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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수는 읽기를 그쳤다. 콧잔등이 시큼했다. 자신도 자신의 아들도 글쓴 시인이 차마 붙이지 못하겠다는 그 '마리'에 포함될 수 밖에 없다는 탄식이 그의 속을 울렸다. 마리. 그래,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한밑천을 장만하러 갔다고 하지만. 인간을 짐승처럼 다룬 인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만 무사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의 일념에 빠져 있었으니 나 역시 '한 마리'일수 밖에 없겠지. 그 대가로 밥만 축내고 있는 밥벌레, 아들에겐 너무 잔인하고 미안하지만 내 아들인 죄로 역시 밥벌레로 있을 수 밖에 없겠지. 밥벌레와 괴상한 벌레. 흥, 그래. 우리는 같은 종족의 '마리' 들이지.
--- p.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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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크게 아픈 사람이라는 거, 간질병 환자일지도 모르고 폐병쟁이일지도 모른다는 동네 사람들의 쑤근덕거림이 나의 인생에 안겼던 첫번째 충격은 나를 조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거대한 배가 내 어린 가슴을 들이받은 두번째 충격은 꿈을 선사하는 사건이었던 셈이지. 그래서 나도 비로소 미래라는 시간을 알게 되었고 그 미래는 꿈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
이만하면 종이배가 한때 나의 어마어마한 미래를 적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전혀 허풍이 아니란 점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겠어? 영호는 종이배를 옆으로 눕혔다. 문득 그것을 손바닥으로 힘껏 누질렀다. 종이배가 가자미처럼 납작해졌다. 그렇게 종이배를 손바닥 밑에 깔아뭉갠 자세에서 그는 답변을 하고 있었다. 방금 그의 귀에 들려온 질문은 왜 선장의 꿈을 버리고 노동운동가가 되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냐는 것이었다. --- p. 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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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고엽제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슬로우 불릿』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오는 4월 30일은 베트남 종전 26주년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세계의 모든 지성은 20세기에 인류의양심을 실험한 두 개의 전쟁으로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전쟁을 꼽는다. 특히 베트남 전쟁의 세계사적인 복잡성과 비극적인 실체를 볼 때, 미국의 최우방으로서 파월국군을 보낸 우리로서는 이로 발생된 다양한 문제들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이대환의 『슬로우 불릿』 또한 세계사의 주변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도도한 문명의 급류에서 중심을 찾기 위한 작은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대환은 이 작품에서 전쟁이라는 최악의 사건과 그 도구들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비극적인 삶의 고통을 우리 눈앞에 펼쳐놓는다. 서서히,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오고야 말기에 '느린 총알'로 불리는, 고엽제를 앓고 있는 사람은 현재 우리 나라에 7만여 명이다. 이 소설은 그 중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한 참전용사와 후유증 유전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아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쓰라린 삶을 다룬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