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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모르는 위험은 관리할 수 없다1. 계산원은 앉아서 돈을 받으면 안 될까: 서서 하는 작업2. 욕설을 듣는 것도 업무의 일부인가: 감정노동3. 일과 삶의 화해는 가능한가: 일-가정 균형4. ‘아이들 밥 해주는 일’은 노동이 아닌가: 학교급식 노동자5. 청소는 단순노동일까: 청소노동자6. 잠들지 못하는 직업은 지속 가능한가: 간호사7. ‘돌봄’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돌봄노동8. 일의 위험은 다음 세대에 어떻게 남는가: 태아산재에필로그 | 보편적 노동자를 다시 쓰기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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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위험은 관리할 수 없다보이지 않는 위험, 보이지 않는 병을 드러내기 우리는 오랫동안 일의 위험을 사후에, 즉 사고나 질병으로 확인해왔다. 산업재해나 직업병 같은 비극적인 사건은 늘 벌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조명되곤 한다. 그러나 몸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위험을 알고 있었다. 여성들의 반복되는 유산, 이유를 알 수 없는 근골격계 통증, 잠들지 못하는 밤, 숨이 차는 폐, 감정을 삼켜야 하는 하루…… 몸은 이미 ‘이 일은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사회는 그것을 개인의 체질이나 나이, 운, 혹은 여성이라서 겪는 일쯤으로 설명했다. 여성의 노동으로 인한 건강 문제는 왜 산업보건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을까? 작업환경이나 산업보건 체계는 오랫동안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져왔다. 직업병 예방을 위한 특수건강진단은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를 표준으로 상정해 소음(난청)과 분진(진폐증) 등의 위험요인을 주로 살폈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저자는 교과서나 제도가 다루지 않는 영역에서 직종별로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는 많은 여성 노동자를 만나게 된다. 온종일 서서 일하는 판매직 노동자가 호소하는 하지정맥류와 족저근막염, 청소 과정의 반복 작업으로 발생하는 근골격계질환, 야간근무가 많은 간호사의 유방암, 반도체 공장 노동자가 겪는 유산과 사산……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이런 문제들은 산업보건에서 간과되거나 무시되어 개인의 문제로 떠넘겨지곤 했다. 노동의 위험이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노동자가 많은 직종에서 노동시간과 휴식, 고용 형태, 일터에서의 권한 등이 달라지면 위험의 양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에 걸맞은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보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2쪽) 저자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보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저자는 2000년대 초 목·어깨·팔 통증이나 마비를 겪은 전화번호 안내원의 집단 산재와 관련한 논문을 쓴 이후, 꾸준히 여성 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목소리를 내왔다. 2010년경에는 당시 생소했던 ‘감정노동’ 개념을 국내에 소개하고, 2012~2013년에는 요양보호사를 위한 책자 개발과 가사노동자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2018년부터는 간호사의 ‘태움’ 문제와 정신건강 연구를 수행했다. 2021년 학교급식 노동자 최초의 폐암 산재 인정 사례를 다루었으며, 청소노동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작업환경 개선을 시작한 대학에서 산업보건의를 맡기도 했다. 2015년 반도체 산업 실태조사에서 생식독성 문제를 연구해 2023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국에서 태아산재보험이 도입되는 과정에도 관여했다. 저자의 일련의 활동은 최근 20여 년간 한국에서 진행된 여성 노동보건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의 주요 업무는 특수건강진단이나 보건관리 대행으로 법이 정한 사업주의 의무에 대해 조언하고 노동자의 산재 보상 신청을 평가하는 것이지만, 저자는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여러 프로젝트에 지원해 연구를 수행하고,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와도 활발히 교류해왔다. 수많은 현장 검진, 대규모 실태조사, 밀도 높은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이 책에 생생하게 담아낸다. 그들이 겪는 직업병의 업무 관련성을 밝혀내고 의학적 증거를 찾아냄은 물론, 그 기저에 있는 사회구조의 문제를 통찰함으로써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를 드러낸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대중의 인식 변화를 이끌고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몸으로 뛴 여러 연구자와 활동가들의 노력에 존경을 표하며 그들의 숨겨진 서사를 일반에 알린다. 이 책은 그리하여 여성의 몸이 먼저 알아차린 신호를 질문으로 바꾸고, 질문을 연구로 만들고, 연구를 다시 사회의 기준으로 바꿔온 노동자, 연구자, 활동가, 시민들이 지나온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저임금으로 노동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자 그 안의 위험도 작게 취급되었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의 위치는 임금노동만을 진정한 노동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와, 집안일을 여성의 책임으로 여기는 가부장제가 중첩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오랫동안 여성이 가정에서 무임금으로 해온 돌봄과 청소, 조리 등이 일터에서 행해질 때, 그 노동은 여전히 ‘제대로 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특별한 숙련이 필요하지 않은 일로 평가된다.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판매나 전화 상담 업무 역시 신체에 별다른 부담을 가하지 않는 일로 인식된다. “저임금으로 노동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자 그 안의 위험도 작게 취급”(11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학적 데이터는 이런 노동에 상존하는 위험을 분명히 보여준다. 수많은 노동자의 인터뷰 역시 열악한 작업환경과 그로 인한 고충을 생생히 드러낸다. “쥐가 나서 자다가 깨서 잠을 설쳐요”(26쪽)라고 말한 공장 노동자는 바지를 걷어 다리의 뱀처럼 구불구불한 혈관을 보여준다. 판막 기능이 약해져 혈액이 고이면서 혈관이 늘어나고 구불구불해지는 질환인 하지정맥류로, 오래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생기는 직업병이다. 두 시간을 내리 서서 일하고 30분을 쉬는 마트 계산원들을 위해 관리자에게 압박스타킹을 지급하는 게 좋다고 하면, 그런 건 작업자들이 알아서 사서 신어야 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우리 월급은 욕 값이에요”(55쪽)라고 말한 콜센터 노동자는 동료들이 거의 다 소화장애와 변비가 있고, 1년에 5킬로그램씩은 살이 찐다고 말한다. 장시간 스트레스를 받으며 오래 앉아 있기 때문이다. 화장품 판매 노동자에 대한 감정노동 프로그램을 진행한 첫날, 한 노동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간 회사에 무수한 문제 제기를 했는데, 이게 답인가요? 마음 관리를 하면 문제가 해결되나요?” 노동자들이 드러내고, 활동가들이 알리고, 연구자들이 증명해온 현재진행형 변화의 연대기 “한 사람의 몸도 보편의 기준 바깥에 남겨두지 않기 위해”(271쪽)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그동안 노동자들이 먼저 ‘몸으로 알린’ 직업적 위험은 많은 부분 활동가들의 노력과 결합해 사회 인식을 바꾸고,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작업장에 휴게시설이 없는 것, 시간이 없어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것, 폭언이나 성희롱도 처음에는 ‘원래 그런 일’ 정도로 사소하게 여겨졌지만, 이제 우리 사회가 반드시 답해야 하는 산업보건의 과제가 되었다. 저자는 특히 젠더 관점으로 여성 노동을 바라보는 일이 여성을 특별히 보호하자는 제안이 아니라, 오랫동안 ‘보편’이라 불려온 기준이 얼마나 편향되어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분석의 도구임을 강조한다. 여성 노동자의 건강을 연구하면서 제기된 문제들은 여성에게만 필요한 특별한 요구가 아니다. 생식독성 물질을 줄이는 일은 임신한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생식건강과 다음 세대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고객의 폭력과 감정적 요구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일, 오래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앉을 권리를 보장하는 일, 야간노동 뒤 충분히 쉬게 하는 일 등은 남성 노동자에게도 필요하다. 일과 돌봄을 함께 감당할 수 있도록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일도 여성에게 집중된 돌봄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남성이 가족을 돌보고 일 이외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넓힌다.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며 장시간 노동을 감당해야 한다는 압력도 줄일 수 있다. 여성 노동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은 남성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하고, 충분히 쉬며, 아픈 몸을 혼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 책이 일하다 아픈 사람의 몸을 홀로 두지 않도록 노동의 기준을 다시 써나가는 데 실천적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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