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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 머리말 / ■ 감사의 말 / ■ 머리말
1장 _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 직접행동, 비폭력과 폭력 사이 / 비폭력 저항의 역사 / 억압 체제에 저항하는 직접행동 / 민주 제도를 옹호하는 직접행동 /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는 직접행동 / 민주주의의 빈 곳을 메우는 직접행동 / ‘보통 사람들’의 직접행동 / 비자유주의적 직접행동 2장 _ 자유민주주의는 비폭력적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 베버, 아렌트, 간디, 샤프의 권력 이론 / 구조적 지배 또는 구조적 폭력 / 권력과 저항에 관한 푸코의 견해 / 비폭력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인가? / 자유민주주의와 세계 평화의 머나먼 거리 / 자유주의를 비판한다 / 폭력 저항보다 비폭력 직접행동이 효과적이다 3장 _ 직접행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자유민주주의 정치의 여러 모습들 / 자유민주주의 정치의 한계 / 시민사회와 직접행동 / 지구시민사회는 가능한가? / 신사회운동의 한계 / 여성운동 / 평화운동 / 녹색운동 / 원주민운동 / 초국적 사회운동 4장 _ 신자유주의 시대의 전 지구적 직접행동 지구화란 무엇인가? / 경제 지구화에 대한 해석과 반응 / 다국적기업 반대운동의 이론 / 다국적기업 반대운동의 가능성과 한계 / 다국적기업에 대한 전 지구적 저항 / 전 지구적 저항이 세계은행에 끼친 영향 / 전 지구적 저항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통제 / 남반구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 직접행동과 민주주의 5장 _ 자유민주주의와 직접행동 시장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와 직접행동 / 입헌정치 / 민주적 입헌정치와 국제법 / 엘리트주의와 참여 / 국제주의, 세계주의, 그리고 저항 6장 _ 참여민주주의와 직접행동 현대의 공화주의 이론들 / 심의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들 / 심의민주주의와 직접행동 / 심의민주주의 비판 / 지구화의 함의 7장 _ 사회주의·세계주의·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 사회주의적 대안 / 세계주의, 전 지구적 차원의 민주주의? / 지구시민사회와 직접행동의 역할 / 지방분권과 직접민주주의 8장 _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실천이다 민주주의의 결손과 직접행동 / 민주주의의 이상과 직접행동 / 직접행동과 문화적 권리 / 직접행동과 비국적자의 권리 / 참여민주주의와 직접행동 / 민주주의의 표출로서 직접행동 직접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직접행동 / 전 지구적 맥락의 직접행동 / 민주주의의 미래는 직접행동에 달렸다 ■ 주석 / ■ 찾아보기 |
趙孝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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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는 비폭력적인가? - 직접행동의 의미와 본질
자유주의 국가에서 저항을 실천하면서 재산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거나 국가 공무원을 공격한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불법행위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정부 당국이 불필요한 무력을 사용한 것에 대해, 예컨대 노숙자 또는 실업자가 무단 점거한 집이나 공장에서 그들을 끌어내려고 할 때, 항의자들이 무력으로 맞선 경우 이들은 정당방위권을 주장할 수 있고 어느 정도 대중의 공감을 얻을 여지가 늘어난다. …… 폭력의 함의는 흔히 부정적이지만 폭력이 대단히 긍정적인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정부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경찰력을 동원하는 행위를 무책임하고 문제 많은 사회 불만 세력에 맞서 공공질서를 엄중히 수호하는 행위로 생각할 수 있다. 항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 분노나 절망을 표출하는 데 정서적·도덕적으로 긍정적이며, 전술적으로 필요한 행위일 수 있다. ---p.120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행동이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인 직접행동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가 여부는 운동가들의 행동거지와 규율에도 달려 있다. 민주적 지지를 모아 미리 계획한 공개적 행동은 우발적 행동보다 더욱 적절하며, 정당화하기도 쉽다. 존 셀라스(John Sellars)는 “아이들을 포함해서 전체 마을 주민이 음악 밴드와 함께 야외 소풍 겸 항의운동을 하는 앞에서” 조제 보베와 지역 농민들이 경운기로 맥도널드 상점 시설을 파괴한 것과, “군중 속에서 갑자기 검은 복면을 하고 뛰어 나온 몇몇 사람이 맥도널드의 창문을 부수면서 충돌을 도발하는 행동”은 전혀 다르다고 지적한다. 폭력 행위 그 자체를 위한 후자의 사보타주 행동은 계획된 난동 또는 자발적 난동의 범주에 속한다. ---p. 116~117 여성참정권운동에서 원주민운동까지 - 민주주의를 발명하고, 보호하고, 보완해 온 직접행동의 역사! 과거에는 조직화된 정치적 저항이란 주로 왕에 반대하는 무장봉기, 또는 농민의 경우에는 지주와 지방 관리에 대항한 반란을 뜻했다. 잉글랜드의 경우 1381년의 농민반란 때부터 왕실이나 의회에 백성의 요구를 전달하기 위하여 런던을 향해 상경 투쟁 행진을 벌이는 관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때 행진의 발단은 인두세에 대한 무장투쟁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의 무장봉기 역사는 1215년 당시 존 왕에게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승인하도록 요구한 것에서 시작해 1264∼1265년 재산을 가진 평민도 의회의 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몬포트(Simon de Montfort)의 전투, 그리고 수 차례의 튜더 반란을 거쳐 1640년대의 내란으로까지 이어진다. ---p. 55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행동하는 민주주의 - 인도의 나르마다 댐 건설 반대운동에서 콜롬비아 우와족의 저항까지 현재 지구화 논쟁은 경제적·기술적·문화적 추세를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의 인식은 흔히 새로운 사태 전개를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구화 관련 이슈를 이해하는 데 흔히 복잡한 경제·정치적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중요한 정책이 대중의 감시를 피해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지구화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고 우려를 표하는 이유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특정한 전 지구적 이슈를 놓고 활동을 벌여 왔고, 여러 사회운동이 극적인 형태의 직접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p. 254 롤스와 드워킨에서 아렌트, 하버마스, 캘리니코스까지 - 다양한 민주주의 이론과 직접행동의 접점을 찾다 롤스는 의무를 강조한 초기의 사회적 자유주의자들 또는 시민의 저항이 무질서와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칸트와 달리,《정의론》에서 시민 불복종을 상세하게 정당화한다. …… 사회의 전반적 구조와 정부의 운용에 결함이 있더라도 크게 보아 정당한 쪽에 가깝다면, 보통 시민들은 설령 부당한 법이라 할지라도 그 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의롭지 않은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법과 기준이 공적으로 인정된 기준에서 크게 일탈할 때에는 그 사회의 정의 관념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인정한다. 시민 불복종은 그러한 호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p. 354 벤저민 바버는 대의민주주의와 정당에 기반을 둔 정치만으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촉진하지는 못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 바버는 “민주주의 절차가 급진적 개혁을 추동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현상(現狀)을 정당화하는 편리한 의식(儀式)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선거에서 후보들을 장사하듯이 마케팅하는 관행 탓에 이성적인 선택의 역할이 최소화되고, 어쩌다 토론거리가 제기되더라도 사소한 이슈에 국한되어 진행되곤 한다는 것이다. 바버는 정치적 불안이 점차 비합리적인 저항과 그것에 대한 국가의 탄압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지 않고 “민주주의의 재창조”라는 제3의 선택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물론 그는 이런 균형 감각은 잘 충족되기 어렵고, 그렇게 되려면 지속적인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버는 이런 식으로 새롭게 창조된 민주주의가 인종적·경제적 불의를 해결할 것이며, 반대 세력들 사이에 협력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p.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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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행동은 ‘작은’ 사람들이 ‘온몸으로 행사하는’ 투표 행위다!
‘정상적인’(?) 대의민주주의로써 민주주의의 이상인 ‘시민의 통제’와 ‘시민의 평등’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최근 <어틀랜틱 먼슬리>지에 실린 기사 한 편을 인용해보자. 이 기사는 네덜란드 경제학자 얀 펜의 아이디어에서 착안하여 2001년 현재 미국 사회의 소득 격차를 그림으로 표현했다(아래 그림 참조). 얀 펜은 소득이 있는 모든 사람이 한 줄로 서서 행진을 하고 관찰자가 그것을 바라본다고 가정했다. <어틀랜틱 먼슬리>의 기사에서는 전체 행렬을 100퍼센트로 나타냈다. 이 행렬에서 제일 적게 버는 사람은 맨 앞에, 제일 많이 버는 사람은 맨 뒤에 서 있다. 이 사람들의 키 높이는 자신의 소득 수준과 비례한다. 따라서 적게 버는 사람은 키가 작고 많이 버는 사람은 키가 크다. 전체 행렬의 10퍼센트 수준에 있는 사람은 키가 18센티미터에 불과했고, 35퍼센트 선의 사람도 76센티미터에 불과했다. 행렬의 정중간인 50퍼센트가 되어도 사람들은 성인의 평균 신장(평균 소득)에 훨씬 못 미치는 12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행진이 65퍼센트 선을 넘어서야 175센티미터 이상의 신장(평균 소득)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행진이 92.5퍼센트 선을 넘어서자 4.2미터 정도의 큰 키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다. 거의 맨 마지막인 99.995퍼센트 선에서는 자그마치 284미터의 키를 가진 수퍼 거인이 걸어 들어왔다(서울 남산이 해발 256미터임을 기억하라!). 영국이나 미국이나 소득 격차의 불균형 분포는 이처럼 극심하다. 한국의 상황을 이와 같이 시각적으로 나타내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이렇게 극히 작고 극히 큰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극단적인 불평등 사회에서 주권재민, 보통선거, 법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만으로 참된 민주주의가 가능할까? 키가 몇 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땅강아지 같은 사람들과 남산보다 더 큰 거인들 사이에 물리적으로나 은유적으로나 참된 의사소통과 민주적 토의가 가능할까? 또한 거인들이 민주주의 과정의 배후에서 정치인들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미디어, 선전매체,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작은 사람들의 의식을 교묘하게 조작하며, 각종 제도를 통해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철통같이 고수할 때에 투표 행위라는 ‘민주적’ 절차는 민주주의를 과연 얼마나 제대로 보장해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이런 거인들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아무 제약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초국적 자본의 이동) 가는 곳마다 영향력을 발휘하고 작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면 그것을 과연 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소득불평등이라는 렌즈로만 민주주의의 허점을 짚어보았지만 이런 허점은 여러 영역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결손을 넘어 민주주의를 ‘재발명’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까?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직접행동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최근 한국 사회에는 한미 FTA 반대 시위,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이랜드 노조 파업,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 같은 대중 저항, 직접행동이 갈수록 늘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국가 정부나 대기업 같은 힘 있는 집단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시위와 파업, 연좌농성, 단식투쟁, 불매운동, 납세거부, 시민 불복종 등 직접행동에 나서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환경운동가들은 열대우림의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에 자기 몸을 묶고, 독일의 환경운동가들은 핵폐기물을 적재한 수송열차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 농부들은 유전자 조작 작물을 뽑아버리고 캐나다의 노숙자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 건물을 점거한다. 다국적기업 반대 활동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제 소비자 불매운동은 일상적인 저항 형태로 등장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러한 대중의 직접행동을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직접행동은 몰지각한 시민들의 무분별하고 무질서한 탈법행위에 불과한가? 왜 이렇게 갈수록 직접행동이 늘어나는 것일까? 억압적인 체제에서뿐 아니라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정치 선진국에서조차 직접행동이 일상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민들의 모든 직접행동은 궁극적으로 제도적 틀 속으로 흡수되어야 정상인가? 정치 발전이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성숙하면 결국 직접행동은 사라질 것인가? 《직접행동》은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서 출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