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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철학, 사랑을 말하다 _ 사랑의 현상에 대한 철학적 관찰
1장. 철학의 유혹자 플라톤Platon 오비디우스Ovid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2장. 기독교 철학에 비춰진 사랑의 양상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von Aquin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라디슬라우스 보로스Ladislaus Boros 3장. 칸트에서 쇼펜하우어에 이르기까지의 사랑의 철학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4장. 20세기 사랑에 대한 철학적 이론 버틀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막스 쉘러Max Scheler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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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떻게 사랑을 이야기 했는가?
♥ 철학자들도 사랑을 했을까?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생의 관점, 올바른 삶의 태도, 존재의 의미,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 신의 존재 여부 등에 관해 고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기존에 발간된 대부분의 철학서 역시 그러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독자들은 철학자들은 사랑과 거리가 멀고, 평생 사랑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말 그랬을까? 근엄한 이미지로 비쳐지는 키에르케고르와 칸트가 이성을 그리워했을까? 평생을 독신으로 산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에 대해 할 말이 있을까?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늘 비관적으로 보고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을 늘 비웃기만 했는데 과연 그는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책은 이러한 의문과 질문에 답하는 책이다. 근엄, 위엄, 고독, 분석, 난해의 이미지를 벗고 우리들과 똑같이 그들도 사랑에 대해 번민을 했으며 그 어떤 시인과 작가, 음악가 못지않게 사랑에 대해 많은 교훈과 잠언을 했음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고차원적이고 품격 높은 사랑의 길고 긴 여정을 떠날 수 있다. ♥ 철학은 사랑을 어떻게 보았는가? 철학하는 인간은 올바른 것에 대해 꿈꾸며 유토피아를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인간 역사를 지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통해서 이성을 발견하려고 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많은 연구가에게 있어서 정신의 흔적을 판독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시대의 철학에서는 ‘덕성’이라는 개념의 발생 기원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중세시대의 철학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논쟁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을 말하며, 독일철학 관념론에서는 복잡다단하게 보이는 개념 전환을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철학은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가? 스토아 철학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또 다른 고찰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훌륭한 철학자의 저서를 주의 깊게 연구하는 사람은 놀랍게도 수많은 사상가들이 사랑의 현상을 사상적으로 풍부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니체는 사랑을 “인도적인 기만, 끊임없는 속임수, 현혹”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로 이야기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이 살고 활동하고 느끼는 것을 기뻐해 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모든 열정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이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사랑을 신적인 열정으로 생각했다. 사랑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열정이며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무의식적인 열정이다. 사랑은 시인이 천국으로 비상할 때 동반자가 되며 인간에게 순수한 성적 욕구를 갖게 한다. 진실한 삶이 삶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라고 한다면 사랑은 삶의 풍부함과 광채, 화려함을 표현해 준다.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신적인 것이다. ♥ 사랑을 찾아 떠나는 철학 여행 플라톤 플라톤의 철학에는 다양한 장점들이 있다. 탁월한 문학성, 현명한 인간 인식, 대화 기술, 진실하고 끊임없는 선과의 투쟁, 신중함과 유희적인 평이함 등이 그것이다. 플라톤의 저서를 읽은 사람은 그의 철학적인 심오함과 언어적 힘으로 인해 그를 항상 높이 평가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플라톤을 읽었더라면 그들은 서로 서로 속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쿠겔멘쉬’(Kugelmensch, 공인간.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쿠겔멘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과거 세 가지 성의 인간이 있었다. 즉 남성, 여성, 남성-여성인 쿠겔멘쉬가 있었다. 쿠겔멘쉬는 손과 발이 각각 네 개이며 머리 하나에 두 얼굴이 있는 사람으로 매우 강하고 빨라서 신들이 위협을 느껴 신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둘로 나누어 놓았다고 한다)로 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에 의해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더라면 활력을 얻어 하늘을 정복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이제 잘 이해하고 서로 다른 자신들을 인정하며 전혀 예기치 않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서로를 마음속 깊이 사랑했다. 그들은 각각 서로를 “더 나은 반쪽”이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의 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흙덩이처럼 나뉘어져 하나에서 둘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각자의 다른 반쪽 부분을 찾는 것이다.” 또한 플라톤의 신화에는 낙천주의가 나타나 있다. 물론 여성과 남성이 하나였다가 서로 나뉘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여기에서 표현된 자유사상은 사랑은 사회적 반대를 극복할 수 있으며, 외형적인 면을 무시하고 중요한 내용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수많은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 이러한 찬가는 모두 아름답고 중요하게 들린다. 에로스는 숨겨져 있고 비밀스러운 힘처럼 보인다. 플라톤은 성의 영역에 새로이 관심을 보이고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인간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산적이며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본성에 따라 출산하려고 한다. 우리들의 본성은 추한 사람이 아닌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출산하려고 한다. 남자와 여자의 공동체가 출산이다.” 추한 것은 부적당한 것으로, 아름다운 것은 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출산도 신성한 것으로 규정된다. 출산의 의도가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이 존재하며 이러한 사랑이 아름답고 의미 있다는 것을 플라톤은 감추었다. 생식과 출산과 같은 이러한 행동은 인간에게 불멸의 것이다. 오비디우스 기원전의 로마 시인인 오비디우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철학자는 아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선율인 서정적인 방식으로 인간적 실존에 중요한 기본 문제들, 즉 사랑과 고통, 죽음에 대해 서술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철학적 영역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오비디우스는 오늘날까지도 사랑의 이론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제목은 ‘ars amatiria’로 ‘사랑의 기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랑을 하나의 기교로서 이해한다면 자신의 삶을 결코 기교적으로 살지 않거나, 마음 속 깊이 사랑에 황홀하게 빠져 있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놀라 사랑의 기교를 저속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는 고대 로마제국 귀족들 사이에서 만연했던 방탕한 관능적 쾌락을 비난했지만 <사랑의 기교>에서 금욕적인 자기 규율을 통해 자제하지 않고 인간의 솔직하고 조화를 이룬 성관계, 즉 성욕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교>는 난해한 인류학적 견해로 세상을 놀라게 했고 돈 주앙주의의 입문서로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현상에 대한 객관적 논증으로 입증되고 있다. 먼저 오비디우스는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인 그는 자신을 모든 실망과 환상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에 대해 믿고 있는 정직한 고백자라는 인상을 준다. 사랑받고 싶은 사람은 매력이 있어야 한다. 즉 사랑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그는 쓰고 있다. 재산, 신사적인 행동과 과대한 즐거움, 좋은 경험들과 오랫동안 지속되는 정사 등이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사랑이 정말로 이러한 것들에 달려 있는가? 사랑스러움은 솔직하고 부드러운 몸짓이나 행동에서 나타나며, 사랑스러움은 온순함이며 순종이고 연민이다.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기교>로 문명화되고 세련된 생각을 한다. 그의 책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밤에는 무력으로 성행위를 하려고 하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강간도 윤리적 이유, 미학적인 이유로 거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각자의 파트너들이 서로의 소원과 품위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두 사람만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무력을 오비디우스는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그의 저서에서 그가 여성의 자율과 권리를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비디우스는 가능한 감성적이지 않으려고 하며 사랑이 단순한 본능이라는 것에 반대하며 즐겁게 배울 수 있는 숙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에게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신의 존재의 자연성에서 벗어나 합당한 수준의 사랑과 에로스를 키워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철학적 성찰의 핵심은 일상생활의 윤리가 되는 구체적인 조언뿐만 아니라 사랑의 기교를 배워서 이루어지는 인격 형성에도 있다. 그는 지식이 풍부한 인류학자로서,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자로서 글을 썼고 도덕을 설교하지 않고도 현명한 조언을 했으며, 철저하게 뚜렷한 원칙의 도덕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상가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 키에르케고르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기술적이며 환상적인 유혹의 이론가이고 호색가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이 사상가보다 사랑이 실현되고 열정적인 섹스를 더 두려워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읽은 그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놀랍게도 유혹에 대한 입문서로 사용되고 있다. 스스로 사랑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기만하는 상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한 철학자에 의해 쓰인 이 작품이 그렇게 예리할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최소한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사랑에 빠졌었다. 그가 사랑한 젊은 여성의 이름은 레기나였고 몹시 예민한 사상가에게 그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고 솔직하며 진실했다. 아마도 그는 그녀에 비해 너무 늙었을 수도 있었고 명상적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는 사랑스러운 레기나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차지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존재로 그녀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그가 그녀와 함께 했었다면 그의 인생은 아주 다르게 펼쳐졌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호색가였고 스스로 결혼에는 부적합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또한 그에게는 여성과 애정관계를 가질 능력이 없었다. 그에 대해 그는 철학적으로 해명했다. 미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참된 향유’는 실제로 향유하는 것이 아닌 상상 속에서 향유하는 것이고 순간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현실에는 희망과 기대에 찬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사상 속에서 최고의 정욕이 상상력을 사용하여 다양하게 성취되고,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고 아무도 큰 실망을 경험하지 않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유혹자는 현실에서 자극을 얻으며 여성이라는 존재는 마음을 움직이고 철학자를 글 쓰게 하는 관찰의 근원이며 숙고를 위한 끝없는 질료를 제공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관능적인 사랑’과 ‘영혼의 사랑’을 구분했다. 관능적인 사랑은 개념에 따라 절대적으로 진실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으로 지조가 없는 것이다. 관능적인 사랑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이다. 관능적인 사랑은 순간적인 것이며 개념상 순간들의 총체도 순간이다. 관능적인 사랑이 진실하지 않고 지조가 없다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관능적인 사랑은 항상 반복뿐인 것이다. 영혼의 사랑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혼의 사랑에는 두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지,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지, 그리고 사랑받을 수 있을지 부분적으로 이러한 의심하는 마음과 불안함이 내재하고 있다. 관능적인 사랑은 이러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걱정이 없고 갈등이 없어 보이는 관능적 사랑에는 내적 모순, 즉 특별한 인간의 복잡성이 없고,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특정한 파트너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 오히려 매혹적으로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 후기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신앙고백>에서 보면 그는 수사학의 전문가였고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발전시켰고 다채로운 자신의 길을 서술했고 나중에는 기독교를 신봉했다. 그의 원칙은 이렇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행하라.” 우리가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잘못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에 있어서도 실수를 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인간을 충만시킨다. 인간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며 사랑과 함께 자라난다. 사랑으로 인간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사랑은 인간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고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인간과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을 위해 솔직히 대하며, 다른 사람의 운명에 참여하게 하고 그들의 감정과 위기, 그리고 걱정과 희망에 민감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랑을 보고 느낄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 즉 삶의 종류와 태도, 언어와 외형적 모습을 통해 한 사람으로서 매력적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윤리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에 의해 충만한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깊은 진심이 바로 그것이다.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전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무관심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안녕과 고통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특히 존중할 줄 알고 진가를 평가할 줄 안다. 비웃는 사람, 성을 잘 내는 사람,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는 빈정대고 비웃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고독을 느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품고 있는 진지함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 그는 어떠한 일에도 책임을 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 그가 살고 있는 사회,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식물과 동물을 배려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추진력은 사람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확실함이다. 이러한 진실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중심적 존재를 극복하고, 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게 다음과 같은 짧은 엄명을 지시한다. 사랑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침묵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하라, 말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라, 비난한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비난하고 네가 용서를 빈다면 사랑으로 용서를 빌어라. 사랑의 뿌리는 너의 심장 내부이다. 이러한 뿌리에서는 미덕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특별하게 사랑의 가치를 인정한다. 이는 인간이 무언가를 결정할 때와 인간의 인품을 형성할 때에 나타나며, 세상에서 그의 행동을 이끌어나가고 성격을 부여하는 인간적 이성이 아니다. 이야기하고 침묵하고, 비난하고 용서하고,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고, 인간 활동의 원동력은 저급한 동기, 부차적인 의도 또는 이익만을 지향하는 숙고가 아니라 인간에게 다른 얼굴을 선사하는 한 사랑이라면 하나의 미덕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인 중세 철학자로서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은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고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당시의 어떠한 사상가 못지않게 이성과 신앙을 조정했고 철학과 기독교적 신학을 화합시켰다. 토마스는 의지보다 인식 능력을 더욱 고귀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신을 인식하는 것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이 더욱 좋고 적합한 것이라 설명했다. 결국 사랑 없이 신을 인식하려고 한다면 신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인간의 관계에 적용시키면 인간들 사이에서의 관계를 연결해주는 것은 상호간의 인식이 아니라 서로에게 느끼는 사랑임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파트너의 모든 특성과 그가 살아온 과정 그리고 그의 가능성, 장점과 약점을 모두 알고 싶어 하는가? 그렇다. 그는 아마도 알려고 노력하겠지만, 이것은 파트너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파트너를 사랑하는 한 그를 인식하려고 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고려할 때 한 인간을 완벽하게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파트너를 완벽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인식하려고 하는 의지는 때로는 병적인 행동이 되기도 하며, 특히 파트너와 관련해서는 결코 적합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의 관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사랑을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랑하는 욕망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에게 속한 그 무엇에 대한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공감적 연대감이다. 사람들은 사랑 없이 신앙을 가질 수 없다. 토마스는 게다가 인간과 신의 유사점은 사랑 안에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랑과 기쁨의 감정만을 인간과 신이 같은 형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달리 표현한다면, 신은 증오하지도 않고 경멸하지도 않으며 기만도 하지 않고 결코 피조물의 특징인 저급한 충동이나 본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신은 신을 찾고자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비밀이다. 인간은 이러한 신의 존재와 본질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면서 파악할 수는 없다. “사랑은 인식의 끝이다. 인식이 중단되는 곳에서, 즉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된 실제 자체에서 사랑은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이 신과의 만남을 고려하여 사랑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토마스는 생각했다. 단지 이성적인 인간은 이러한 최고의 진실을 볼 수가 없다. 신을 찾는 것은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지라도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자신의 방향을 설정한다. 토마스는 사랑을 본능적인 충동과 구별했다. 동물은 충동적이지만 인간이 충동적이 되면 수준에 미달된다. 충동은 비열하고 교활하게 만든다. 인간이 만족을 찾는다면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자기 자신 안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충동적인 인간은 몰락한다. 로마노 과르디니 인간만이 성욕을 억제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다. 과르디니는 이것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했다. 인간의 정신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며, 육체와의 정신적 결합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독창성이다. 이러한 체험에서는 극도의 긴장감과 논쟁이 따른다. 과르디니는 관능적인 욕구와 격렬한 열정이 다른 충동들과 연계하여 나타난다면 인간은 자신의 충동으로 무절제하게 되고 혼란에 빠져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고삐 풀린 것 같은 성적 충동은 성격상의 모순으로 나타나고 행동을 방해하고 성행위에서 자제력을 잃은 행동을 한다. 과르디니는 무법한 성생활에서 혼란스러운 성생활 형태와 규모들을 보았다. 자연의 질서는 크게 변화할 수 있지만 철학자 과르디니는 동시에 인간의 본성, 자연적 행동은 선한 것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과르디니는 성적 삶을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것으로 제한하고, 금욕주의를 억압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적 도덕을 무언가 극복한 것으로서 규정하는 심리분석의 업적을 지적했다. 과르디니는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서 성과 관련해서 책임감 없는 행동을 보았다. 시험 삼아 사랑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그는 점점 더 증가하는 야만성,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 성을 강조하는 광고, 열정의 결여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과르디니는 사랑과 성의 감정과 행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원했다. 이러한 개념은 세상과 인간의 특성을 고려하여 인간 전부를 포함해야만 한다. 개념 설정에 있어서 심리적인 것에만 제한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다양한 영역들을 축소시킨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인격을 지닌 사람이다. 인격은 신체적인 특징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성적 관계를 통해서 규정되지도 않는다. 인격을 지닌 사람을 개념 짓는 데에 있어서 인간 전부에 대한 개념이 규정되어야 한다. 과르디니는 인간은 단지 사랑과 성의 감정과 행태 속에만 몰두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존재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고 인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더욱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과르디니는 주관적인 경험은 사랑과 성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대립된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은 중요한 인상과 체험을 기억하고 성취와 포기, 기분 좋은 향유와 쓸쓸하고 음울한 고통을 기억한다. 우리가 이러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또한 일반적인 도덕적 요구 사항과 충동적인 행동과의 불일치가 문제가 된다. 과르디니는 현대의 허무주의 관념, 도덕 문제의 임의성과 무의미함의 감정에 반대하여 사랑을 강조하려고 열정적으로 시도했다. 자기 자신만을 실현시키려 하고 완전히 혼자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자신을 강조하고 발전시키려고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잃는다. 그는 허무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과르디니는 이러한 것을 경고했다. 왜냐하면 과르디니는 살아있는 신, 즉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나약할 때 의지가 되었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다. 라디슬라우스 보로스 보로스는 과르디니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사랑의 현상에 대한 그들의 해석 차이는 미세했다. 보로스는 종교를 치료에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절대적인 도덕적 요구를 포기했다. 또한 과르디니처럼 근심과 걱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깊은 신뢰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람은 왜 둘이 서로 사랑하는 지를 제3자는 종종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이상한 불확실함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조건들, 다른 운명과 다른 직업들로 인해 첫눈에는 두 사람 사이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보로스는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점은 명백하지만 사랑의 본질적인 합일에 대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서술했다. 아마도 파트너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랑에 찬 애정 관계는 때로는 아주 빠르게,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 아주 의외로 또는 천천히 이루어지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보로스는 이러한 과정을 감정을 이입하여 애정 관계의 불가사의함과 훌륭함을 도덕적이고 설교적인 태도 없이 서술했다. 보로스는 사랑의 현상을 마치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의 전부를 이해하는 것처럼 절대성에서 얻으려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때 존재의 전부가 몇몇 개의 요소와 특징, 성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는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경험자는 불충분한 개념과 방법으로 사랑의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반면 보로스의 분석을 보면 사랑은 분명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의식을 추론하는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상대방이 병이 들면 사랑은 동정으로 바뀌지 않을까? 도둑이나 심지어는 살인자에게 병적으로 심취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보로스는 그러한 반격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유혹자가 단지 아름다운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선택한다면 그는 정말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것은 급진적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이지만 상대방의 특성에 눈이 머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이유는 겉모습이나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 전부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반응이 없으면 사랑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 운명적인 확실함, 고백하는 듯한 표정 또는 시적인 어조로 자신을 표현할 때에도 상대방의 존재 전부를 이해한다는 것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보로스는 지속적이며 너그러운 참을성이 사랑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사랑의 특징으로 “금욕의 준비가 되어 있는 정조를 스스로 터득”하는 것, 옆에 있어 도움을 주는 것을 힘든 부담과 성가신 의무감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함께 있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에는 극기만을 필요로 하며 긍정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함께 있는 것은 점차적으로 극복되는 일시적인 불화와는 상관없이 영원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 임마누엘 칸트는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대표자이다. 그는 로마 시인인 호라즈의 격언으로 계몽주의의 모토를 만들었다. “Sapere aude!” 이는 “현명하도록 감행하라!”라는 뜻이다. 우리가 칸트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실용적인 철학을 떠올린다. 윤리적 기본 원칙은 ‘관습의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와 ‘실천이성의 비판’에서 토론되었다. 칸트는 도덕적 행위를 위한 의무적인 규칙인 이러한 명령의 여러 가지 형태를 언급했다. 칸트가 모든 인간의 계몽을 계획했고 요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은 칸트가 여성에 대해 편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회의적인 생각을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발언은 재치 있는 표현이고 객관적이고 진지한 고백이다. “여자를 필요로 할 때에는 여자를 먹여 살릴 수 없었고, 이제 여자를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여자가 필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에 빠지는 것의 차이를 칸트는 더 확대시키지 않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을 비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심지어는 위험한 맹목으로 이끌 수 있는 심란하고 우매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관대하게 보아 넘기는 것에 대해 남편은 훗날 변덕스럽고 별난 것으로 평가한다. 칸트는 여기에서 사려 깊은 사랑을 권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칸트는 환상을 섞지 말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라고 권하며, 정사에 빠진 상태에서 파트너를 알려고 하지 말며, 급속히 사랑에 빠지지 말고 주어진 상황과 상대방을 침착하고 사려 깊게 잘 파악하고 가능성들을 잘 측정하여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려한 후에 결혼을 결정하라고 충고했다. 칸트의 저서에서 우리는 에로스에 대한 정의도 호색성에 대한 광범위한 견해도 찾아볼 수 없다. 칸트가 열정적인 성생활을 철학적 관점 하에 관찰하는 것을 적합한 것으로 보는 것처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시민적인 권리로 보는 것 역시 아주 적합한 것으로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필요성 또한 자명한 것이었다. 칸트가 육체적 허락을 한 인간의 사물화로 본 것처럼 성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 성적으로 흥분한 남성이 여성을 취하는 동안 여성은 자신을 하나의 사물로서 제공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칸트는 여성의 자만심을 아름다운 결점이라고 했지만 사랑에 빠진 남성은 자신의 마음속의 여성을 칭찬한다. 여성들은 칭찬해 주는 것을 좋아하며 받아들인다. “이러한 성향은 하나의 원동력이고 이득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좋은 예의범절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녀의 유쾌한 유머를 보여주는 것이며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높여준다.” 칸트는 남녀가 서로 느낄 수 있는 강한 애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인습이나 교회의 규범이 아닌 자연의 비밀인 수줍음 타는 성격을 언급했다. 그는 졸렬한 농담과 음담, 더욱이 예의와 관습을 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비난했다.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인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을 우리는 칸트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의 철학자로 손꼽는다. 헤겔 또한 하나로의 결합을 이야기했다. 즉, 사랑은 서로 연결되는 것이고 서로에게 이끌리는 것이며 일치하지 않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지만 강제적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의 결합은 반대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오성은 이러한 다원성에서 대상들의 관련성이 많은 다양함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인간을 서로 결합시키지 않는 반면에 사랑은 살아있는 사람들 간의 진정한 결합이다. 이성은 단지 무언가 정열된 것이며 항상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규정하는 ‘규정된 것’이지만 이와는 달리 사랑은 끝이 없는 것, 제한되지 않은 것이다. 헤겔의 사랑의 실현은 그가 무자비한 신의 의지로 둘로 나뉘어져 서로서로를 필사적으로 찾은 반쪽에 대해 말하지 않았더라도 플라톤의 <향연>을 상기시킨다. 그는 사랑을 단순하게 하나의 감정, 특별한 감정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감정의 다양성과 노력의 다양성에서 즐기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의 총체 속에서 자신을 다시 찾으려고 한다. 먼저 그는 자신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발전시키며, 성격을 발전시킨다. 인간이 결합에서 해체되면 그는 독창적으로 활동할지는 모르지만 충분한 다원성과 다양성을 갖지 못한다.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행복한 순간들의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순수한 행복 그 자체를 찾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특별하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삶 자체, 또 다른 자기 자신과 하나로 일치된 결합을 찾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발전되지 않은 하나로 일치된 결합에서 시작하여 자기 자신을 발전시켰고 사랑 속에서 완성된 결합을 원했.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대조를 이루고 있고 만족스러운 성 충동 속에서 하나가 되는 반대되는 것을 생각해 냈다.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의 수줍어하는 은밀한 손짓, 숨겨진 표시와 이중적 의미의 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녀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잘 맞는다 하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완고함, 이제 싹이 트는 이기주의, 새롭고 정도를 벗어난 생각 등이 남의 눈을 끌 수가 있다. 낭만적인 사랑은 선택한 상대방을 우쭐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헤겔은 이러한 점에서 이 남자는 꼭 이 여자를, 이 여자는 꼭 이 남자를 사랑하라는 절대적인 원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중하고 냉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주관적인 자기중심, 임의적인 우연에 달려 있다. 헤겔은 낭만적인 사랑에 대해서도 말했다. 남녀 간의 사랑과 성적 행동에 대해 서술할 때 헤겔은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에 따라 침해할 수 없는 남성의 위치에 대해 제시를 했다. “음핵은 무위(無爲)의 감정이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열정, 제어할 수 없는 성욕, 성적 만족의 욕구, 본능의 형상이라는 말들은 인간의 본능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대단한 바보라고 여겼다. 헤겔의 의견에 따라 결혼에 의한 결합으로 나타나는 성에 대한 주장을 쇼펜하우어는 냉철하게 경멸하면서 반박했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만족스럽고 사고력도 잃게 할 정도로 맹렬한 열정은 마약에 취한 상태와 비교할 수 있고 창조력을 북돋우거나 야기시키는 것과 같다. 쇼펜하우어가 사랑에 대해, 파트너와의 조화로운 공동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는가? 사랑을 위해, 인습적인 편안함을 위해, 시민적 권리에 따라 완성된 상태, 결혼을 위해 아무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고 결혼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경우는 순결한 처녀와 용감한 남성이 부모의 뜻에 따라서 결혼하는 것이며 그러한 결혼을 타당한 공동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은 편안함이고 형식이 완비된 지루함일 수 있지만 날아오를 듯한 황홀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어느 정도 인습적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자제력을 잃을 정도로 정신과 육체적으로 만족감을 느끼기 위한 동기는 절대 될 수 없다. 엄격하게 조정되는 남녀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아무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렬한 열정 속에는 숨겨진 힘이 있다. 열정은 많은 사람을 죽게도 만들고 정신병자로 만들기도 한다. 때때로 사랑하는 연인을 갑작스럽게 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것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체념적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왜냐하면 그는 “두 사람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 이상의 것을 생각할 수 없어 인생을 포기하는 것보다 모든 관계를 망치지 않고 모든 괴로움을 참아내는 만족감에서 최상의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여성 자체는 단순하게 잘 모르는 존재이고 그가 심리학자의 예리한 견해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수께끼 같은 피조물이다. 분명 여성은 출산하는 사람이며 그녀가 육체적 활동이나 정신적 과업을 하는 것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육체적 매력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러한 매력이 환상의 시간동안에는 남성을 어느 정도 사로잡을 수 있어서 그는 황홀해하고 평생 동안 어떤 형태로든 그녀를 책임지려고 하지만 단지 이성적인 생각만으로는 이것을 확실하게 보장하지 못한다.” 집안일과 직업은 부수적인 것이다. 여성이 진정한 일로 보는 것은 사랑, 치장, 춤 등이며 철학자는 이것에 대해 편협한 자만심으로 비웃는다. 쇼펜하우어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려고 한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서 주목할 점은 그가 인간 개체의 모든 특징을 단순하고 꾸밈없이 해석해서 그러한 특징들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의 이론적 개념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외관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수많은 성찰을 했고 매력적인 것과 거부감을 주는 것을 열거했다. 버틀란드 러셀 러셀은 <결혼과 도덕>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제는 절판된 <결혼과 도덕>에서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사랑에 대한 중요한 견해와 사상은 무엇일까? 이 책은 영국 철학자의 도덕적 저서의 특징인 에세이적인 스타일 이외에 반교회적인 특징이 있다. 러셀은 사랑, 성욕과 열정에 대해서 얼마나 편협하고 억압되고 불합리하게 표현되었는지를 제시하고 싶어했고 노기를 띤 유머로 독단적인 도덕의 가소로움을 비난했다. 나아가 임의적인 원칙에 따라 성도덕을 이해하지 말고, ‘결혼 외’와 같은 경멸적인 개념을 통해서 인간을 낙인찍지 말고 관련자들의 성실한 내면을 평가하고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사랑의 문제에서 인간적인 영혼에 대한 견해를 분명히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시인은 인정받을 만하다. 러셀은 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성 영역의 가치를 인정할 것을 권했다. 러셀은 비인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비현실성을 진단했다. 왜냐하면 결혼의 신성함 -물론 성 바울에 의해 확고하게 되었다- 은 파트너들이 서로 멀어질 수 있고 수 년 동안 보여준 남편과 부인의 의혹적인 성격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치 않고 이러한 결합이 와해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신교는 이러한 질문에 이론적으로는 완고하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는 가톨릭보다 더 완강했다는 것을 러셀은 말했다. 사랑, 결혼, 도덕과 성행위에 대한 역사는 단순하게 사회적 영역에서 바라볼 수 있다. 러셀은 철저하지만 아주 짧게 설명하면서 기독교적 성 윤리의 역사와 그 한계를 제시하려는 데에 몰두했지만 여러 시대를 고려하여 사랑의 중요한 의미와 영향을 분석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 이렇게 철학자는 이러한 성에 대한 견해로 고통 받는 것은 신자들이 아니라 기독교교회라고 주장했고 사람들의 대부분, 특히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과소평가했다. 물론 기독교적 성 윤리가 여성의 권리를 약간 강화시켜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러셀은 계몽주의적 성 윤리와 인간들이 편견 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지지했다. 인간의 존재의 이러한 영역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는 사람은 젊은 시절 성적인 문제에 심취하지 않을 것이다. 신비함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이유 없는 금지는 허용된 것을 은밀하게 위반하도록 자극한다. 러셀의 견해에 따른 사랑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약간은 단편적으로 서술된 고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의 러셀의 사랑, 욕망과 열정의 역사에 의하면 러셀이 사랑을 존재적인 탈출구로 정의했다는 것을 추측하지 못한다. 형이상학이 정착한 시대에서, 대중사회에서 개인의 고립을 “고독을 피하려고 하는 주요 수단”으로 정의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인간은 냉정한 세계에 깊은 두려움을 느끼고 군중의 잔혹함에 겁을 내기 때문이며 사랑에 대한 갈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막스 쉘러 쉘러는 고집스럽게 이성에 집중하고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창조적 생산성을 고르게 하는 무신앙을 비난하면서, 현대 사상가의 이성적인 냉정함을 자신의 철학으로 깨뜨리려고 했다. 쉘러는 칸트에 의한 정언적 명령의 윤리보다 도덕적 주체인 인간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한 ‘ordo amoris’ 즉 사랑의 질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인간을 계몽했고 인간을 가능한 많이 파악했고 학문적 경험으로 접근하는 다양성 이면에 있는 감정의 기본선을 발견했다. 인간 존재가 정말로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인간의 심장을 들여다보고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발견하면 더 많이 알 것이라고 쉘러는 말했다. 사랑의 질서의 원형은 신에 의해서 결정된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 길의 여러 단계를 거쳐 인간적 노력의 제한 속에서 사물의 가치 증대를 통해서 때로는 사랑이 식은 채로 또는 반한 채로 신에게 다가가는 한 독창적으로 신에게 반하여 성장한다. 쉘러는 한층 더 나아가 불행한 사랑의 현상에 몰두했고 옛날부터 있었던 기만당한 사람의 공허하게 지나가 버린 사랑의 힘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기묘하게도 성공적으로 구애를 피해갔기 때문이다. 쉘러는 사랑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되돌아오지 않는 상대방의 사랑이 실존적인 절망 상태까지 몰고 간다는 의식을 하면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은 상대방의 사랑의 부족으로 불행했을 때에도 행복감을 가져온다. 사랑의 대상이 고뇌와 아픔을 초래하더라도 사랑은 행복감을 가져온다.” 이러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은 한 대상에게 향할 수 있지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항상 사랑은 쉘러가 인간에게 있어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사랑의 질서”라고 표현한 상대의 숨겨진 핵심을 향한다. 칼 야스퍼스 야스퍼스가 처음부터 사랑에 대해 작은 철학을 겸손하고 감성적으로 펼쳐나갔다는 사실은 오늘날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사상은 항상 진정한 대화의 문제점에서 맴돌았고 철학사에 대한 그의 저서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전통적 저서들과 많은 공감을 보이고 있다. 사랑은 진실한 언어를 사용하게 하고 그에 상응하는 표현을 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연결해주는 진실이라고 야스퍼스는 명백하게 서술했다. 이러한 진실은 서로 진심으로 좋아하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두 인간 사이에서 형성된다. 아주 상이한 방식으로 이 사람들은 결합하려고 한다. 그들은 곧 자신의 과거를 볼 수 있고 개인적인 지침 근거를 소유할 수 있어 공동으로 함께 발전하고 그들의 삶을 만든다면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써 나갈 수 있다. 야스퍼스는 사랑을 “황홀한 마음”이라고 했다. 이것은 놀랄만한 것이다. 사랑은 날아갈 듯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갑작스럽게 나타나기도 하고 천천히 자라나는 반면 황홀한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도 생각해낼 수 있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야스퍼스는 여기에서 감정, 즉, 흥분, 감격과 충만한 감정, 격정, 열렬함과 사랑하는 사람을 충족시키는 열정, 특별한 활기, 야스퍼스가 감명 깊은 단어로 표현한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사랑이 선사하는 가상의 날개에 대해 이야기했다. 야스퍼스는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의 실제의 모습을 통해서만 더 뚜렷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의 모든 영역들을 바꾸어 놓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파악이고 체험”이라고 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인간에게 있어서 이전에 현실에 대한 불명료한 상은 사라지고 차이점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눈에 보이게 될 것이며 가능성이 나타난다. ‘우리 안에서의 동요’로서 사랑은 ‘모든 구체적인 것을 넘어서 절대적인 것’으로 간다. 야스퍼스는 감정적인 감동과 정신적인 개방을 수수께끼 같이 멋진 방식으로 연결시키는 이러한 매혹적인 단계를 명료하게 서술하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언어의 한계에 부딪쳐서 인간이 체험한 것과 관련해서 사랑의 변화된 힘을 단지 대략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의 가치와 관련하여 야스퍼스는 쉘러와 마찬가지로 가치 있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가치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가치 때문에 무언가를 사랑하려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개인의 양상들이 나타나서 사랑의 동요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가치로운 중요한 사람이 되고 이러한 가치는 사랑을 통해 확고해진다. 가치롭다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며 감동적인 무한함이라고 해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