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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조성암 암브로시오스 대주교
옮긴이의 말 - 김산춘 요한 신부 프롤로그 제1부 역사 제2부 관상(觀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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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힘으로 구름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다(출애굽기13,21-22). 이것은 보통 구름이 아니었다. 보통 구름처럼 물방울과 수증기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보통, 공기는 물방울에 의해 안개와 같은 성분으로 농축되고, 바람에 의해 압축 상태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었다. 성경의 증언대로 하나의 경이로움이었다. 태양 광선이 뜨거운 열로 비추었을 때 구름은 백성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그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미소한 물방울에 의해 공기가 품은 찌르는 듯한 열을 차단하며 적셔주었다.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이 되어 일몰부터 일출까지 자신의 고유한 빛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다.
--- p.32 이 기적과 함께 또 다른 놀랄 만한 일이 있었다. 하늘로부터의 양식(만나)을 모으러 나간 사람들은 물론 나이도 힘도 다 다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모으거나 더 적게 모으는 일은 없었다. 모든 양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졌다. 강한 자가 여분을 가지는 일도 없었고, 약한 자가 자신의 정당한 몫을 빼앗기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성경의 기술은 또 다른 기적을 언급한다. 즉 각자는 그날의 양식을 마련할 때 다음 날을 위해서 따로 간직하지 않았다. 어떤 인색한 사람이 다음 날을 위해서 그날의 식량 일부를 저장했어도 그것은 먹을 수 없는 구더기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출애굽기16.21-30). (35-36쪽) 그 무렵 깨끗한 공기로부터 오는 밝은 빛이 갑자기 암흑에 에워싸였다(히브리서12,18-21 참조). 그 결과 산은 어둠(gnophos)에 감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둠으로부터 불이 나타나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무서운 광경을 연출하였다. 불은 모든 방향으로부터 산 둘레에서 광휘를 내뿜고, 부근을 에워싸는 불에 의해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연기만을 내뿜고 있는 듯이 보였다. 모세는 백성을 산비탈로 인도하였다. 모세 자신도 이 광경이 두려워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의 혼은 두려움으로 아연실색했으며, 그의 몸은 전율로 떨리고 있었다. 모세의 그러한 모습은 백성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들처럼 자기가 본 것에 경악하였고, 몸은 격렬하게 떨렸던 것이다. --- p.38~39 모세는 짐을 풀 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공포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졌다. 그때에야 비로소 어둠(gnophos) 자체에 접근하였고 보이지 않는 것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그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게서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모세는 신적인 신비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 자신이 보이지 않는 동안, 그 보이지 않는 분과 함께 있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이것이다. 하느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려는 자는 모든 가시적인 것(현상, phainomenon)을 초월하여, 사유의 시선을 마치 산 정상에 두듯이, 저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적 파악(katanoēsis)이 도달한 적이 없는 바로 그곳에야말로 신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 p.40~41 저 보이지 않는 어둠에 에워싸여,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가르침(didaskalia)에 의해 위와 같은 사항들을 알게 된 모세는, 그 신비적인 가르침(mathēma)의 도움으로 자기보다도 한층 위대한 자가 되어갔다. 그 후 모세는 다시 어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동포들 곁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하느님의 현현(theophaneia) 안에서 그에게 계시된 그 놀라운 일들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율법을 전수하며, 시나이산에서 그에게 보여진 본에 따라 성소를 세우고 사제직을 제정하기 위함이었다. --- p.45 그 빛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함으로써 진리의 빛 안에 머무를 수 있는지를 배운다. 즉 샌들을 신은 발로는 진리의 빛이 보이는 그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없다. 바꿔 말하면,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벌거숭이임을 알게 된 그 처음부터, 인간 본성에는 죽어야 할 지상적인 거죽이 둘러쳐졌다. 그러한 거죽이 영혼의 발에서 제거되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저 높은 곳에 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정화가 행해질 때, 진리의 지식이 거기에 이어서 그 결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존재의 지식은 비존재에 관한 파악을 정화함으로써 발생하기 때문이다. --- p.65 그런데, 아레테(덕)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이 바다를 건넌 후, 물이 그들에게 달게 된 후, 샘과 대추야자 아래서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회복한 후, 바위로부터 물을 마신 후, 이집트로부터 가지고 나온 식료품이 완전히 동이 났다(출애굽기16,2-). 그러나 그렇게 이집트에서 수확한 이국의 양식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하늘로부터 양식(만나)이 내려왔다. 이 사건은 물론 관상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갈 수는 없다. 그 하늘로부터의 양식이란, 다양하고 동시에 단일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즉 겉으로 보기에는 한 형태이지만, 그 성질은 다양해서 각 사람의 욕구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었다. --- p.111 하지만 안식일을 위하여 비축된 것만은 썩지 않고 남는다. 이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담고 있다. 즉 인생에는 넘침을 구해야만 하는 때가 있다. 그때 모아진 것은 부패하는 일이 없다. 이른바 현세를 위해서 준비된 것을 넘어서, 사후의 안식에 도달할 때에는, 과도하게 모은 것도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 전날은 안식일에 대한 준비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즉 이날은 이른바 현세의 삶(bios)의 일이며, 거기서는 다가올 삶(zōē)에 속하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는 것이다. --- p.114 그 후 모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성막에 도달한다. 그러한 곳들을 통해서 자기 길을 가며, 자기의 정신을 그러한 높이까지 고양 시킨 모세를 누가 따라갈 수 있을까. 모세는 마치 하나의 봉우리에서 다른 봉우리로 옮겨가듯이, 높은 곳으로의 등반을 통해서 항상 이전의 자기보다도 더 높이 되었다. 그때 모세는 먼저 그 등반을 하기에는 너무 약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기슭을 뒤로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나팔 소리들을 듣는 것이다. 이리하여 모세는 드디어 신적인 지식(theognosia)이라는 깊숙한 성소 안에까지 들어간다.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는 일 없이, 다시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성막(skēnē)으로 옮겨간다(히브리서9,11). 이러한 등반을 통해서 고양된 사람은 그 경지에 있어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 p.125~126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그 욕구 안에서 결코 만족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자기가 볼 수 있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더 보고 싶다는 그의 욕구에 다시 불을 지펴야한다. 이처럼 하느님에로의 등반에서 그 증대(增大)는 어떠한 한계에 의해서도 방해받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선에는 어떤 한계도 발견되지 않으며, 선에로의 욕구라고 하는 여정에는 무언가의 만족에 의해 전진(前進)이 방해받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p.1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