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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여전히 미완인 세월 앞에서_정범구 (전 국회의원)
1부 나의 인생 글을 시작하며 1장 짧은 행복 2장 기나긴 기다림 3장 고난의 세월 4장 끝내 오지 않은 내일 글을 마치며 2부 교단생활의 단상 글을 시작하며 1장 고사리 손에 얽힌 추억 2장 ‘거지 왕자’ 해동이의 교장 취임식 3장 다시 만난 설화, 그러나 영원히 잃어버린 연호 4장 버릇없는 아이에 당황하는 교사 5장 경석이와 재회하고 스며드는 회한 어머니 유고집을 내면서 느닷없는 사모곡_박소은 발문 분단의 묵시록_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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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개성행 열차로 떠났다. 아니 우리가 그를 떠나보냈다. 다시는 못 만날 그를 그렇게 쉽게 떠나보낸 것이다. 나는 바보처럼 고지식하게 홈까지 나가볼 줄도 몰랐다. 가까이에 함께 서 있는 것조차 쑥스럽게 여겼던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서 바라만 보다 헤어질 시간을 맞았다.
그의 모습이 지하로 사라져 버리자 비로소 나는 당황했다. 이제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심정에서 한 번이라도 더 그를 봐야 했다. 무슨 말인가 꼭 해야 했다.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서서히 움직이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가슴을 움켜쥐고 날뛰었다. …… 기차는 떠나고 연기도, 기적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끝없이 내려다보고만 있던 철길이 훤하게 드러났다. 어느 새 흘러내렸을까, 차갑게 식은 눈물이 볼을 타고 있었다. 역전 파출소의 시계는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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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외에 살기 때문에 두 개의 조국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포기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버림받은 유랑아로 추락할 수 있는 질곡이기도 하다.
어느 해외 통일 운동 원로는 남북의 조국은 해외에 사는 동포들에겐 마치 이혼한 부모에 대한 자식의 심경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어느 한쪽 부모에게 더 정을 주게 되면 다른 한쪽이 서운해 하고 시기하여 자식에게 친북, 친남 인사라는 흉한 이름으로 애꿎은 형벌을 내리거나 유배를 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라는 다 성장한 자식의 입장으로서는 부모가 다시 합하는 것 이상의 소원은 없을 것이다. 헤어진 부모는 각자의 생활 때문에 혹은 서로가 책임을 미루다가 자식을 돌보지 않거나 버릴 수는 있어도 자식은 어느 쪽 부모도 부인할 수가 없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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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행복, 긴 기다림
이숙의가 박종근을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 기념행사에서였다. 충남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해 경북 의성읍 의성 중부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그녀는 그날 행사에서 좌익 대표로 연설한 박종근을 보고 첫눈에 반했고, 박종근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둘은 1947년 6월 10일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었던 이기석의 주례로 결혼식을 했고, 그 후 사촌 오빠 집에서 6개월 동안 시어머니와 세 사람이 5평이 채 되지 않는 방에서 신혼을 보냈다. 그해 12월 3일 박종근은 공부를 더 하고자, 그리고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월북했다. 출발하던 날 서울역에는 수많은 경찰들이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떠나지도 못하고 경찰에 체포되는 것은 아닐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본, 그것이 이숙의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본 남편의 모습이 되었다.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린 50년 그 후 소식 한 줄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짧은 신혼 생활에서 얻은 딸 소은, 시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살림을 꾸리며 살았다. 이숙의는 남편이 빨치산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1951년에 알았다. 그리고 1952년 3월 어느 날 경찰서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고, 거기서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생포된 여자 빨치산 한 명이 박종근의 여비서 겸 간호장교였다고 밝히면서 그가 깊은 총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다니던 중 여러 동지들에게 피해를 입혀선 안 된다면서 자기가 갖고 있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증언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혁명가 박종근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법한 남편의 성정을 잘 알았기에 이미 각오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도 믿어지지도 않았다. 남편의 사망 사실이 공식화되자 비로소 그녀는 교직에 복직할 수 있었다. 1953년 의성 남부국민학교에 나가기 시작하여 1954년에는 대구 중앙국민학교로 발령이 났다. 당시 생계를 위해 교직에 복직했으나 아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터이기도 했다. 복명국민학교에서 일하던 1959년에는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향 친구이자 당시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신순필 씨가 복명국민학교에 방문해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거절했는데 후에 신순필 씨가 경찰에 잡혀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했고, 이에 간첩 혐의를 받아 체포된 것이다. 다행히 교사 생활을 하며 만난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풀려났으나, 그런 주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일생을 형무소 안에서 보내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감 후 이숙의는 20년 가까이 교직에 헌신했다. 중앙, 복명, 대구국민학교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도운 사실이 알려져 여러 차례 교육자 특공상을 받았고, 1964년에는 경북 교육위원회 초등교육과 장학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 후 딸 박소은 부부가 삶의 터전으로 자리 잡은 독일로 초청을 받았고, 사랑하는 딸과 헤어져 사는 아픔을 더는 감당하고 싶지 않은 데다, 유신 교육의 폐단에 회의를 느끼던 터라 많은 사연을 뒤로하고 독일로 떠났다. 자서전 『이 여자, 이숙의』는 그녀가 처음 박종근을 만난 때부터 한국을 떠나 독일로 가기 전까지의 사연들을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