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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이야기
1부 문신을 만나다 그건 애들이나 팬 게 아니야 마녀 사냥과 검은 수첩 효과 출구없는 길 신의 아이 검은 수첩의 기운이 문신의 기를 누르면 검은 명부 2부 마음에 빗장을 지르고 잉여현실 흑문도령과 흑수문장 히말라야 골짜기에 사는 할단새처럼 충동에 맞서기 떠나보내기 3부 자유의지로 살기 벌어지는 틈새 마음이 원하는 길 사랑이란 저 숯도 한때는 네가 보낸 거니 생성의 기, 파괴의 기 글쓴이에게서 온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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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첩 같은 걸 다시 내려다보았다. 세상을 다 빨아들일 듯 시커먼 표지가 엄청난 비밀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열쇠 같은 거야. 거기 이름을 올리면 신들의 세상에 갈 수 있어.” ……“거울문자로 써야 돼. 하지만 인간세상의 사람은 이름을 올릴 수 없어.” 바늘이 닿자마자 바람 새버리는 풍선처럼, 부풀었던 가슴이 확 쪼그라들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수첩 표지를 긁적긁적했다. 그런데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흔적이 깊게 남지 않는가. ‘킬킬. 역시 찾아내는 군. 어서 써 봐. 네 이름을.’ 난 망설이지 않고 새까만 표지에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내 이름을 썼다. “너 정말 똑똑한 애구나! 단추처럼 반짝반짝!” “풋, 왜 하필이면 단추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이름이 사라졌다. 수첩 표지가 이름을 먹어 치운 것처럼,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 듯 감쪽같았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야릇한 기분. - 문신을 만나다 중에서 (p22~p27) “할 얘기가 왜 없어, 새끼야!” 꿈을 꾸는 거 같았다. 느닷없이 내 주먹이 나가더니 성찬이가 배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나는 몹시 놀랐다. 내가 정말 이렇게 세단 말야? “너 그따위 비열한 짓 또 하면…….” 이번에는 발이 날아갔다. 마치 줄에 매달린 막대인형이라도 된 거 같았다. 누군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내 팔과 발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성찬이는 걷어차인 옆구리를 팔로 껴안은 채 나가떨어졌다.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줄을 잡고 있는 놈은 내 입까지 조종하는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처음으로 사람을 때렸는데 그 기분은 놀라웠다. 전기가 모이고 거기서 전력이 굽이치듯 다리 끝에서 머리끝까지 찌릿하게 솟구쳐 올라오는 느낌. 마치 다른 낯선 세계에 잠깐 갔다 돌아온 거 같았다. “이건 아니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문신의 목소리는, 내 안에 있는 덩어리의 소곤거림에 묻혀 버렸다. ‘나쁜 녀석 혼내주는 게 이런 거야. 괜찮지? 그렇지?’ - 문신을 만나다 중에서 (p33)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가까운 사이처럼 흉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나눈다기보다 의사가 별다른 대꾸도, 참견도 없이 듣기만 하는 쪽이지만. 나는 별로 중요할 것도 없는-내 판단이다-내 말에 저토록 귀 기울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구나. 네 마음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겠어.” 하는 표정으로 들어주는 사람을. 그런데 횟수가 거듭되면서 나는 뜻밖에 후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진심으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면서, 겉모습 안에 숨어 있던 내 다른 모습들이 밝은 빛 아래 처음 드러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 “그래, 너도 잘 알거야. 바람은 물 위의 배를 앞으로 가게도 하지만 뒤집기도 해. 네가 읽는 책들이 너라는 배를 나아가게 하는 바람이 되게끔 하는 것도 네 몫이야.” ……“사람의 기가 분노나 파괴 쪽으로 쏠릴 때는 엄청난 에너지를 낸단다. 그걸 잘 다스리지 못하면 폭력이 되기도 해. 폭력은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정작 문제 해결에는 도움 안 될 때가 많아.” ……“내 말 알겠지? 분노와 파괴의 감정은 사람한테 에너지를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파멸에 이끌 수도 있다는 거.” - 충동에 맞서기 중에서 (p150~157) “미안해.” “아니, 내가 미안하구나. 끝까지 널 도울 수 없어서. ……너, 괜찮겠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감정을 꾹꾹 밀어 넣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이지. 내가 누구냐.” “그래, 넌 똑똑하니까. 단추처럼 반짝반짝하는 아이잖아.” “그 놈의 단추타령은 여전하구나.” “색깔이 바뀌는 단추. 어떤 색으로 달라지느냐는 너한테 달린 단추.” “…….” 그리곤 긴 침묵. 바람이 떠밀기라도 한 듯 그림자가 희미하게 휘청거렸다. “우리…… 다시 보게 될까?” “아마. 아닐걸. 다시 안 만나는 게 좋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건 그래.’ 헤어지는 절차는 간단할수록 좋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어서 가!” 이를 악물고 돌아보지 않았다. 눈물이 나려 해 하늘을 보았다. 만났다가 흩어지고 만났다간 흩어지는 하얀 구름들이 오색 무지개로 반짝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니 잔디 풀들이 제 색깔로 돌아와 있었다. “가버렸구나, 흑문도령. ……나,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약속할게.” - 떠나보내기 중에서 (p166) “원하던 가수가 되지 못했는데 후회는 없나요?” ……“한때 그랬지만 이젠 아니야. 인생에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 돌아가는 길도 있고. 샛길도 있고. 무엇보다 선생을 하게 된 덕에 너희를 만났잖니. 나도 중학생이었던 어른이거든. 너희한테서는 중학생 시절의 내가 보여서 좋아. 한 가지 더! 내 애인은 음악선생이라는 내 직업을 무지 좋아하거든.” ……“다른 직업을 가졌다고 꿈을 포기한 건 아니야. 내 취미이자 특기이자 전공은 여전히 노래와 작곡이란다. 고1때부터 틈틈이 만든 곡이 30여 곡 돼. 노래도 있고, 기타 연주곡도 있고. 시디에 담아 라미 씨 생일날 선물할 거야. 가수가 되지 못했어도 이런 행복을 누릴 수가 있지.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음악은 사랑이거든.” - 벌어지는 틈새 중에서 (p186~187) “처음엔 흑문도령, 그 담엔 라미씨 애인, 이번엔 저 녀석……. 나더러 완수 형을 돕듯 저 애를 도우라는 건가? 완수 형 친구는 떠나 버렸다던데, 나는 언제나 곁에 남아 있으라고?” ……“안 그래도 네가 날 힐끔거리는 거 알고 있어.” “네 말대로 그동안 널 지켜봤어. 혹시 너한테도 누군가 찾아올지 모른다 싶어서. 아니면 벌써 왔는지도.” “……나한테도 그게 찾아왔고 그때부터 내 안에는 엄청난 힘이 생겨났지. 한동안 그 마력에 취해 휘둘렸고. 그런데 이젠 알았어. 그 마력을 다스리고 이겨낼 수 있는 건 결국 나 자신이라는 거. 내 자유의지라는 거.” “도대체 뭔 소린지……. 그래서?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뭔데?”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도 겪어 봤는데 폭력은…… 때리고 부수고 괴롭히는 걸로는 아무 해결도 되지 않더라는 거지. 그러니까 네 기를…… 분노나 파괴로 치닫는 네 에너지를, 네가 잘 다스렸으면 해서…….”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랑 너는 친구가 될 거 같아! 아주 친한 친구!” - 생성의 기 파괴의 기 중에서 (p234~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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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라는 잣대로만 학생들을 평가하는 획일적인 교육 환경
폭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 땅의 청소년들 흔히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른다. 질주하는 바람처럼 요동하는 시기, 확고한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갖지 못한 채 흔들리는 시기가 바로 10대 청소년기이다. 『어느 날, 신이 내게 왔다』의 주인공은 열다섯 살의 남자 중학생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그저 ‘나’로만 명명될 뿐 특별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뚜렷한 가치관 없이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이 책의 독자들은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신 또는 친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다니고 있는 학교는 그저 아이들을 ‘공부’라는 잣대로만 구분하고 있다.―현실에서의 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다―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모범생’으로, 공부를 못하거나 공부에 관심 없는 아이들은 ‘문제아’, ‘꼴통’으로. 이러한 환경에서 아이들이 진정한 ‘나’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며, 소설 주인공처럼 자신의 존재를 ‘폭력’으로 드러내는 아이들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앞으로 내 삶의 길은 또 어떻게 펼쳐질까? 흑문도령, 완수 형, 라미 씨 애인과 함께 하는 문제아 ‘싸움짱’의 정체성 찾기 여행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으로 큰 싸움에 휘말려 병원에서 입원하게 된 나는 그곳에서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외상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도 차츰 치유하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이 변화하는 모습을 ‘만남’이라는 중요한 키워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검은 수첩’을 따라온 덩어리와 흑문도령은 폭력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병원에서 만난 담당 의사는 대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또 자신과 같은 경험을 했다는 완수 형을 통해 폭력성을 주체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악영향도 간접 경험하게 된다. 병원을 퇴원한 후, 아빠와 이혼하고 홀로서기를 시작한 엄마에게서 ‘자유의지’로 살아가는 기쁨을 배우게 되고, 새로 온 음악 선생님(라미 씨 애인)과의 만남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주인공이 폭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완수 형과 닮은 전학생을 만나고 나서이다. 그에게서 자신의 옛 모습을 보게 된 주인공은 그를 그저 방치하지 않고 그에게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민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었던, 친구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조차 알지 못했던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친구를 찾아나서는 모습과 그에게 손 내미는 모습은 주인공의 변화된 모습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가는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문제아’라고 낙인찍힌 청소년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정체성을 찾아주고,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억압과 통제가 아닌 ‘관심’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재미와 감동, 교훈이 적절히 어우러진 한국형 판타지 소설 학원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한 중학생의 편지를 읽고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작가 백승남은 고등학생, 중학생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다. 작가는 만화,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등 재미 위주의 볼거리에 익숙해져 있는 10대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기에 그들이 이 소설을 좀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판타지’라는 그릇에 담았다. 이 책에 나오는 신들은 게임이나 기존의 책에서 나오는 서양 세계의 신이 아니다. 작가는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모습으로 포장되어온 서양의 신 대신 한국 토속의 신들을 등장시켰다. 서양 신들에 비해 역동적인 면은 떨어지지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우리 고유의 신들의 모습은 청소년들에게 재미는 물론 색다른 호기심과 신비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