파데트』(1848∼1849), 『사생아 프랑수아』(1849), 『피리 부는 사람들』(1853) 등이 있다.

노년에는 방대한 자서전인 『내 생애의 이야기』(1847∼1855)를 집필하였고, 초기의 연애 모험소설로 돌아가서 『부아도레의 미남자들』(1857∼1858)과 『빌메르 후작』(1860), 『검은 도시』(1861), 『타마리스』(1862), 『캥티니양』(1863), 『마지막 사랑』(1866), 『나농』(1872), 손녀들을 위한 동화 『할머니 이야기』(1873∼1876)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25편의 희곡을 포함하여, 평론과 수필, 일기, 비망록, 기행문, 서문, 기사 등 180여 편에 달하는 수많은 글을 남겼다.

특히 그녀의 편지들은 조르주 뤼뱅에 의해 파리의 클라시크 가르니에 출판사에서 총 26권으로 편집되었는데, 이 방대한 규모의 기념비적인 서간집은 세계문학사에서 서간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그동안 왕복 서간집으로는 『상드와 플로베르』(1904), 『상드와 뮈세』(1904), 『상드와 아그리콜 페르디기에』, 『상드와 피에르 르루』, 『상드와 생트뵈브』, 『상드와 마리 도르발』, 『상드와 폴린 비아르도』등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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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렐류드

관심작가 알림신청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불번역전공 24기다. 마조 에바, 강하림, 강소라, 신예인, 이다경, 조순기, 최비결, 최정윤, 최연희가 함께했다. 쇼팽의 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전주곡」에서 착안해 이를 뜻하는 음악 용어 프렐류드를 팀명으로 하며 함께한 출판 번역의 시작을 기념했다. 현재 통번역사 외에도 각각 프랑스어 강사, 약사 등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펼치고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10쪽 | 130*210*20mm
ISBN13
9791192004464

책 속으로

“(…) 대단한 유명인을 만났습니다. 조르주 상드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뒤드방 부인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상은 내 취향이 아니었고,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심지어 거리를 두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
---「프레데리크 쇼팽이 바르샤바의 가족에게」 중에서

“꼬마(쇼팽)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주세요. 꼬마를 놀라게 해야죠.”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중에서

“(…) 쇼팽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예요. 연신 기침을 하니까요(…)”
---「다구 백작 부인이 노앙의 조르주 상드에게」 중에서

“내일 우리는 발데모사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으로 향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시적인 거처가 있을까요. (…) 마요르카의 자연은 정말이지 평생 본 적이 없을 만큼 황홀합니다.”
---「조르주 상드가 파리의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중에서

“상드는 끊임없이 나를 걱정했다네. 신께서 우리를 현지 의사들로부터 막아주신 덕분에 그녀는 홀로 나를 간호해야만 했지! 내 침대를 정돈하고, 방을 치우고, 약차를 준비하며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녀를 보았네.”
---「프레데리크 쇼팽이 파리의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중에서

출판사 리뷰

섬세한 피아니스트와 자유분방한 소설가의 첫 만남

1836년 말, 쇼팽과 조르주 상드가 처음 만났을 당시 두 사람은 이미 유명인사였다. 스물여섯 살이었던 쇼팽은 「발라드 1번 G단조」, 「스케르초 1번」 등 여러 대표작을 작곡하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앵디아나Indiana 』, 『렐리아Lélia 』 등이 순식간에 유명해지면서 상드는 서른두 살에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었다. 게다가 상드는 많은 이들과의 염문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쇼팽에게 첫눈에 반한 상드의 적극적인 구애로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세간에서 떠드는 것처럼 상드가 방탕하게 성적 쾌락만 탐닉한 건 아니었다. 1838년 6월, 조르주 상드가 쇼팽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보이치에흐 그지마와에게 쓴 편지를 살펴보면 “그가 자신의 인생을 제 손에 온전히 맡기러 온다면 저는 몹시 두려울 것입니다”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쇼팽에 대한 열정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사랑이 저를 사로잡을 때, 그것을 이성으로 통제하는 것은 제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던 상드는 헌신적으로 쇼팽을 보듬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쇼팽은 온 힘과 영혼을 다하여 상드를 사랑하게 된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과 상드의 『스피리디옹』이 탄생한 마요르카섬에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둘을 바라보는 질투 어린 시샘과 둘의 관계가 언제 깨질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연일 입방아를 찧었다. 쇼팽과 상드는 추운 파리의 겨울을 피해 스페인 마요르카섬으로 떠나기로 한다. 상드의 아들인 모리스의 건강 회복과 지난해 독감으로 고생했던 쇼팽의 건강에 이로울 거라는 좋은 핑계를 대고 말이다.

하지만 마요르카섬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현지 의사들이 감기에 걸린 쇼팽을 결핵으로 오진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결핵은 흑사병만큼이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1838년 12월 3일, 쇼팽이 친구 율리안 폰타나에게 쓴 편지에는 그때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첫 번째 의사는 내가 죽을 거라 말했고, 두 번째 의사는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고, 세 번째 의사는 내가 이미 죽었다고 하더군.”

마요르카섬의 사람들은 낯선 외국인인 쇼팽과 상드 일행에게 집을 빌려주는 것조차 꺼려 했다. 결국 그들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오래되고 거대한 발데모사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에 자리를 잡는다. 풍족하기보다 없는 게 더 많은 열악한 환경에, 좋지 않은 건강 상태의 쇼팽을 상드는 헌신적으로 보살핀다. 상드는 마를리아니 백작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그럴수록 가족의 유대는 더 단단해지고 우리는 서로에게 더 가까이 기대며 더 큰 애정과 내밀한 행복을 나눕니다”라며 역경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는 쇼팽과의 관계를 암시하기도 했다.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쇼팽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상드를 ‘천사’라고 지칭한 대목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쇼팽의 열렬한 사랑이 담긴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 노앙 쇼팽 페스티벌 60주년 기념 & 조르주 상드 사망 150년

쇼팽과 상드가 함께 지냈던 곳이자 상드의 고향이기도 한 프랑스 노앙에서는 매년 두 사람을 기리는 ‘프랑스 노앙 쇼팽 페스티벌’이 열린다. 올해 2026년에는 프랑스 노앙 쇼팽 페스티벌 60주년과 조르주 상드 사망 150년에 맞춰 8월 15일에서 23일까지 제1회 국제 쇼팽 플레엘 피아노 대회가 개최된다. 196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인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가 첫 대회의 멘토로 참가할 예정이다.

추천평

“쇼팽 에튀드 안에는 대지의 신음, 나이 든 이의 회한, 사랑의 편지, 그리움과 먹먹함 그리고 자유 같은 여러 감정이 있다.” - 임윤찬 (피아니스트)
“쇼팽은 폴란드인도,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아니다. 그의 진정한 조국은 시라는 마법에 걸린 왕국이다.” - 하인리히 하이네
“연주회는 쇼팽의 육체를 지치게 하기보다, 시인다운 그의 예민한 기질을 더욱 자극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 Franz Liszt (프란츠 리스트)
“쇼팽의 삶은 분명 마요르카 체류 이전과 이후로 나뉘며, 이는 소설 같고 낭만적인 여행이 그에게 유익했음을 보여준다. 조르주 상드의 사랑이 그에게 틀림없이 좋은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 장 이브 클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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