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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9. 20.
아킬레우스는 여자였다. 그는 무장했다. 투구를 쓰고 흉갑을 걸치고 방패를 들고 온몸을 쇠붙이로 감쌌다. 나는 이래도 여자네. 아킬레우스는 즐겁고 으쓱하다. ---p. 10 2026. 8. 31. 철거 지구에 앉아 있었다. 폐기물은 아무리 수거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성장기를 보낸 자는 잔해의 풍경을 눈으로 흡수하고, 그것은 그의 피부에 거친 따옴표로 돋아난다. 따옴표 안에 이곳이 고향이 아닌 자에게 이해시키는 데 실패한 말이 비어 있다. ---p. 11 2026. 8. 24. 사슴이 내 앞으로 지나갔다. 여행과 동물은 동격이다. 사람이 일평생 여행 다닌 나라의 수를 세듯, 그의 생에 우연찮게 들어온 동물을 셈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기가 마주친 동물의 연대표를 작성한다. 그것은 그의 일대기와 아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동물이 늘어선 연대표를 돌려보며 서로의 삶을 경애한다. ---p. 12 2026. 7. 18. 수영 강습에서 E.가 발목을 붙들고 상체 훈련을 시켰다. 전진을 훼방 받을지라도 끈질기게 물살을 헤쳐야 한다. 우리는 저항을 연습한다. ---p. 12 2026. 2. 25. 세상에 우리만 남았어. 우리는 풀벌레의 속날개 같은 말만 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말이라도 잊지 않으려 서로의 날개를 꺼내 껴안는다. ---p. 15 2025. 8. 21. 사람들 앞에서, 나는 인용을 통해 타인의 아름다운 문장을 내 글 안에 들이기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다음, 예시로 내가 쓴 짧은 글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마음을. 마음을. 마음을. 마음을. 마음을. 마음을. 마음을.” 내 글 안에 이렇게 “마음을.”을 여덟 번 반복하는 문장이 인용되어 있었다. ---p. 21 2021. 5. 16. 나는 민물고기였다. 낚시꾼에게 잡혀서 내장이 드러났다. 부레 옆에 크고 매끈한 못난이 진주 같은 기관이 있는데, 그것은 농담 주머니이고, 나 같은 종에서 이따금 발견된다. ---p. 39 2020. 11. 18. 노래는 잘게 부서져 지층에 퇴적된다. 기후 변화를 연구하기 위해 지층과 빙하 깊이 퇴적물의 표본을 구하듯 먼 곳에서 옛날의 노래 자국을 시추하고 싶었다. ---p. 44 2020. 10. 14. 빛나는 것들은 꺼질 때 고유한 냄새가 난다. 별도 그렇다. 세상에서 맡아본 적 없는 낯선 냄새가 나면 먼 별의 죽음을 짐작한다. 사랑은 반대로 태어날 때 젖은 숲속에서 갓 구운 숯 냄새가 난다. ---p. 45 2020. 8. 10. 너는 홍수 이후의 강에서 헤르메스처럼 날아오른다. 이마 띠에는 작은 날개 대신 물고기 모양 은빛 칼을 달고. ---p. 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