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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우리 역사 연구 알기 시리즈 간행에 부쳐
머리말 제1장 관례 제2장 혼례 제1절 우리나라 혼인의 변천 원시 및 고대의 혼인 삼국 및 발해, 후기 신라 시기의 혼인 고려시기의 혼인 리조시기의 혼인 제2절 약혼(정혼) 혼인나이 선보기 혼서의 교환, 날받이 납페 제3절 잔치(성례) 신랑잔치 신부잔치 혼례옷 혼례음식 제4절 혼례에 따르는 민속 신방 엿보기 첫나들이 신랑 다루기 단자 반살기 딸 돌아보기 사돈 보기 문안 인사와 첫 부엌 출입 회혼례 제5절 혼례를 제약한 요인과 혼례에서의 미풍량속 제3장 상례 제1절 우리나라 상례의 변천 원시 및 고대의 장례 삼국 및 발해, 후기신라시기의 장례 고려시기의 상례 리조시기의 상례 제2절 장례 초종 습 렴 상복 조상과 조문(문상) 장례기일과 묘지선정 천구, 영결, 발인 하관, 성분, 매장 제3절 상중의례 우제 졸곡, 100일상(100일제) 소상(첫돐제)과 대상(3년제) 담제와 길제 제4절 상례를 제약한 요인과 상례풍습에서의 미풍량속 제4장 제례 제1절 제례의 유래 제2절 제사의 종류 기제 시제 속절제 묘제 니제, 사당제 제3절 제사의 절차와 기구 제사의 절차 제사기구 제4절 제상차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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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눈에 들어오는 우리 민족의 관혼상제 변천사
우리는 여러 가지 가정의례 가운데서 성년식과 결혼, 사망과 추모 등에 대한 의례를 통틀어 관혼상제라고 한다. 이러한 의례는 그 사회의 정치와 경제, 사상, 문화, 종교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변화 발전하게 되므로 관혼상제 속에는 한 시대의 시대상이 농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사회과학원이 2000년 발행한 이 책은 『삼국지』, 『후한서』, 『수서』 등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 우리 역사서, 그리고 『주자가례』, 『사례편람』 같은 례서들을 폭넓게 인용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관혼상제 변천 과정과 규범화된 의례 절차 및 특성, 지방적 차이와 그 요인들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먼저 제1장에서는 남자 어린이의 성인식인 관례(冠禮)와 여자 어린이의 성인식인 계례(?禮)를 치르는 나이와 절차, 이 의식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설명하고 제2장에서는 고대부터 조선시기까지의 혼인의 변천 과정과 신방 엿보기, 신랑 다루기, 반살기, 사돈 보기, 회혼례와 같이 지금은 거의 잊혀진 혼례에 따르는 각종 민속의 유래와 의미 등을 흥미있게 다루고 있다. 제3장에서는 우리 나라 상례의 변천사와 초종, 습, 렴, 상복, 천구, 영결 등 장례의 절차와 우제, 졸곡, 소상, 대상, 담제와 길제 등 상중의례를 상세히 서술하고 아울러 상례에 따른 각종 허례허식의 원인과 그 폐해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한편 제4장 제례에서는 제례의 유래와 기제, 시제, 속절제, 묘제, 니제, 사당제와 같은 각종 제사의 종류와 제사 절차, 기구, 제상차림 등을 누구나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2. 조선 초기까지도 시집살이보다는 처가살이가 보편적이었다. 우리는 흔히 성인 남녀가 결혼하는 것을 '장가간다'거나 '시집간다'는 말로 표현하는데 사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초기까지도 신랑이 신부집에 장가가서 사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혼인 형태였다.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로 바뀐 것은 고려 말 남자 본위의 주자학이 도입되어 성행하면서부터였다. 고려 말 유교성리학자인 정도전은 "남자가 처가에 들어간 다음 부인들이 부모의 세력을 믿고 남편을 업신여길 뿐 아니라 부부 사이에 반목하게 되니 이것은 윤리도덕을 영락하게 하는 길이다"라고 개탄하면서 '친영론' 즉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례를 올리고 신부를 직접 맞아 데려올 것을 주장했다. 유학자들의 적극적인 주장에 따라 조선 초 세종이 친영한 것을 비롯해 왕족들 사이에 점차 친영이 도입되면서 처가살이혼이 시집살이혼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오랜 풍습이 쉽사리 바뀌지는 않아 민간에서는 17세기까지도 처가살이혼의 풍습이 남아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첫아이는 친정에 가서 낳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처가살이혼의 유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신랑 다루기도 처가살이혼이 남긴 민속 가운데 하나로 처가살이혼이 시집살이혼으로 바뀌면서 신부를 빼앗아가는 '전통의 파괴자'에 대한 신부쪽 남자들의 일종의 제재를 유희화 한 것이다. 기러기가 신랑잔치의 첫 의식에 등장하게 된 것은 '기러기가 새끼를 많이 치고 한 번 짝을 이루면 다른 짝을 찾지 않는 길한 새라고 믿은 때문이다. 또 대추와 밤을 폐백으로 드리는 풍습은 이미 고려시기에도 있었다. 이규보는 〈밤〉이라는 시에서 밤은 "제상에는 대추와 함께 오르고 신부의 폐백에는 개암과 함께 따른다"고 하였다. 사모관대는 원래 봉건관리들의 관복이었으며 활옷과 원삼은 궁중예복이었는데 이조 말기에 들어와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의한 복식제도가 문란해지면서 처음에는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 혼례옷으로 쓰이다가 나중에는 일반 백성들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 민며느리의 반대인 예서제가 성행했으며 조선시기에는 두 집안에서 아들과 딸을 서로 바꾸어 결혼시키는 '누이바꿈' 또는 '물레혼'이나 뱃속에 있는 아이들을 놓고 부모들이 미리 약속하여 결혼시키는 '지복결혼'풍습도 있었다. 3. 부모 3년 상복이 고착된 것은 16세기 초 부모나 가까운 친척이 사망했을 때 상복을 입는 것은 삼국시대 이래의 풍습이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죽은 사람과의 촌수에 따라 상복을 달리하는 5복제도가 있었다. 부모가 사망하면 3년 상복을 입는 제도는 고려 말 주자학 신봉자들이 이를 적극 주장함에 따라 공양왕 때 선포되었으나 이것이 확고한 관행으로 고착된 것은 유교성리학이 사회생활 전반을 지배하게 된 16세기 초부터였다. 상을 당한 후 성복 후에 가장자리도 꾸미지 않고 호지도 꿰매지 않은 옷을 입거나 두루마기 소매를 빼고 입는 것, 머리를 풀어헤친 것, 상제가 죄인으로 행동하는 것, 굴건 지팡이 등의 복제, 공포, 위패, 명정, 반혼 등은 모두 유교성리학이 제창되면서 생겨난 풍습이다. 상제들은 때에 따라 통곡, 대곡, 례곡 등의 곡을 했는데 장례기간이 길어지면서 상제들의 고통이 심해지자 양반 관료나 부유층들은 울음을 대신해 주는 곡비라는 직업적인 울음군을 따로 두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성행에 따라 민간에서 화장풍습도 적지 않았는데 이 역시 조선시대에 들어와 시체의 매장과 제사를 주장하는 주자학에 따라 일부 승려를 제외하고는 화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는 고대나 삼국시기에도 있었지만 기록상으로는 고려 말엽부터 보인다. 그러나 연간 수십 차례나 까다롭고 번잡한 격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이조시기 성리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삼은 『주자가례』의 규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이래로 주자학은 우리 관혼상제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그것은 바로 우리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