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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문_ 땅의 기억, 경계를 넘는 목소리
제1부 봉인된 상처 오키나와 할머니 이 섬의 도마뱀은 울지 않는다 소철꽃 과실파리 제2부 씻김의 의식 쓰토무의 노랫소리 K섬의 비가(悲歌) 바다에 고양이를 던져 본 적 있나요? 제3부 되찾은 숨 미네소타에서 온 편지 철조망 난민 코츠월드 숲에서 오키나와 유(幽)레일 이야기 해제_ 진혼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회복의 숨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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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과 좀처럼 섞이지 못했다. 마을 행사에 가끔 얼굴을 비추긴 했으나 떠들썩한 잔칫자리에 나타나는 법은 결코 없었다. 이 원칙만큼은 철저했다. 고운 옷을 차려입은 모습 또한 누구도 본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다가가기 힘든 괴팍한 노인쯤으로 여겼다. 그러다 이따금 무언가에 홀린 듯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집을 뛰쳐나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닐 때면, 정적을 깨는 할머니의 비명만이 마을 곳곳에 울려 퍼졌다. “도망쳐라! 버려라!”
- 오키나와 할머니 중에서 “우리 손주는 열 살이야.” 몇몇이 입을 모아 말했다. ‘열 살…….’ 쓰토무가 죽은 나이였다. 내가 그 숫자를 유독 의식한 탓일까. 다른 테이블 여기저기서도 마치 암호처럼 “열 살, 열 살” 거리는 소리가 웅웅대며 들려왔다. 내 머릿속에서는 죽은 쓰토무와 동기들의 열 살배기 손주가 기이하게 하나로 겹쳐졌다. 영원히 늙지 않는 쓰토무의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이 선연히 떠올랐다. 그러자 문득 내 눈앞에 앉아 떠들고 있는 동기들의 벗겨진 머리와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낯설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 쓰토무의 노랫소리 중에서 “당신 말이야, 진실을 마주할 각오는 되어 있겠지?” “……저는 항상 진실의 편에 섭니다.” 겨우 입을 뗀 미스 톰슨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며 대답했다. 할머니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당신 뒤에는 말이야…… 수많은 고양이 영혼이 붙어 있어. 열 마리나 스무 마리가 아니야. 백 마리도 넘어. 그리고 그 한가운데 있는 것이…… 황록색 눈을 한 흰 고양이로구나.” “황록색 눈…… 흰 고양이요?” 미스 톰슨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고양이의 눈 색깔까지는 말한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할머니는 감은 눈 너머로 무언가를 응시하듯 말을 이었다. - 바다에 고양이를 던져 본 적 있나요? 중에서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느릿느릿 철조망을 넘어 금지된 땅으로 흘러들어갔다. 가나는 그 연기의 끝을 눈으로 좇았다. 저 너머에는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 가족의 무덤이 있을 것이다. ‘어떤 모습일까…….’ 가느다란 향 연기가 조상님들의 무덤에 가 닿기를, 그리고 차가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큰아버지에게도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온전히 전해지기를 가나는 마음 깊이 빌었다. - 철조망 난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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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하나의 왕국이었던 섬은 어떻게 오키나와가 되었는가
오키나와는 본래 약 450년간 존속한 독립국 류큐 왕국이었다. 그러나 1879년 메이지 정부의 ‘류큐 처분’으로 왕국은 사라졌고, 주민들은 일본어를 배우며 새롭게 ‘일본 국민’이 되어야 했다. 이후 태평양전쟁과 미국 통치, 1972년 일본 복귀까지 국가와 제도는 거듭 바뀌었지만 삶의 터전은 그대로였다. 정치적 경계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지를 다시 물어야 했다. 오키나와 문학은 바로 이 뒤흔들린 정체성의 역사에서 태어났다. 한 지역의 향토문학이 아니라, 국가와 언어와 소속이 끊임없이 재편되어온 땅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문학이다. 섬의 경계를 넘어 오키나와 문학의 무대는 섬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후 미군 기지가 일상의 일부가 되면서 미군과 그 가족, 다른 문화와 언어가 작품 속으로 들어왔고, 작은 섬의 경제적 조건은 많은 사람을 하와이와 남미 등 해외로 떠나게 했다. 기지의 철조망과 바다 건너 이민의 역사는 오키나와인에게 ‘밖의 세계’를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삶과 직접 맞닿은 현실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오키나와 문학에는 일본 본토와 미국, 아시아와 해외 이민사회를 함께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이 자리한다.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는 오히려 경계를 넘는 상상력을 낳았다. 오키나와 문학은 가장 지역적인 장소에서 출발해 국가와 민족, 이주와 타자라는 넓은 문제로 뻗어나간다. 지금의 오키나와 문학은 오키나와 출신 작가가 오키나와를 쓰지 않는다면 그것도 오키나와 문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지역문학의 위기를 뜻하기보다 그 외연이 내부에서부터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키나와라는 땅의 기억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기억 하나로 작품을 규정당하지 않는 것. 지금의 오키나와 문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경계를 넘어설 만큼 풍부하고 다층적인 문학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과 오키나와 사이, 새로운 문학의 길 이번 선집에는 서로 다른 세대와 개성을 지닌 열한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작품의 소재와 문체는 제각각이지만, 그 안에는 오키나와라는 땅에서 길어 올린 역사와 기억, 언어와 삶의 감각이 다양한 모습으로 스며 있다. 이 선집이 더욱 특별한 것은 작품을 한데 모은 과정 자체가 하나의 교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2018년 평창에서 시작된 손지연 교수와 오시로 사다토시의 만남은 한국과 오키나와를 오가는 문학적 교류로 이어졌고, 여러 작가와 연구자가 힘을 보태며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함께 출간되는 이 선집은 오키나와 문학을 ‘소개’하는 책을 넘어, 서로 다른 역사와 기억을 가진 독자들이 문학을 통해 만나는 새로운 접점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