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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동과 그의 시대
이상돈 저
에디터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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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장 개화기 육교시사의 고(高)씨 형제_17
구한말(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까지의 시기) 개화기|1876년에 결성된 중인 모임, 육교시사|
역관 고진풍의 네 아들

제2장 고희동의 백부(伯父) 고영주, 중부(仲父) 고영희_29
고영주와 가까웠던 선배 역관들|모슌함 사건과 강화도조약|고영주의 관직 경력|
고영주와 홍건익의 가옥|일본어 역관 고영희|주일공사로 활약한 고영희|이완용 내각에서 탁지부대신으로 발탁

제3장 고희동의 사촌 형 고희경_58
조선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육영공원|러시아 견제 역할을 했던 예식원 외사과장|
이토 히로부미와 신진 관료 고희경|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외국인들이 본 고희경|
동궁대부로 영친왕의 일본 유학에 동행|외국어에 능통했던 동생 고희성
-136일간의 세계 일주 항해 견문 062
-이토 히로부미 한국 왕복 일기 069
-일본 공사관 통역관, 시오카와 이치타로 074

제4장 고희동의 부친 고영철_88
고영철의 인적 교류가 보이는 『육교연음집』|청나라에 파견된 영선사 김윤식과 고영철|
관립 외국어 교육기관 ‘동문학’의 설립|미국에 파견된 조선 대표단 보빙사|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노선이 달랐던 홍영식과 김윤식|
보빙사 수원 3인의 엇갈린 인생|한성순보 기자 3인의 엇갈린 행보|육영공원과 한성외국어학교|
청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동학 민중봉기|망국으로 가는 10년간 지방관을 지낸 고영철|
고영철의 두 아들, 고희명과 고희중
-민영익과 홍영식의 정견분열 106

제5장 고영철의 셋째 아들 고희동_139
13세에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한국 정치·문화에 큰 영향에 끼친 마르텔|17세에 궁내부 주사에 임명|
1905년 11월 17~18일 ‘망국의 밤’|‘망국’과 함께 조선의 관료직도 사라져
-현상건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156
-조용만의 회고와 통역관 마에마 교사쿠 163

제6장 미술 유학을 떠난 고희동_166
서양화에 호기심을 갖게 한 레미옹|국내 최초의 서양화가 출품된 전람회|
서양화에 앞서 전통 서화를 먼저 배워|동경미술학교에 특별 입학|화려한 경력의 구로다 세이키 교수

제7장 ‘서양화가의 효시’ 고희동_191
경복궁에서 개최한 대규모 박람회|동경미술학교 출신 조선인들|시대의 아픔을 고민했던 지식인들|
화제가 된 『청춘』 창간호 표지 그림|현존하는 고희동의 자화상 3점|32세에 원서동에 자리를 잡아
-미술평론과 미술발전에 기여한 이경성 200
-우리 미술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이구열 210

제8장 고희동의 금강산 그림과 서화협회_213
40일간의 금강산 탐방|‘도화’로 불리던 미술 교사로 활동|한국 최초의 미술가 단체 ‘서화협회’ 발족|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고희동의 고행, 서화협회의 좌절|한국 최초의 미술잡지 편집자
-고희동과 함께 서화협회를 설립한 이도영 216
-인상파 화법을 한국화한 고희동의 서양화 〈습작〉 233

제9장 고희동과 동아일보_251
동아일보 창간에 전격 합류|신문 삽화에서도 선구자|신문 삽화가로 명성을 떨친 노수현
-동아일보의 창간 주역 3인

제10장 어둠의 세월을 보낸 고희동_264
서양화를 벗어버리고 다시 동양화로|고희동과 오세창, 그리고 간송 전형필|
문화 전성기를 구가한 1920~30년대 경성|조선 미술계의 암흑기|창씨개명과 중추원 참의 거부
-장안 신사가정 명부 274

제11장 해방정국에서 활약한 고희동_283
민족진영에 적극 가담|해방정국의 미술계|조선미술가협회, 대한미협, 문총|
서울신문의 탄생 비화와 변천사

제12장 미국 순방에 나선 고희동_310
견미 친선사절단으로 출국|동경을 거쳐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로|북대와 남대로 나뉜 친선사절단|
워싱턴 DC에서의 열흘|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보스턴에서 디트로이트, 시카고, 미니애폴리스로|
귀국, 그리고 사절 단원의 그 후 활동
-초대 주미 대사로 활약한 장면 315
-장면과 함께 야당을 이끌었던 조병옥 317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김동성 319

제13장 고희동과 6·25전쟁_353
제1회 국전과 고희동 심사위원장|6·25남침과 KBS 선무 방송|적치 하의 수난|부산 피난 시절|
6·25전쟁과 한국 화단|부산 정치파동
-고희동의 6·25 수난기 368

제14장 고희동의 전성기_380
제2회 국전과 초대 예술원 회장 선출|대한미술협회의 분열과 한국미술협회|1956년 국전 파행 사건|
장기집권한 국전심사위원장|문화국가임을 당당히 알린 국보 해외전시
-분열과 파괴를 조장: 우리 미술계의 분립에 대하여 389

제15장 정치인 고희동_399
이승만에 반대하는 ‘민주당’ 창당|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권 수호에 가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1959년 정국|3·15부정선거와 4·19혁명, 그리고 제2공화국|
참의원 의원 고희동|4·19가 가져온 미술계의 변화|한국문화방송MBC의 탄생 비화

제16장 ‘살아서 고전, 죽어서 역사’_425
80세로 선종|‘살아서 고전, 죽어서 역사’|‘춘곡 고희동 40주기 특별전’|근대미술의 선구자|
고희동의 후손들

제17장 고희동의 친인척들_443
고희동의 맏사위 이건혁|고희동의 둘째 사위 정순택|고희동의 처조카 조용만|
고희동의 처조카 사위 김영상

에필로그_478
도판_485

저자 소개 1

李相敦

6·25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우와 고계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계본은 이 책의 주인공인 고희동의 막내딸이며, 따라서 지은이는 고희동의 외손자이다. 전쟁이 끝난 후 친가와 외가는 원래 고향인 서울로 올라왔으며 지은이는 수송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서울대 법대 및 대학원을 다녔다. 4·19와 5·16, 그리고 1972년 유신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해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툴레인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30년 동안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환경법, 헌법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100여 편
6·25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우와 고계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계본은 이 책의 주인공인 고희동의 막내딸이며, 따라서 지은이는 고희동의 외손자이다. 전쟁이 끝난 후 친가와 외가는 원래 고향인 서울로 올라왔으며 지은이는 수송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서울대 법대 및 대학원을 다녔다. 4·19와 5·16, 그리고 1972년 유신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해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툴레인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30년 동안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환경법, 헌법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100여 편에 달하는 논문과 보고서를 펴냈다. 조지타운대학에서 풀브라이트 교환 학자, 로욜라대학(LA)에서 교환교수를 지냈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조선일보 비상임논설위원을 지내면서 환경, 사법제도 등에 관한 사설과 칼럼을 집필했다. 새누리당 비대위원 및 정치쇄신위원으로 2012년 총선과 대선에 참여했으며 정년을 4년 앞두고 대학에서 퇴직했다. 2016년 20대 국회에 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이 되어 4년 동안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일했다.

지은 책으로는 《세계의 트렌드를 읽는 100권의 책》(2005년), 《비판적 환경주의자》(2006년), 《조용한 혁명》(2011년), 《미국의 헌법과 대통령제》(2012년), 《미 해병대 한국을 구하다》(2013년), 《공부하는 보수》(2014년)가 있으며, 국회의원 임기를 끝낸 후 회고록 《시대를 걷다》(2021년)와 칼럼집 《시대를 생각하다》(2023년)를 펴냈다. 2025년에는 마릴린 먼로의 삶과 죽음을 다룬 《마릴린 먼로와 케네디 형제》를 펴냈다. 개인 블로그는 www.leesangdon.c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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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1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500쪽 | 152*215*30mm
ISBN13
9788967443108

책 속으로

고희경은 궁내부 예식과장 겸 외사과장으로서 조약 체결을 강요하러 조선에 온 이토 히로부미 특파대사를 영접하고 11월 17일 저녁부터 18일 자정이 넘는 시간에 수옥헌에서 박제순, 이완용 등 대신 5명이 조약에 서명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 p.68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대신들에게 서명을 강요하던 1905년 11월 17일 늦은 저녁, 고희경은 한규설한테 고종을 만나게 해준다고 속여 감금하고는 참정대신이 없는 자리에서 박제순 외부대신이 도장을 찍도록 했다는 것이다. 예식원 예식과장 겸 궁내부 외사과장이던 고희경은 고종의 의전 및 대외관계 비서관이었으나 실질은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따라 조약에 반대하는 한규설을 연금한 것이다.
--- p.74

1916년 1월, 부친 고영희가 사망하자 고희경은 고영희가 갖고 있던 자작 작위를 계승했다. 1920년 4월, 왕세자 영친왕 이은과 일본 황실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이 성사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으로 승작되었다. 고희경은 조선 귀족 중 습작자로서는 유일하게 승작되었다.
--- p.81

갑신정변으로 보빙사 사절 3명의 운명은 엇갈리게 된다. 민영익은 홍영식과 박영효가 동원한 일본 사관학교 조선 유학생들이 휘두른 칼에 중상을 입었고, 홍영식은 우세한 청군과 관군에 의해 살해됐다. 서광범은 김옥균 등과 함께 간신히 일본 선박에 올라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보빙사 수원 3명 유길준, 변수, 고영철의 운명도 엇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 p.117

고영철은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경장과 아관파천 등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 결정적인 10년 동안 경상도 봉화, 함경도 고원, 경기도 북부 마전, 평안도 삼화에서 지방관을 지냈다. 육교시사에서 당대의 개화기 인사들과 교류하고 청나라와 미국을 다녀온 고영철이 10년 세월을 머나먼 지방에서 지방관으로 지낸 것이다. 특히 봉화 현감·군수로 3년 반이란 긴 기간 동안 근무했으니 지방관 인사가 빈번했던 당시에는 이례적이었다.
--- p.135

고희동이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1899년 9월 1일이었다. 당시 입학시험은 국문과 한문 독해 및 작문이었고, 나이는 15세 이상이었으나 대체로 20세가 넘어서 입학했다고 하니 만 13세에 입학한 고희동은 이례적으로 어린 학생이었다
--- p.144

고희동은 수옥헌에서 일어난 이 소동을 짐작하고 침통한 기분으로 궁내부를 나와 대한문으로 향하는 도중에 내직실을 지나게 되었다. 고희동은 지난밤 일이 궁금해 숙직실을 들여다보니 모두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있는 ‘궁중일기’를 집어 17일 자를 보니 커다랗게 ‘궁중무사(宮中無事)’가 쓰여 있었다.”
--- p.161

일본이 우리나라를 보호국으로 만든 지 2년이 지나 국가의 체모는 말할 수 없이 되었고, 무엇이든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게 되면서 이것저것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청산하고 그림의 세계와 주국(酒國)으로 갈 길을 정하려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두 분 선생의 문하에 나갔다.
--- p.167

동경에 도착한 고희동은 우에노에 있는 동경미술학교의 문을 두드렸으나 학벌 조건이 미달이고 서양화 기초지식이 없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했다. 동경미술학교는 고희동에게 사립연구소에서 1년~2년 그림 공부를 한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고희동은 학비도 걱정이거니와 우선 입학을 해야 모든 일이 풀린다고 생각하고 일본 정부 당국 요로(要路)에 청탁해 특별 입학을 해보고자 했다.
--- p.181

고희동이 일본 정계 거물인 스에마츠 겐조에 힘입어 동경미술학교에 특별 입학을 하게 된 데는 고희경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고희경은 스에마츠 겐조에게 부탁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고희동으로선 이런 사실을 구태여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고희동이 평생을 두고 일본 유학 시절 생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 p.186

1915년 3월 29일 고희동은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조선인으로선 동경 미술학교를 최초로 졸업했을 뿐 아니라 최초로 대학에서 서양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조선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 p.192

고희동이 스케치로 다룬 주제는 떡치기,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다리밟기, 돈치기 등 전통적인 한국의 세시풍속이었다. 또한 이에 앞서 같은 해 1월 3일 자에는 ‘대정(大正) 5년 화사(畫史)’라는 희화(戲畫)가 실린 적이 있다. 따라서 고희동의 신문 삽화 활동은 이 시기에 매일신보에서 처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 p.196

『청춘』 창간호는 포효하는 호랑이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같은 젊은이 모습을 표지로 해서 주목을 받았다. 이 표지를 그린 작가는 고희동이었다. 고희동은 최남선으로부터 표지 그림에 호랑이가 있어야 하고 청년의 기상이 나타나 있어야 한다는 주문을 받고 이 표지를 그렸다.
--- p.204

고희동의 서양화는 유화로 그린 자화상 3점과 2026년에 확인된 〈습작〉이 존재한다.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인 〈정자관을 쓴 자화상〉이 동경 예술대학에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몇 차례 전시된 바 있다. 또 다른 자화상 2점, 즉 〈부채를 든 자화상〉과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 국립현대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 p.207

고희동이 귀국하기 전에는 고희동보다 두 살 위인 이도영이 도화를 가르쳤으나 이도영은 서양화가가 아니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동경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고희동이 한국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니 우리나라 교육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 p.219

1918년 5월 19일,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을 필두로 강진희, 강필주, 김규진, 김돈희, 김응원, 정대유, 정학수, 나수연, 이도영, 고희동이 모여서 ‘서화협회(書畫協會)’ 창립을 위한 발기인회를 가졌다.
--- p.223

고희동과 이도영이 주도해서 화려하게 시작한 서화협회전은 조선미전이란 강력한 라이벌을 만나 점차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서화협회 회원들마저 조선미전에 치중하게 되자 협회 회원 사이에서도 분열이 생겼다.
--- p.239

고희동은 서화협회를 통해 신진 화가를 발굴하고 전통적인 서화를 발전시키고자 했으나 이 같은 여건의 변화를 이겨내지 못했다. 작가들 스스로 서화협회전을 외면했으며 의연한 긍지로 서화협회전에만 협력한 작가는 극히 드물었다.
--- p.247

미술평론가 안현정은 “고희동이 양화가에서 서화가로 전향한 이후 조선미전을 보이콧하면서 오로지 서화협회전 운영에만 애썼던 사실 정도가 확실한 민족적 의지의 반영으로 평가될 뿐”이라고 다른 서화가들과 다른 길을 간 고희동을 평가하고 있다.
--- p.248

서화협회의 또 다른 선구적 업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잡지라고 할 수 있는 『서화협회보』를 펴낸 것이다. 서화협회는 1921년 10월 25일 자로 『서화협회보』 창간호를 발간했다. 『서화협회보』 발간은 협회 출판부장을 맡고 있던 이도영이 책임자였으나 실제로는 총무인 고희동이 편집계획에서 교정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도맡았기 때문에 이구열은 고희동이 한국 미술잡지의 역사를 연 첫 편집자라고 평가했다.
--- p.249

동아일보를 창간한 김성수는 고희동을 미술기자로, 염상섭을 문학기자로, 미국에서 신문학을 공부한 김동성을 조사부 기자로 채용했다. 고희동은 월급으로 부장급인 80원을 받았다. 이처럼 고희동은 동아일보가 창간을 준비할 때부터 미술기자로 이름을 올렸다.
--- p.254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창간호를 냈다. 동아일보에서 고희동 이 이룬 큰 업적은 바로 창간호 디자인이다. 동아일보는 창간호를 특별하게 제작했다. ‘東亞日報’ 제호는 서예가 김돈희의 글씨를 사용했다. 동아일보 창간호를 화려하게 장식한 도안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착안한 ‘비천(飛天)’을 상징하는데, 낭만적인 고대의 모습을 재현해서 민족정신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 p.254

고희동의 서양화는 많이 찾아볼 수 없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전에 〈습작〉이란 서양화를 내서 입상한 후 조선미전에는 출품하지 않았다. 1921년에 처음 열린 서화협회전에 서양화를 출품하였으나 1925년에 열린 5회 서화협회전에 〈만장봉의 추(萬丈峰의 秋)〉를 출품한 후로는 서양화를 출품하지 않았다.
--- p.265

1924년 7월 15일, 고희동의 은사이며 제국미술원 원장이던 구로다 세이키가 57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자신에게 서양화의 길을 알려준 은사의 부음을 듣고 고희동은 이제는 서양화를 벗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서양화와 동양화 사이에서 갈등하던 고희동은 1925년을 기점으로 서양화를 벗어버렸다.
--- p.265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전형필은 오세창의 뜻을 받들어 문화재 수집에 나서서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했다. 휘문고보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고희동을 전형필이 알게 된 덕분에, 또 고희동이 오세창을 전형필에 소개한 덕분에 전형필이 막대한 문화재를 수집한 것이다.
--- p.270

8·15해방은 고희동에게 새로운 기회를 여는 순간이었다. 고희동은 단순한 화가가 아니었다. 고희동은 해방정국의 우익 민족진영 인사인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조병옥과 가까웠다. 고희동은 교육자인 장면과도 교류가 있었다. 이처럼 고희동은 그 시절 정계를 움직일 인물과 교류가 많았다. 해방 정국에서 고희동이 민족진영 문화계를 이끌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 p.284

고희동은 당시 우익 성향의 미술계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민족진영 문화예술계 전체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고희동은 해방 정국의 민족진영 인물인 김성수 등과 가까웠을뿐더러 많은 사람을 모으고 이끌 어가는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 p.301

고희동은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국전’이라고 부르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준비로 바쁘게 지냈다. 국전은 1949년 9월 23일 문교부 고시 제1호에 의해 창설되었다. 고시는 국전이 독립 국가가 갖추어야 할 문화예술 제도임을 분명히 하였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대한민국 미술계의 지도자이며 대표이고, 거인인 고희동은 국전 준비 과정을 주도했다.
--- p.354

서울이 수복된 후 고희동은 공산군 점령하에 있었던 비극적인 가정사를 젖혀 놓고 문총 회장으로서 국군과 유엔군을 지지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10월 10일 문총은 국립극장에서 ‘조국 통일 완수 문화인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고희동은 이 대회의 준비위원장이었고, 박종화와 유치진이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이헌구, 김광섭, 오종식, 장발, 이서구, 김동리, 곽종원, 조연현, 김병기, 남관, 계용묵, 박목월, 조지훈, 김송 등이 기획위원 등을 맡았다.
--- p.366

그는 흔히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한 뒤 귀국해 한국화로 전향했고 이후 동서양의 표현법을 절충한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해 갔다.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한 〈부산영도해안〉은 그가 전쟁기 부산의 풍경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 p.372

피난 수도 부산 시절에 있었던 정치파동으로 장면, 조병옥, 김성수가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한 것은 큰 사건이었으나 고희동은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고희동에게는 미술계를 다시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기 위해선 정부의 도움이 필요함을 잘 알았다.
--- p.381

고희동은 예술원 회장도 한번 임기만 하고 회장직을 박종화에게 넘겨주었다. 이처럼 고희동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었는데, 예외는 국전 심사위원장이었다. 고희동은 1949년 제1회 국전부터 1959년 제8회 국전까지 심사위원장을 하였으니 대단한 장기 집권이었다. 고희동은 4·19 후 참의원이 되자 자연스럽게 더 이상 국전심사위원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 p.394

선거를 거쳐 참의원이 되었으나 고희동은 정치인이기에 앞서 미술가이고 문화예술인이었다. 참의원이 된 후 고희동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정치가가 아니다. 나는 미술가이다. 나는 일생을 이 나라 미술발전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미술가의 대변인으로서 정치의 표면에 나섰을 따름이다. 이것으로 미술가로서 나의 여생을 장식하고 싶다.
--- p.419

출판사 리뷰

춘곡 고희동을 말하다
오직 한 분뿐이었던 최후의 예술원 종신회원이고 이 나라 근대 문화의 거성

“고희동의 성과는 오히려 미술계의 대변인으로서, 또 화단의 원로로서의 그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궁내부 관리를 오래 했던 그는 서화협회, 조선미술가협회를 이끌어 가면서 미술 단체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해방 이후 좌우익의 혼란과 갈등 속에서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화단을 지켰으며, 그의 정치적인 활동 역시 이러한 판단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나

“고희동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지금까지 그의 미술사적 평가는 서양화가의 효시에 초점을 두고 주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고희동은 귀국 후 서양화가로서뿐 아니라 미술가 단체의 결성과 동·서양화의 융합, 도화 교사와 삽화가, 미술사 집필 등 신미술운동의 기수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기존 조선화의 병폐를 모방의 인습으로 간주하고 현실성과 사실성에 의거한 사생적 리얼리즘과 독창성 및 자율성과 결부하여 조선인과 근대인으로서 주체적인 ‘창작’으로 갱신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화공으로부터 미술가로의 승격 운동’과 ‘전람회 운동’, ‘미술학교 설립 운동’, ‘새로운 장르 개척’ 등 탈 중세적 창작미술로의 전환과 더불어 근대미술로의 공공화 및 사회화에 앞장섰다.” -홍선화

“고희동은 ‘어느 의미에서는 최후의 이조적 사대부’이다. 80년의 생애를 한결같이 화가로 살아왔고, 죽기 직전까지 지묵을 손에서 떼지 않고 살아온 춘곡은 생활의 자세로 보아 참다운 예술가였다. 고희동은 작품뿐만 아니라 소탈하고 품격 있는 인간으로서도 이 나라 미술사에 의미를 남기었으며, 춘곡에게 있어서 인간은 곧 예술이요, 예술은 곧 인간이었던 것이다.” -이경성

“살아서 고전이 되고 죽어서 역사가 된 선생의 예술적 생애는 그것 자체가 한국미술 60년이었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미술학생으로서 동경미술학교에서 역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15년 귀국 후에는 중앙, 휘문, 보성, 중동교 등에서 미술 교사로서 서양화의 씨를 심었다.” -이경성

“고희동은 스승들로부터 배운 조선시대의 남종화(南宗畵)에 동경미술학교에서 배운 서양화법을 더해 새로운 형식의 산수화를 그린다. 사진 기법이나 원근법 같은 서양화법이 구사된 그의 그림은 채색 등 색채감각에서도 서구식 수채화의 표현과 유사한 독특한 모습을 보인다. 실제 그의 그림에 자주 쓰이는 진한 푸른 색조는 전통 산수화에서는 잘 쓰지 않는 채색 방법으로, 당시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는 매우 다르다. …… 원근이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산수화나 뛰어난 색채감을 보이는 개성적인 화면은 다른 화가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면이다.” -황정수

“선생은 망국의 백성이 되어 우리들 모두 다 한을 품었을 때, 초옥 냉골에서 ‘아사주의(餓死主義)’와 ‘동사주의(凍死主義)’를 고창하셨습니다. 조선 총독이 문화정책이라는 가면을 쓰고 선전(鮮展)을 시작했을 때, 선생은 이 가면에 굴하지 아니하시고 끝끝내 총독부가 추천하는 심사위원을 거부하셨습니다. 홍안장발(紅顔長髮)로 비분강개하시던 그때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귀에 생생합니다. 해방이 되자 화합했던 민족 전체는 사상으로 양분이 되어 몰지학(沒知學)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마수에 걸려서 찬탁운동을 감행했을 때 선생은 분연히 민족미술의 대표자로서 반탁의 선두에 서서 모든 청년들 앞에 굳센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때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어 선생은 과연 한국 문화계에 올바른 일익을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박종화

“춘곡에게 있어 미술이란 한낱 당시의 국정과 개인의 비애에서 벗어나려는 필연적인 몸부림 같은 것이다. 이 몸부림을 통해 그는 현실의 비애를 망각하고 자기를 포기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한 가닥 길을 얻은 것이다. 그러기에 춘곡이 모처럼 한국 최초의 서양화를 연구한 선각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근대적 조형 방법을 우리 국토에 완전히 이식시키는 작업을 못 하였던 것이다. 그에 있어서 미술이란 생명을 바쳐 탐구하고 창조할 대상이 아니고 국가의 멸망에서 받은 그의 상처를 잊어버리고 그에게 생명을 지속시켜주는 하나의 활로였던 것이다.” -이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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