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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을 맨발로 걸어간 자
정 도 전 철령의 산마루에 서다 곳간에 숨은 시궁창 쥐 숙청의 조건 가장 슬픈 정벌 강을 건넌 자들의 광기 민심은 땅에 있다 죽음으로 말하는 사람들 그림자 속에 숨는 법 마주 볼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날개를 꺾인 새는 하늘을 보지 않는다 멸망의 수레바퀴 여름에 봄꽃이 피다 작가의 말 : 오늘 우리가 정도전을 읽는 것은 부록 : 인물 약사(略史) 정도전 | 이성계 | 정몽주 | 최영 | 이인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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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구구…….
철령이 소리였다. 철령이는 영내의 군구(軍鳩)들과는 별도로 강씨 부인이 친정과 교신하기 위해 애지중지 기르는 흑비두리(비둘기)였다. 비두리의 이름을 철령이로 지은 건 험준한 철령을 넘어 오가기 때문이었다. 개경 등지에서 관북지방인 함경도로 가려면 회양, 고산, 용지원, 원산을 거쳐 반드시 철령(鐵嶺)을 넘어야만 했다. 오르막 40리, 내리막 40리에 아흔아홉 굽이. 구름도 쉬어간다는 높고 험준한 고개지만 철령이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잘도 넘어 오갔다. 강씨 부인은 나흘 전, 정도전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아봐달라는 서자를 묶어 철령이를 날려 보냈다. 그 답이 온 모양이었다. 계집종이 철령이가 가져온 서자를 강씨 부인에게 전했다. 눈에 익은 막내 오라버니의 글씨였다. 정도전은 목은(이색)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무(武)에도 관심이 많은 재사라 한다. 성격이 곧고 호방하나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며, 북원 사신 접대를 거절해 2년여 귀양살이를 했다는구나. 집권세력의 경계로 개경에 들어가진 못하고 김포에서 학숙을 열고 있는데 재생이 꽤 많다고 한다. 그의 외조모 출신이 비천해 출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은 좀 더딘 편이었다더구나. 그가 네 남편을 왜 찾아갔는지 잘 모르겠지만 외가의 신분 때문에 출세에 지장을 받자 네 남편에 기대어 복직을 하거나 보다 출세를 해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일단 경계를 늦추지 말고 잘 살펴보는 게 좋겠다. 가계가 비천하다? 그렇다면 노림수가 따로 있다는 건가? 나라 걱정은 겉치레고 속내는 비천한 신분을 감싸줄 호위가 필요해서 접근한 것일 수 있다? --- p.38~39 “주군! 드디어 때가 오고 있습니다.” “때가 오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천명을 받을 때가 온 것입니다. 명심하옵소서. 천명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하늘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느닷없이 그건 무슨 말이야?” “하늘이 누군가에게 대임(大任)을 맡길 땐 그 마음을 괴롭히고 배를 주리게 하고 몸을 고되게 해서 그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시험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역경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그걸 잘 견뎌내셔야 하옵니다.” “이 사람아, 오늘따라 왜 이러는가?” “왕과 최영은 곧 요동을 치자고 할 것입니다.” --- p.113 “대사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왜?” “경계가 허술합니다. 나라와 백성의 운명이 주군의 양 어깨에 걸려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그렇다고 우호세력만 있는 건 아닙니다. 왕도 적이고, 권문세족들도 적입니다. 최영 장군의 잔당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경계가 이리도 허술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 하겠는가. 괜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왕은 왕입니다. 여전히 보위에 있고, 숙위군과 근위내시들도 많습니다. 최영 장군의 잔당도 있고, 사병을 거느린 권문세족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서 이 집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럴 필요까지…….” “백 리를 가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쳐야 하는 법입니다. 마무리를 잘하려면 이미 걸어 온 구십 리와 남은 십 리 길을 똑같이 여길 정도로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다 허사가 될 수 있습니다.” --- p.152 지독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새로운 왕조 창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키 위해 매진하는 과정에서 자신 때문에 죽고 귀양 간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찾아온 통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값싼 인정 때문에 대사를 망칠 순 없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인 자신의 미련함으로 죽고 다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죽어 지하에서 만나면 그들에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그 누구보다 이색 사부님과 동심우 정몽주의 모습이 유독 또렷하게 떠올랐다. 스승은 생존해 계시니 언젠가 찾아뵙고 사죄의 말씀을 올리겠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정몽주는 죽어서나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 열린 세상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수반했고, 자신이 얻은 성취감 또한 그 뿌리가 같았다. 백년 천년 갈 줄 알았던 그 성취감은 금방 잦아들고 그 자리를 차지한 허무감이 안겨준 씁쓸함을 곱씹으며 새삼 사람 한평생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 p.349~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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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에게 밉보인 정도전은 결국 귀양길에 올랐다가 정몽주가 서장관으로 발탁할 때까지 9년여를 지방에서 떠돌며 지낸다. 유배가 풀리고도 정계로 들어오지 못한 채 곤궁한 백성의 삶 가까이 지내면서 개혁가의 삶을 궁리한다.
변방의 장수 이성계를 찾아가 그를 중앙 정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군신의 맹약을 맺으면서 역성혁명의 첫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이인임 일파의 권문세족과 최영, 이색을 비롯한 수구 세력의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하고, 모함과 숙청, 암살 기도가 이어지면서 위기를 겪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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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우리가 정도전을 다시 읽는 것은
내일이 어제와 다르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KBS 사극 드라마로 [정도전]이 방영되면서 600년 전의 진보적인 역사인물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정도전일까?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역사상 가장 험난했던 난세에 고스란히 들어 있어 삶 자체가 드라마일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런 역사인물이 한둘이 아니지만 정도전이 특별한 것은 백성을 겁박하거나 희생시키지 않고 세상을 바꾼 현명한 개혁의 주인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정도전』은 정도전의 유년 시절이나 청년 시절을 과감하게 배제하고, 가장 치열했던 당대의 정치 무대에서 맨주먹으로 싸워 가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맹자의 사상에 입각해 백성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과감하게 전제개혁을 시도하면서 토지를 독점한 권문세족들과 대결한다. 백성을 위한 개혁을 위해서는 스승과도 반목하고, 사상적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지와도 결별했다. 그가 부패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수구 세력과도 결별하면서 세상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꿈꾸던 개혁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정도전을 읽는 것은 정도전의 꿈이 위대한 국가의 건설에 있었던 게 아니라 다시 퇴행적인 어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오늘을 치열하게 살려고 했던 본보기를 만나기 위해서다. 정도전을 재미있게 알게 되는 소설 속의 놀라운 사건들 소설 『정도전』은 주인공 정도전을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 집어던지고 나서 그가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여줌으로써 때로는 추리소설처럼, 때로는 스릴러소설처럼 읽게 된다. 이성계와의 첫 대면부터 정도전은 신중한 이성계의 시험에 들어 긴박했던 상황을 헤쳐 나온다. 그나저나 정도전은 왜 실세인 최영이 아니라 한낱 변방의 장수를 찾아가 그의 군대를 꼼꼼하게 시찰했을까? 첫 번째 귀양을 가게 만든 북원 사신 영접사건에서 그는 왜 극단적인 거부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인임 일파를 제거했던 정월지주 숙청사건에서 정도전은 어떻게 이성계를 움직이게 만들었나? 이성계는 정도전이 아니었다면 요동 정벌을 떠났던 위화도에서 감히 회군할 수 있었을까? 이성계가 우왕을 폐하고 군권을 장악했을 때 배후의 실력자였던 정도전은 왜 전면에 나서지 않고 오히려 지방관을 자처해 떠났을까? 정도전이 주도하면서 권문세족들의 반발을 샀던 전제개혁은 어떻게 숱한 방해를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정도전은 해결책이 미로처럼 보이는 뜻밖의 사건들마다 불굴의 신념과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꿈을 양손에 쥐고 가열차게 도전했다. 변방의 장수를 중앙 정계에 데뷔시켜 정치적 참모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그는 마침내 이성계로부터 ‘백성이 먼저인 나라’를 위해 신권이 우선되는 정치체제를 약속받았다. TV 드라마를 보는 재미 소설을 읽는 재미 아는 것이 많아지는 재미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지혜 소설 정도전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는 어떻게 달라질까? 가장 먼저 TV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소설을 읽고 알게 된 인물들의 입체적인 모습을 영상으로 만나는 것은 색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의 차이를 느끼는 것 자체가 큰 재미가 되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소설은 이미 다 아는 역사라도 사건을 재구성해 흥미진진하게 보여줌으로써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소설과 TV 드라마는 어떻게 달리 구성해서 보여줄까? 드라마 작가와 소설가의 역사 상상력 대결을 견주어보는 것 역시 소설을 읽는 재미이기도 하다. 김용상 작가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인물들에게 내면화해서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소설 속에서 역사적인 디테일이 자연스럽게 잘 살아나는 것도 작가의 내공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이 시대가 배경인 문제는 쉽게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고 정도전이나 시대적 상황을 술술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흥미롭게 소설을 읽는 시간이 정도전의 생각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 가장 많이 달라지는 것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안녕해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각자의 마음에 담을 수 있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