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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체제 인사의 리더에서 성인이 되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공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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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장 동서남북을 떠도는 사람
: : 공자, 그는 우리에게 누구이며 무엇인가
: : 공자, 성인의 후예인가 무녀의 아들인가
: : 첫 번째 망명, 양호와 대립하다
: : 두 번째 망명, 동쪽의 주나라를 만들겠다
: : 14년 동안 헤맨 정처 없는 망명길
: : 평생을 함께한 꿈과 그림자

2장 유교의 원류
: : 옛것을 조술하다
: : 군자의 유와 소인의 유
: : 성직자와 제사자 그리고 지식인
: : 하늘이 바뀌다
: : 주공으로 회귀하다
: : 유교의 성립

3장 공자의 자리
: : 체제 밖의 인간
: : 불평분자의 무리
: : 공자, 노예해방의 지도자인가
: : 공자의 제자들
: : 도가 행해지지 않는구나

4장 유교의 비판자
: : 묵가, 동일한 차원의 경쟁자
: : 상동과 겸애의 결사 집단
: : 묵자와 맹자의 시대
: : 공자야말로 큰 도둑이다
: : 공자는 노자에게 예를 물었는가
: : 직하의 학문을 통해 교류하다

5장 논어에 담긴 뜻
: : 문장의 형식은 내용을 반영한다
: : 공자 이후 유가의 여덟 유파
: : 다양한 제자들의 모습
: : 『논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 : 위대하구나! 공자는

옮긴이 주
지은이 후기
옮긴이 후기

저자 소개 2

시라카와 시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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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zuka Shirakawa,しらかわ しずか,白川 靜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1910~2006)는 일본 후쿠이(福井)현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소학교 졸업 이후 오사카(大阪)의 의원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상업학교 야간부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에 의원이 소장한 『국역한문대성』(國譯漢文大成) 등의 한적(漢籍)을 접하고 당시(唐詩)를 암송하는 등 독학했다. 상업학교에서 장기 결석으로 제적된 이후, 1928년 오사카 게이한(京阪) 상업학교 야간부에 편입해 1930년에 졸업했다. 1933년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 전문부 국한학과(國漢學科)에 입학했으며, 이 무렵 고대 문자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대학 재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1910~2006)는 일본 후쿠이(福井)현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나 소학교 졸업 이후 오사카(大阪)의 의원 법률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상업학교 야간부에서 공부했다. 이 시기에 의원이 소장한 『국역한문대성』(國譯漢文大成) 등의 한적(漢籍)을 접하고 당시(唐詩)를 암송하는 등 독학했다. 상업학교에서 장기 결석으로 제적된 이후, 1928년 오사카 게이한(京阪) 상업학교 야간부에 편입해 1930년에 졸업했다. 1933년 리쓰메이칸(立命館) 대학 전문부 국한학과(國漢學科)에 입학했으며, 이 무렵 고대 문자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5년에 리쓰메이칸 중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이 무렵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와 궈모뤄(郭沫若)의 『복사통찬』(卜辭通纂), 『양주금문사대계고석』(兩周金文辭大系考釋)의 색인을 만들면서 읽기 시작했다. 1941년 리쓰메이칸 대학 법문학부 한문학과에 입학했으며, 이 무렵부터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등의 고증 문헌을 섭렵했다. 1943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같은 대학 예과 교수가 되었으며, 1944년에는 전문부 교수로, 1948년에는 문학부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해에 논문 「복사(卜辭)의 본질」 등을 발표했으며, 1954년에 같은 대학 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이 당시 타이완의 둥쭤빈(董作賓), 중국의 후허우쉬안(胡厚宣) 등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55년 민간 동호회 ‘박사’(樸社)에서 월 1회 서주금문(西周金文) 독회를 시작했으며, 『갑골금문학논총』(甲骨金文學論叢)이 유인물로 나왔다. 1960년에는 『고본시경연구』(稿本詩經硏究)가 유인물로 출판되었다. 1962년 『흥(興)의 연구』를 박사 논문으로 교토 대학에 제출해 학위를 취득했으며, 「금문통석」(金文通釋)을 『백학미술관관지』(白鶴美術館館志)에 발표하기 시작해 1984년 56집으로 완간했다. 1969년 『설문신의』(說文新義)를 박사(樸社)에서 계간으로 간행하기 시작해 1974년 전 16권으로 완간했다. 1970년에 『한자』(漢字, 岩波新書)와 『시경』(中公新書)을, 1971년에는 『금문(金文)의 세계: 은주(殷周)사회사』(平凡社)를 출간했다. 1972년 타이완의 고궁박물원을 견학한 바 있으며, 이해에 『공자전』(孔子傳)과 『갑골문(甲骨文)의 세계』가 출간되었다.

이 외에 저서로 『중국의 신화』(1975), 『중국의 고대문학』(1976), 『한자백화』(1978), 『초기 만엽론』(初期萬葉論, 1979), 『중국 고대의 문화』(1979), 『중국 고대의 민속』(1980), 『후기 만엽론』(後期萬葉論, 1995), 『시경아송』(詩經雅頌, 1998), 『상용자해』(常用字解, 2003)를 비롯해 유명한 한자 3부작인 『자통』(字統, 1984), 『자훈』(字訓, 1987), 『자통』(字通, 2003) 등을 출간했다. 1976년 교수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연구 활동을 계속했으며,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강연 ‘문자강화’(文字講話)를 펼치기도 했다. 90세가 되던 2000년 『시라카와 시즈카 전집』(白川靜全集, 전 12권)이 출간되었으며, 2002년부터 5년간 다섯 권으로 『시라카와 시즈카 문자강화(文字講話)』를 펴내기도 했다. 2004년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고, 2005년에는 모교 리쓰메이칸 대학에 ‘시리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白川靜記念東洋文字文化硏究所)가 설립되었다. 2006년 10월 30일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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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및 역사번역가. 고려대 국문학과와 사이버한국외대 베트남·인도네시아 학부 및 중국어 학부 졸업. 경상국립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옮긴 책으로 『도교사상』, 『한 무제』, 『세계사 속의 중국 문화대혁명』, 『중국 5대 소설 삼국지연의·서유기 편』, 『동남아시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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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정영실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간사이 대학에서 문화교섭학으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조선통신사와 일본 지식인의 상호 인식 연구], [조선 후기 지식인이 본 아메노모리 호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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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4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610g | 140*205*30mm
ISBN13
9791195572571

책 속으로

공자는 특히 비천한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일도 분명치 않아, 나는 그가 무녀巫女의 사생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만년에는 당연히 한 시대의 사표師表로서 존경을 받았겠지만 망명 중의 어떤 시기에는 “선생을 죽이려던 자에게 죄를 주지 않았고, 선생을 욕보인 자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장자』 「양왕讓王」)고 할 만큼 받아줄 이 없는 망명자, 요컨대 외부에서 온 도적인 외도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사기』는 공자의 전기를 제후의 전기를 다루는 세가世家 안에 넣었지만, 이것은 사실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아마도 공자의 뜻을 관철하는 방법도 아닐 것이다. --- p.16~17

공자가 제나라로 망명한 것은 아마도 양호가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을 일삼았을 때(기원전 505)의 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노나라의 정치 상황을 일단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노나라 임금의 권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역대에 걸쳐 어리석은 임금이 많았고, 환공桓公(기원전 711~694)에게서 비롯된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의 삼환三桓씨가 오래도록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국토와 병마兵馬의 대부분은 그들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가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하극상의 풍조가 뚜렷해지면서 정국은 끊임없이 위기에 휩싸였다. --- p.36

이리하여 14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공자는 벌써 쉰여섯 살, 자로는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마흔일곱 살, 안연 이하로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청년들이었다. 망명생활은 그들 사이에 깊은 운명 공동체 의식을 심어놓았고, 그와 동시에 운명 문제, 천天의 문제, 인간성 문제, 현실 정치 문제 등에 대해서 사색을 심화한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도들을 데리고 방황을 계속한 나사렛 예수의 모습과 닮았다.
그러나 방황의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유감이다. 어째서 우리 동양인은 이 중요한 시기에 대해서조차 과묵했던 것일까.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 빈약한 자료에서부터라도 이들의 모습을 추적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 p.55~56

공자의 죽음은 평온하고 평범했다. 『예기』 「단궁상」 편에 공자가 죽기 7일 전 아침 일찍이 “태산이 무너지려 하는구나. 대들보가 쓰러지려 하는구나. 철인이 시들어가는구나”라고 노래부르며 죽음을 예언했다는 것은 물론 꾸며낸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나 그리스도에게 죽음이란 곧 사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공자에게는 죽음에 관한 기록이 없다. 물론 『춘추』의 경문經文에는 애공哀公 “16년 여름 4월 기축己丑일에 공구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애공에게서 죽은 사람을 조문해 제사 지내는 애도사인 뇌?가 하사되었다. --- p.71

과연 전통의 수립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통이 과거의 계승인 이상, 거기에는 전통이 발생하는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민족으로서 하나의 정신적 양식을 이루는, 기원적인 선행 형태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교의 기원을 논하는 경우, 흔히 『시』와 『서』1) 등의 고전 학문이 거론된다. 그러한 고전은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전통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민족의 정신적 양식으로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생활방식에 작용하면서 이를 통해 정신적 정형定型이라고 해야 할 어떤 것을 형성?발전시켜가는 것이 전통이라면, 그것은 지극히 다원적이고 포섭적이면서도 더욱이 체계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전통이다. 그리고 그것을 처음으로 이룩해낸 이가 공자였다. --- p.86

공자가 망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도 양호의 경우와 비슷한 데가 있다. 계씨의 재宰였던 공산불요가 계씨의 사읍인 비 땅을 근거지로 모반을 꾀했을 때, 공자는 그의 초빙에 응하려 했지만 자로의 반대에 부딪쳤다. 아마도 반란은 실행되지 않았던 것 같으나 공자가 이에 가담하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공산불요는 한때 양호에게 협력했던 인물이다. 후에 자로가 계씨의 재宰가 되자 공자는 삼가의 사읍을 무장해제시키려는 대담한 정책을 자로에게 강행케 한다. 그런데 그 계책이 마지막 단계에서 실패로 돌아가고 그로 말미암아 계씨와 불화가 생기자, 공자는 기나긴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공자도 무사巫史의 학문에서 출발하여 인仁을 설파했다. 그의 학문의 연원과 행동거지는 양호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양호가 공자에게 협력을 구했던 것도 공자가 자기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도 반체제 인사였던 것이다. --- p.156~157

공자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인仁인데,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안연」) 것이고, “백성에게 은덕을 널리 베풀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옹야」) 일이다.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목숨을 바쳐서 인을 이루는’(「위령공」)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人이란 인민 대중이다. 인도仁道란 대중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p.179

공자 교단의 성격은 그와 같은 출발로 미루어보면 당연히 반체제적이었다. 공자가 지도하는 교단은 처음에 현실의 장에서 정치를 다투었다. 그러나 현실의 장에서 다툰다는 것은 대립자와 동일한 차원에 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망명은 교단이 새롭게 태어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공자의 위대한 인격, 그의 사색과 실천에 따라 생사를 넘나들며 얻어진 것이지만, 사정을 아는 이는 안회 등 두세 명의 고제들에 지나지 않았다. 천명?덕?인 등과 같은 유교의 근본 사상은 그러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획득된다. 이것을 체험적으로 파악하기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하다 하겠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학이」) 세계인 것이다. 거기서 권회의 도가 생겨난다. --- p.217

송견은 송나라 사람이다. 도연명陶淵明이 편찬했다는 『집성현군보록集聖賢群補錄』에 따르면, 3묵三墨의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 학설은 묵자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맹자』에는 송경宋?이라는 사람으로 등장하고 맹자보다 선배였다. 제자의 학문은 직하에서 일어났지만, 묵자?송견과 노장의 학문은 모두 송나라 땅에서 생겨났다. 멸망한 은나라 후예인 송나라가 제자諸子의 발상지가 되었다는 사실이 깊은 흥미를 자아내게 하는데, 공자 역시 죽음에 임해 “나는 은나라 사람이다”(『예기』 「단궁상」)라며 은례殷禮에 의거해서 장사 지내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사상은 본래 패배에서 태어나는 것 같다. --- p.289

공자의 생애는 제자들과의 강한 연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공자가 아마도 미천한 무축의 신분에서 입신하여 박식한 사유師儒로 명성을 얻었을 무렵 그 문하에 (반항적으로) 마음대로 행동하며 무협의 기상을 지닌 한 남자가 입문했다. 공자보다 아홉 살 연하의 자로였다. 자로는 본래 무뢰배였다. 수탉 깃털로 만든 관을 머리에 쓰고 돼지가죽으로 장식한 칼을 차고 공자를 모욕하려 했다는 사실이 『사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과 『장자』 「도척」 편에 보인다. 그러나 공자에게 이내 설복당해 그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자로가 공자 문하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공문의 교단으로서의 성격과, 나아가서는 공자 전 생애의 운명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비할 바 없는 무용과 솔직함, 그리고 성실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가 훗날 계씨季氏를 섬기는 가신이 됨으로써 공문도 계씨季氏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공자가 비난하고 배격하려 했던 참주와 결합한 것은 공자에게 커다란 모순을 초래하고 생애를 요동치게 한다. --- p.324

『논어』라는 명칭은 『예기』 「방기坊記」 편에 처음 나타난다. 「방기」는 『자사자子思子』 23편 가운데 한 편으로 되어 있는데, 『주역』 따위도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한秦漢시대 이후의 문헌으로 보인다. 또한 『예기』 「증자문曾子問」 편은 증자와 공자 사이의 문답 형식을 취하는데, 이 두 편에 모두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다”는 문장이 있어 양자의 관계와 성립 시기를 알 수 있게 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진한의 천하통일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또한 「증자문」 편에는 공자가 노담에게 예를 물었다는 문례 설화가 네 군데나 보이는데, 유가의 문헌 중에 처음으로 공자문례 설화를 수록한 것이다. --- p.357

사실 유가만큼 국가체제, 또는 정치지배에 적합한 사상체계를 지닌 경우도 없을 것이다. 유가가 경전인 『시』·『서』를 교과목으로 삼는 한편, 국가나 정치에 관한 학문으로서 고전적 근거를 독점했던 것이 그러한 사실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시』·『서』·『역』·『예』·『춘추』로 불리는 오경五經의 성립 과정에 공자는 실제로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시』와 『서』의 일부분은 공자 당시에 이미 존재했지만 그것은 사관과 악사樂師가 전승한 것이었다. 『춘추』는 노나라의 공식 기록이었으며, 『예』와 『악』은 공자시대 이후의 산물이다. 그러나 한대 초기 이들 서적이 유가의 경전이 되면서 선왕의 예악과 성인의 도를 전하는 유일한 고전이 되었다. 그리고 공자에게는 이들 경서의 편집자 또는 작자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공자의 권위는 그가 지닌 인격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경서의 제정자로서 이들 경서의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경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나라 독서인의 교양서이며 관료의 필독서였고, 관료제 전체를 지탱하는 지주였다.

--- p.373~374

출판사 리뷰

지금 우리 시대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진보했다고 할 수 있는가!

지금 왜 다시 공자인가? 그리고 유교 사상은 왜 재평가되고 있는가? 지금 우리 시대는 과연 공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중국은 공자를 다시 받아들이고 있으며 중국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공자와 유교 사상이 경제적 발전의 원동력과 사회 통합의 유효한 이념으로 재평가되면서, 미래의 중국을 지탱해줄 새로운 이념으로까지 제창·옹호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 다시 공자와 유교 사상이 재평가되는 이유, 그리고 공자의 사상이 오늘날 시사하는 바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2년 11월에 출간된 ≪공자전≫ 초판본의 후기에서 시라카와 시즈카는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1960년대 말,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진행되고 일본 사회는 격렬한 학원 분쟁의 와중에 놓여 있던 천하 대란의 시기에, 새삼 공자의 사상과 행적에 공감하는 바가 있어서였다.”고 밝혔다. 옮긴이 역시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가 1980년대 초 우리 사회가 정치·사회적 격랑 속에서 한껏 요동치던 시절로 매우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출간을 앞둔 지금 2016년의 이 시점에서도 역시 그 공감의 맥락은 겹친다.

근현대사에 있어 공자와 논어, 그리고 유교에 대한 평가는 중국의 역사적 쇠퇴나 몰락과 비례하여 대체로 비판 또는 부정의 방향으로 향한다. 그러나 공자와 유교에 대한 그러한 부정적?공격적 평가의 흐름은 1978년 이래의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 경제가 발전하고 국제적 지위가 부상함에 따라 커다란 전환기를 맞는다. 경제적 발전의 원동력과 사회 통합의 유효한 이념으로써 공자와 유교 사상이 재평가된 것이다. 유교는 이렇듯 역사의 격랑 속에서 다시금 르네상스기를 맞고 있다.

이와 관련해 책의 후기에서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을 살펴볼 수 있다. “공자가 살던 시대와 지금 시대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인간은 과연 어느 정도나 진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히 나쁜 지혜는 진보하고, 살육과 파괴는 교묘하고도 대규모가 되었다. 그러나 로고스의 세계는 사라져 가기만 할 뿐이지 않은가. ≪공자전孔子傳≫은 그러한 현대의 불안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써보려고 했던 것이지만, 원래부터 그것은 아마도 나의 의식 속에서 하나의 희망에 지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분열과 갈등의 대란 속에 있다. 세계적으로는 종교전쟁과 영토분쟁이 빈번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분열과 갈등의 골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진 상황이다. 오랜 리더십의 부재, 양극화 현상, 국민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에 급급한 저급하기만 한 정치 수준, 고질적인 지역이기주의, 청년 실업사태와 경제침체 등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계몽주의를 탄생하게 한 유교의 이념과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집약되는 사람 쓰는 법,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통한 공자의 경험과 지혜는 그저 고답적이고 보수적인 전통에 갇혀 있을 일이 아니다. 공자의 사상은 지금 우리가 처한 막다른 상황에서 이 시대를 건너갈 새로운 길로 우리를 안내해줄 것이다.

서양에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공자가 있다!

공자와 유교 사상이 2,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현실을 움직이는 현재적 사상으로 살아 작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그러나 아직도 공자라면 충군애국을 강조하는 케케묵은 봉건사상의 창시자 정도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서양 문명에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미친 영향이나 역할을 아울러 지닌 이가 다름 아닌 동아시아의 공자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서양을 비롯한 세계의 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하고 있는 당연한 상식이다.”

동아시아 문명 속에서 공자가 차지했던 자리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우리가 보통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하다. 논쟁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무엇보다도 우선 공자의 출생과 관련한 사실을 놓고 벌어진다. 예수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마호메트가 고아 출신이었던 것처럼, 공자의 삶 역시 출생부터 남달랐다.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의 책이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이런 쟁점들과 관련하여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공자상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도 그가 무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다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논쟁에 새로운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기존 책들과는 사뭇 다른 관점에서 다뤄진 내용들이 이 책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예순까지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힘을 쏟기로 자신과 약속을 했고, 그 후로는 저술 활동에 전념한 고집 세고 지조 있는 학자다. 노년에 글쓰기를 시작한 이 노학자의 연구 분야는 중국 고대 세계의 문자와 문헌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제로 일본은 물론 한·중·일을 통틀어 시라카와 시즈카만큼 한자학에 정통한 권위를 가진 학자는 없다고 한다. 고대 문자와 당시 사회문화에 대한 방대하고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쌓아올린 그의 학문 세계는 단연 독보적이다. 전체적으로 중국 고대사회에 관한 문자학과 문헌학과 문화인류학의 지식이 총동원되어 재미있으면서도 지나치게 학술적인 형식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적인 인문교양서의 성격을 가미해 어렵지 않게 핵심을 전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은 단연코 압도적이다.

이 책은 ≪공자전≫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으나 실상 공자라는 인물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공자를 중심으로 해서 중국 고대 문화의 전통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러한 전통의 형성이 전국시대 말기까지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려는 데에 가장 큰 역점을 둔다. 그리고 학문의 영역에서 다양한 학설이 쓰이고 논의되어야 함이 마땅하기에, 공자의 사상과 관련된 수많은 저술에 덧붙여 이 책이 읽혀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현실적으로 공자는 언제나 패배자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패배자가 됨으로써 공자는 이데아에 접근할 수 있었다!

1장 동서남북을 떠도는 사람

공자는 정말 무녀의 아들인가? 공자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에서부터 긴 망명생활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추정인가! 공자는 태어나서부터 생의 대부분을 좌절과 유랑 속에서 살았다. 그는 이상주의자였으며, 신비주의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여기서는 공자 평생의 이상이었던 주나라의 주공과 더불어 어두운 경쟁자이자 여러 재난의 원인이었던 양호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2장 유교의 원류
공자는 유교를 조직했으며, 그 후로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의 사상적 전통을 형성해왔다. 유교의 원류 유儒, 인仁, 예禮라는 문자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리고 고대 농경사회에서 큰 역할을 했던 성직자이자 제사자이며 지식인이었던 무巫, 축祝, 사史는 어떤 존재인가! 고대 문자의 새로운 의미와 고대 문화의 주술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3장 공자의 자리
사상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변혁을 꾀하는 곳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기존의 체제에 반할 수밖에 없고 공자 역시 이런 측면에서 반체제 인사였다. 여기서는 체제 밖의 인간 공자를 다룬다. 그리고 씨족 사회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공상工商 계급과 도盜의 무리가 어떻게 시대적 전환점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었는지 살펴보고, 춘추시대의 급변하는 사회상과 더불어 가상설, 곽말약의 노예제 해방설과 같은 이론들을 고증한다.

4장 유교의 비판자
유가와 경쟁했던 다른 학파들의 발전 과정을 이야기한다. 유가의 비판자로 생겨난 묵가, 그러한 묵가墨家의 대립자로 일어난 양주楊朱, 또한 양묵楊墨의 비판자로 등장한 맹자, 맹자를 유가의 정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순자 등, 제자백가로 불리는 전국시대의 다채로운 사상가들의 활동은 이 같은 비판과 재비판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5장 논어에 담긴 뜻
현실적으로 공자는 언제나 패배자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패배자가 됨으로써 공자는 이데아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사회적인 성공은 일반적으로 가능성을 한정하고 때로는 거부하는 것이다. 사상이 본래 패배자의 것이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를 포함한다. 여기엔 ≪논어≫ 편찬의 실제를 추적한 내용, 공자가 죽고 난 뒤의 제자들과 교단의 향방에 대해서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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