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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바람을 타고
추정경 저
허블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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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오대산 사고로 가는 길
1759년, 조선의 손님별
비가 오던 전나무 숲길
종이를 얼룩지게 만든 마음
또 다른 포쇄
세초
1762년, 그해
후대
1776년, 조선의 새바람
핼리혜성의 궤도
에필로그_다시 붉다

저자 소개 1

울산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했다. 『내 이름은 망고』로 제4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천 년 집사 백 년 고양이』 『열다섯에 곰이라니』 시리즈를 비롯해 『언더, 스탠드』 『벙커』 『월요일의 마법사와 금요일의 살인자』 『죽은 경제학자의 이상한 돈과 어린 세 자매』 등이 있다. 큰 파도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사랑하며, 그가 짊어진 삶의 굴레를 그려내는 서사 문학을 더 깊이 사랑한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조각가가 되었을 것이다. 돌 대신 글이라는 단단한 원석을 깨며 살아가니, 작은 뜻이나마 이루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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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274쪽 | 140*205*15mm
ISBN13
9791124668184

책 속으로

“그새 저 사람이랑 친해졌어? 아니면 관심 있어?”
“관심은 무슨? 조선 남자 내 타입 아니야. 올드해. 재미없는 범생이 같아.”
그 말에 강이 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의 예법에 벗어나지 않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잖아. 너 그 배운 데 없어 보이는 말투도 고치고.”
“내가 뭐!”
수가 씩씩거리며 얼굴을 들이밀자 강이 그 얼굴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조용히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당분간 사람들 앞에서는 좀 자중하자.”
“자중? 자중이 뭐야?”
“너 또 대화 예법 모드 끄고 있지?”
---p.48

“나리, 맨발로 이 길을 걸어보시겠습니까?”
조선 사대부에게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수겸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자 수는 두 팔을 활짝 펴 보이며 말했다.
“보십시오. 아무도 이 숲길을 다니지 않습니다. 하늘도 잘 보이지 않고요. 누구 하나 보는 이 없는데 세상을 무서워해서 무엇 합니까. 평생 겹겹이 껴입는 저고리, 바지, 도포, 버선에 갇혀 있는 제 몸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그대의 눈이 있지 않소.”
그 말은 마음 한가운데 조그마한 돌을 던진 것처럼 서서히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갔다.
---p.117

“후대에서는 지금과 사는 모습이 많이 다르오?”
“……비슷합니다. 인간 군상은 여전하고 인생사 제 맘대로 안 되는 것도 똑같습니다. 다만 어쨌든 모두 평등하다 입으로 말하고, 타인과 자신을 해치지 않는 한 스스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믿습니다.”
“가문과 당파를 넘어 자신이 연모하는 사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소?”
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겸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대가 살고 있다는 그 후대라는 곳이 참으로 부럽군.”
“…….”
“내가 갈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
“네?”
---p.120

“자, 그럼 내가 읽어보리다. 송헌, 자네가 이 삼행시의 운을 띄워주게.”
수겸이 눈빛으로 수의 의사를 묻자 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
“금세 작별이겠군요.”
“강.”
“강산이 서른 번쯤 지난 뒤에 만날 수 있을까요.”
“산.”
“……산보 나왔던 길, 다시 돌아갑니다. 허허, 금강산이 가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그려낸 후대의 삼행시라니! 짧은 문장 안에 담긴 묘미가 참으로 놀랍소.”
수는 사홍의 놀림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사홍은 수를 놀리려는 게 아니었다. 조선의 선비인 사홍과 수겸이 그 시가 이별을 고하는 시임을 어찌 모를까. 그저 담담하고자 애쓰는 것뿐이었다.
---p.181

“다시 만날 기약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소?”
“…….”
“헛된 약속이 되겠구려. 그대는 그대의 삶을 충실히 살고, 나는 내 생을 충실히 사는 걸로 합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수는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마음을 애써 끊어 내는 것임을 알면서도 속상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숨기고 물었다.
“조선에서는 양반이 맨발로 흙을 밟는 게 이상합니까, 지기가 서로를 안는 것이 더 이상합니까?”
“전자가 더 이상하오.”
“그럼 한번 안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수는 수겸을 와락 끌어안았다. 수겸은 그런 수를 밀어내지도 함께 안지도 않았다.
---p.185

출판사 리뷰

별 하나 보기 위해 삼백 년을 건너온 천문학도와
스스로 그은 선조차 넘지 못하는 조선의 선비

조선은 기록에 미친 나라였다. 사관은 임금의 말과 행동을 빠짐없이 적었고, 그렇게 쌓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 되어 깊은 산속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다. 조정은 실록이 습기와 벌레에 상하지 않도록 때마다 관원을 보내 포쇄했다. 오백 년 가까운 왕조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것은 이처럼 기록하고 지키는 일을 멈추지 않은 덕분이다. 사고의 문을 열기 전에 제례를 올리고, 책을 꺼내 한 장씩 넘기며 먼지를 털고, 다시 궤에 넣어 봉하기까지, 『조선의 바람을 타고』는 포쇄의 현장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낸다.

핼리혜성을 연구하는 천문학도 수정은 1759년의 혜성을 육안으로 관측하기 위해 삼백 년 전 조상의 몸에 접속한다. 오대산 사고로 향하는 포쇄 행렬에서 눈을 뜬 수정은 원칙대로만 사는 젊은 기사관 수겸과 그 길을 나란히 걷는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수정에게서 자꾸만 시대에 어긋나는 언행이 새어 나오는데, 수겸은 이를 의심하면서도 못 본 척 넘어간다. 함께 걷는 날이 쌓일수록 수정은 낯선 감정에 흔들리고, 수겸 역시 난생처음 겪는 제 마음에 당황한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은 하루하루 흐려져만 간다. 혜성이 스러지면 수정은 돌아가야 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삼백 년이 놓인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세상에서
어디에도 남길 수 없었던 그 계절의 마음
“어떤 마음은 알아차리기도 전에 지나가 버린다.”

요즘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기록되는 시대다. 생활기록부에 적힌 한 줄이 입시를 가르고, 주고받은 대화는 데이터로 남으며, 지워버린 게시물조차 어딘가에 저장된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마음’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다. 전송 버튼 앞에서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좋아한다고 썼다가 지우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어느 말도 제 마음에 꼭 맞지 않아서, 그 마음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스스로도 알지 못해서다.

누군가를 떠올리면 마음이 울렁이고 자꾸만 눈이 그 사람을 좇는데, 그게 우정인지 호기심인지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인지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 한창 그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때는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그게 실은 그런 마음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사춘기의 감정이란 대개 그렇게 뒤늦게 이름을 얻는다.

『조선의 바람을 타고』의 두 주인공 역시 제 마음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한다. 수정은 조선 남자는 취향이 아니라고 큰소리치면서도 어느새 수겸의 안색을 살피고, 수겸은 영문도 모른 채 수정의 눈길을 피하거나 까닭 없이 화를 낸다. 스스로 그은 선을 한 번도 넘어 본 적 없는 수겸에게는 제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선을 넘는 일이다. 더구나 그가 사는 세상에는 그 마음을 정확히 가리킬 말도 없다. 그래서 수겸은 수정에게 그 어떤 ‘온기’도 이곳에 남기지 말라고 당부할 뿐이다.

두 사람이 제 마음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은 서로를 잃고 난 뒤다. 수정은 제 시대로 돌아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수겸의 흔적을 찾고, 수겸은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한 그 마음을 품은 채 남은 생을 산다. 그러나 이 소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하지 못한 그 마음은 삼백 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끝내 도착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름 모를 감정을 안고 하루를 보내는 십 대가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몰라 혼자 끙끙 앓거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선의 바람을 타고』는 그런 독자에게 건네는 이야기다. 지금은 알 수 없어도 괜찮다고, 그 마음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으며 언젠가 제 이름을 찾아 도착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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