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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어린이 노예 노동의 해방을 위해 죽은 순교자
1. 팔려간 아이 2. 네 살짜리 노예 노동자 3. 오빠, 일하러 가지 마 4. 점점 불어나는 빚 5. 고통스런 나날 6. 도망 7. 마침내 얻은 자유 8. 학교에 가고 싶어요 9. 어린이 노예 노동자들을 위하여 10. 들판에 울려 퍼진 총소리 책끝에-결코 헛되지 않은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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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어린이들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뒤에는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워야 합니다. 제가 ‘우리는’ 하고 외치면 여러분은 ‘자유를’이라고 외쳐 주십시오. 우리는!”
“자유를!” 강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마음을 모아 합창하듯이 외쳤다. 그러자 어린아이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승리에 찬 몸짓으로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자유를, 자유를, 자유를!" 미국 보스턴의 한 대학강당에 모인 수백 명 앞에서 조금도 스스럼없이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는 이 작은 소년의 이름은 이크발 마시. --- p.22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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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노예 노동의 해방을 위해 죽은 순교자 이크발 이야기
이크발 마시는 ‘어린이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세계 어린이상’의 첫 수상자이며, 어린이 노예 노동에 항거하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피살된 파키스탄의 소년이다. 이크발은 4살 때인 1987년부터 카펫 공장에서 1루피씩을 받으며 하루 10시간씩 강제 노동을 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여 지냈고, 화장실에 가는 횟수도 정해져 있는데다 아무리 일을 해도 늘어나는 것은 빚과 매질 뿐이었다. 노예와 다름 없는 생활이었다. 자유를 꿈꾸던 이크발은 1992년 공장을 탈출해 파키스탄 ‘노예노동해방전선(BLLF)’에 들어갔다. 그 뒤로 이크발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어린이 노예 노동의 실상을 폭로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의 폭로는 세계 양심의 심금을 울렸고, 이는 세계 곳곳에서 항의로 이어져 파키스탄의 대형 카펫 공장 여러 곳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1995년 어린이 노동 운동가 이크발은 카펫업주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괴한의 총에 숨진다. 이크발의 죽음은 어린이 노예 노동의 참상을 세계 곳곳에 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크발은 2억5천 만 어린이 노동자의 해방의 상징으로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첨단화되고 풍족해 보이는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혹사 당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이 노동자들이 있다. 이런 현실은 모든 어른들을 부끄럽게 한다. 당연히 모든 어린이들은 보호 받고 교육 받아야 한다. 이크발의 희망처럼 이 이야기가 전세계 모든 어린이들이 자유롭고 교육받을 수 있는 세상에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날 세계는 물질의 생산이 점점 늘어나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로워 보인다. 교통 수단이 발달하고 무역도 늘어나 세계가 하나인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지구의 여기저기에는 그늘져 잘 보이지 않는 곳이 있으며, 심한 가난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10대의 어린이들까지 이러한 고생에 얽매여 있는 현실은 모든 사람을 슬프게 한다.” -구중서(문학평론가) * 이크발 마시(Iqbal Masih) 이크발 마시는 1983년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의 무리드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크발은 1987년 나이 네 살 때 카펫 공장에 노예 노동자로 팔려갔다. 그는 혹독한 노동과 학대를 견딜 수 없어 몇 차례 공장에서 도망치곤 했다. 그러다 1992년에 파키스탄 ‘노예 노동 해방 전선(BLLF)’의 도움으로 노예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그 때부터 어린이 노예 노동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1995년 4월 16일,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가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남자를 뒤에서 조정한 사람은 카펫 제조업자들이었다. 이크발 마시는 어린이 노예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1994년에는 ‘리복 인권상(청년 활동상)’을, 피살된 후인 2000년에는 제1회 ‘세계 어린이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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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머리에/ 어린이 노예 노동의 해방을 위해 죽은 순교자
이크발의 어머니가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1995년 4월 16일 저녁 9시였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넋을 잃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이크발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소비아도 세상을 떠난 오빠 곁에서 흐느껴 울었다. 이크발의 시신은 다음 날 오후, 집 근처에 있는 공동 묘지에 묻혔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크발의 장례식에는 전세계의 언론인, 노동 지도자, 인권 운동가를 비롯한 800여 명의 추모객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이크발을 ‘어린이 노예 노동의 해방을 위해 죽은 순교자’라고 하면서 마음 속 깊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편, 경찰은 이크발의 장례식이 끝난 후, 이크발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아쉬라프를 긴급 체포했다. 아쉬라프도 자기가 이크발을 죽인 범인이라고 자백했기 때문에 그는 전세계의 언론에 이크발의 살인자로 보도되었고, 곧바로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나중에 BLLF와 국제 인권단체들의 합동 조사 결과 아쉬라프가 범인이 아닌 사실이 밝혀졌다. 사건 당시 이크발과 함께 있었던 리아콰트와 파랴드도 어두워서 자세히는 볼 수 없었지만, 자기들에게 총을 쏜 사람이 아쉬라프는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아쉬라프는 이크발의 살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가난한 소작농인 그는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 이크발의 외삼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돌아가고 30분쯤 지나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저녁 8시쯤에 총소리가 났다. 경찰은 그런 사실만을 들고 그를 살인 용의자로 체포하고는 자백을 강요했다.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서 마침내 자기가 범인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BLLF와 국제 인권 단체들은 다시 면밀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크발을 살해한 범인으로 알리 후세인이라는 남자를 지목했다. 경찰의 조사 결과에서도 이크발을 쏜 총이 알리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의 배후에는 몇몇 카펫 공장의 사장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미 몇 차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알리를 시켜서 이크발을 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BLLF와 국제 인권 단체들이 알리 후세인을 살인범으로 고발했지만, 경찰은 그를 체포하지 않으려고 했다. 알리는 단지 이크발을 쏜 총의 주인일 뿐, 이크발을 살해한 범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경찰은 또 이크발의 살해를 뒤에서 조종한 카펫 공장의 사장들도 두어 차례 형식적인 조사만 했을 뿐, 구속하지는 않았다. 카펫 공장의 사장들은 뻔뻔스럽게도 변호사까지 동원해서 자기들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리고 경찰을 비롯한 사법당국은 그들의 주장에 동조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무런 죄도 없는 아쉬라프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워서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아쉬라프는 4년 반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그러던 중 인권 단체들의 끈질긴 석방 운동 덕분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에 의해 그의 누명이 벗겨진 것은 아니다. 경찰과 사법당국은 그의 무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쉬라프는 자유의 몸이기는 해도 법적으로는 살인 전과자였기 때문이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아쉬라프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이크발을 살해한 진짜 범인들을 찾아서 구속해야 한다면서 파키스탄 정부에까지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정부는 계속해서 모른 체만 할 뿐, 지금껏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린이 노예 노동자들의 권리와 그들의 자유를 위해 활동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끊임없이 위협했던 사람들, 즉 카펫 공장의 사장들이 이크발을 죽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알리 후세인을 이용했을 뿐, 명백한 살인자들이었다. 이크발은 비겁하고 무자비한 그들에 의해서 마지막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곁을 떠났다. 그 때, 이크발의 나이 겨우 열두 살이었다. * 책끝에 / 결코 헛되지 않은 죽음 이크발의 죽음은 파키스탄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크발의 장례식 날, 대부분 어린이인 3,000여 명의 시위자들이 라호르의 거리를 가득 메우고 행진을 벌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크발의 죽음을 계기로 어린이 노예 노동을 종식시킬 것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한편, 유엔 인권 위원회의 노동 단체 회원들은 이크발을 추모하는 묵념의 시간을 가진 뒤 노예 어린이들을 구하는 데 앞장서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파키스탄에 했던 수백만 달러어치의 카펫 주문을 취소하고, 불매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때,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어린이 노예 노동자들이 만든 물품을 수입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국제 노동 기구와 유니세프, 그리고 전세계의 인권 단체들은 좀더 구체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키스탄을 비롯해서 인도, 네팔 등 어린이들의 노동을 착취하도록 방치하는 국가들을 찾아다니며 어린이 노예 노동을 금지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는 한편, 카펫이나 축구공 등을 생산하는 공장에 대해서는 이러한 제품을 사들이는 유럽과 미국의 수입업자들과 협력해서 어린이들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지를 붙이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파키스탄에서는 50여 명의 카펫 공장 사장들이 어린이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파키스탄 의회는 어린이를 강제로 노예 노동시키는 사람에게 무거운 벌금을 물릴 뿐만 아니라 2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 인도에서도 어린이 노예 노동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법을 어긴 사장들에게 벌금을 물려서 그 돈으로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데 쓰기로 했다. 또한 네팔에서는 카펫 공장에서 15세 미만의 어린이들을 고용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기구를 설치했다. 이처럼 이크발의 죽은 이후 어린이들을 노예 노동시키는 나라들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노예 노동으로 착취를 당하던 수많은 어린들이 해방되었고, 더 나아가 교육을 받는 혜택까지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크발의 죽음은 파키스탄이나 인도, 네팔 같은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뿐만이 아니라 부유한 선진국의 어린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크발이 살해된 직후 스웨덴의 학생들은 어린이 노예 노동의 해방을 부르짖다가 숨진 이크발의 정신을 기리고, 전세계의 아동 노예를 종식시키기 위해 ‘반노예 청년단(YAS)’과 ‘반노예 어린이단(CAS)’이라는 두 개의 단체를 조직했다. 그 후에 이크발을 기념하는 한편, 어린이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활동을 펼치기 위해 ‘이크발 자유 센터’의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크발이 살해된 날인 4월 16일을 ‘이크발의 날’로 정하고, 매년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캐나다의 초등 학생인 크레이그 킬버거는 1995년 동갑인 이크발이 살해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어린이들에게 자유를(FTC)’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이 단체의 회원은 단체를 조직한 지 4년만에 20개국에서 5,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어린이의 노동을 착취하는 기업들의 주소를 알아내서 항의 편지를 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 결과 1998년에 미국의 ‘루스벨트 자유상’을 수상했다. 미국 메사츄세츠주의 브로드 메도우즈 중학생들은 이크발의 살해 소식을 듣고 바로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이 중학교는 이크발이 미국에 왔을 때 그가 방문했던 학교 중의 하나였다. 학생들은 회의 끝에 파키스탄에 이크발을 기념하기 위한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아이들은 도구를 들고 일하는 대신에 연필을 들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라고 외친 이크발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이 교육을 받으면 결과적으로 노예 노동이 종식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곧바로 이크발을 기념하는 학교를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수업이 끝난 후와 휴일에 세차를 하거나 빵을 팔아서 돈을 모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웹사이트를 개설하고 전국의 학교, 정부 기관, 인권 단체, 기업 등에 도움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상원 의원 케네디를 비롯한 정치가와 시장 등에게도 편지를 써서 자기들의 계획을 전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 학생들은 2년 뒤 약 15만 달러의 기금을 모았고, 수다르라는 파키스탄의 인권 단체에 부탁해서 그 돈으로 이크발이 살던 펀자브 지방의 외진 곳에 학교를 세우도록 했다. ‘이크발 학교’로 불리는 그 곳에서는 현재 400여 명의 어린이들이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는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 노동자들이다. 다행히 공장 사장들은 이들에게 하루 열 시간 정도 일하고, 두 세 시간은 학교에 나가 공부하도록 배려해 주고 있다. 공장에서 긴 시간 일을 하더라도 이크발 학교 같은 데에서 공부하는 어린들은 그나마 행운아인 셈이다. 왜냐하면 파키스탄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린이들이 여전히 공부와 거리가 먼 노예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크발이 살해된 후, 변화의 바람이 불어 수많은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보다 더 많은 어린이 노예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착취를 당하면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유니세프의 보고에 의하면, 유엔과 국제 인권 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5세에서 14세까지의 어린 노동자들이 전세계에 약 2억5,0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중 약 1억5,300만 명이 아시아에 있고, 나머지는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등지에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어린이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기 때문에 이크발처럼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다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려 있다. 이들은 또 사회적 발전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저 힘든 노동과 값싼 임금의 희생양이 되고 있을 뿐이다. 고용주들은 이들에게 ‘먹여 주는 것’만으로 임금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루 종일 공장에 갇혀서 지내는 어린이 노동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하층민들의 자식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사회적인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어 있다. 심지어 이들은 일하지 않는 또래 어린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욕설과 학대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들은 항의는커녕 오히려 공장에서 하는 노동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이 이들을 무기력하고 굴종하는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크발이 살해된 후, 그 동안 그의 죽음에 자극을 받은 국제 기구와 인권 단체들이 어린이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한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99년 6월 국제 노동 기구는 어린이 노동에 대한 협약을 채결했다. 이 협약에는 단순히 어린이 노동을 금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자체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교육으로 가난한 어린이 노동자들을 구하자는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얼마 전, ‘국제 자유 노조 연맹(ICFTU)’은 여러 인권 단체들과 협력해서 전세계의 어린이 노예 노동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그들을 교육시키기로 결의했다. 유니세프도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현재 유니세프는 그런 아이들이 많은 개발도상 국가들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울 수 있게 지원하는 한편, 교사들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 노동자들을 구하는 일을 국제 기구나 인권 단체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구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그들의 실상을 고발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이 노동은 결코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크발은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다. 그는 온갖 협박을 받으면서도 어린이 노예 노동자들의 실상을 고발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래서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수많은 어린이들을 해방시켰고, 그들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었다. 게다가 비록 살해되기는 했지만, 그는 죽음으로써 어린이 노예 노동의 심각성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운 가운데 그들에게 정의가 무엇이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이크발은 열두 살이란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어린이 노예 노동자들의 권리와 그들의 자유를 위해 항거한 그의 정신은 횃불처럼 타올라 영원토록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힐 것이다. 한편, ‘어린이 세상’은 2000년 제1회 ‘세계 어린이상(The World's Children Prize)’ 수상자로 어린이 노예 노동에 맞서다가 피살된 이크발 마시를 선정했다. 이 상은 스웨덴 정부가 새 천년을 맞아 특별히 기획한 것으로, 스웨덴 적십자 등 8개 단체로 구성된 ‘어린이 세상’이 주관하고 있다. ‘어린이 노벨상’이라고도 불리는 이 상은 어린이의 권익 향상을 위해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어진다. ‘세계 어린이상(WCP)’의 선정 위원회는 세계 각국에서 선발된 15명의 어린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전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이메일과 팩시밀리 등으로 추천을 받은 후보자(단체)들 중에서 수상자(단체)를 결정한다. 이 상은 스웨덴의 실비아 여왕이 수상자(단체)나 그의 가족에게 직접 수여하고, 상금은 70만 크로나(약 9,100만 원)이다. 2000년 제1회 ‘세계 어린이상’은 이크발 마시에게 수여되었다. 시상식에는 이크발 대신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소비아가 참석했다. 두 사람은 시상식에서 받은 상금을 파키스탄 어린이 노동자들의 교육과 ‘이크발 자유 센터’를 건립하는 데 기부했다. 그리고 이 상의 명예상은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소녀 안네 프랑크(13세)와 1976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웨토에서 살해된 헥터 피터슨(12세)에게 주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