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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긋불긋한 ‘이야기책’의 대중 전파 놀라워”
- 김기진, <대중소설론>, 《동아일보》 1929년 4월 14일 “《장끼전》《심청전》《유충열전》은 농촌의 교과서” - 《조광》 4권 12호, 1938년 12월 “밥 먹는 것도 잊고 (고)소설책을 보다” - 홍명희, <자서전>, 《삼천리》 제1호, 1929년 6월 “다만 그 책 모양이 극히 비예술적으로, 찢어지기 쉬운 울긋불긋한 표지를 붙여서, 야시(夜市)나 장바닥의 싸구려판으로 굴러다니니까 혹은 체면 손상될까봐, 혹은 저 속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안 읽는 이가 많다. 그런 분께 부디 권하노니?얘기책도 좀 보시라. 그래도 그것이 우리의 문학적 전통이오니, 창작을 위하여는 전통의 거름이 되느니” - 이희승, <소설과 얘기책>, 《박문》 제5호, 1939년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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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들어선 동기와 소년시대 또는 근일 애독하는 문예전적”
모윤숙: 어릴 때 조선 고전소설을 읽다가 그만 소설에 심취하면서부터 문자의 의미를 알게 되었나 봅니다. 유진오: 십일이 세 대에 조선 구소설 수십 권을 읽었고, 신소설로는 십삼 세 대에 춘원의 「무정」을 읽은 것이 최초였습니다. 함대훈: 소년시대 나는 영웅전을 많이 읽었습니다. 때로는 영웅이 될 야심을 갖고 이런 책 저런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책에는 무슨 아지 못하는 세계를 알게 해주는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우연한 기회로 나는 춘향전, 구운몽, 남정기, 심청전을 읽었던 것이 동기가 되어 나도 이런 이야기책을 지어볼 생각도 나기 때문에 글장난도 했습니다. 이헌구: 소년시대에 애독한 서적 중 춘원의 무정, 춘향전, 수호전 등 박태원: 동기래야 별것이 있겠습니까? 어렸을 적부터 이야기책을 좋아하였고, 또 글 짓는 데 약간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죠. 채만식: 유년소년 적에는 춘향전, 구운몽, 추월색, 장한몽 등 신구소설과 삼국지, 수호지, 동한연의(東漢演義), 서한연의(西漢演義) 등 안 읽은 게 별로 없고 - <작가단편 자서전>, 《삼천리문학》 제1집, 1938년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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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활자본 고소설이란?
고소설은 조선시대에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전해오면서 독서계에 ‘소설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애국계몽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신소설’의 출현과 함께 역사의 퇴물로 쓸쓸히 퇴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식민지 시대에 다시 유력한 문학 양식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서양식 인쇄술의 도입과 발전, 살벌한 식민지 검열체제, 그리고 하층민적 감수성을 자극해온 전통적 서사의 매력 등이 맞물리면서 오히려 신소설과 현대소설을 압도해 갔다. 활자본 고소설은 ‘울긋불긋한 표지에 4호 활자로 인쇄한 100매 내외의 소설’이 그 전형적 면모였다. 1912년 이해조의 개작소설 《옥중화》를 필두로 1930년까지 대략 20년 동안 1천여 회나 간행되었다. 《춘향전》만 1년에 40만 부 가량 팔렸다는 전설적인 기록도 남아 있다. 이처럼 식민지 시대를 주름잡던 활자본 고소설은 해방 이후 점차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우연과 감상성의 남용, 구성의 비현실성, 묘사의 불성실, 인물 설정의 유형화 등은 변화된 시대와 독자층의 욕구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문학 향유의 민주화에 기여한 점에서 활자본 고소설의 공은 결코 적지 않았다. 또한 고소설에 담긴 우리 민족의 원형적 상상력과 토속적 감수성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값진 문학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2. 과거의 화려한 시각문화 감상할 수 있어 이야기책으로 불린 활자본 고소설은 일명 ‘딱지본’이라고도 불렸다. ‘딱지본’이라는 말은 책의 표지가 아이들 놀이에 쓰는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된 데서 유래한 말이었다. 활자본 고소설은 근대 활판 인쇄술의 발전에 따라 표지를 컬러 삽화로 인쇄해서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또한 본문 앞이나 중간에 흥미로운 한 대목이나 등장인물을 그린 삽화를 배치해서 강렬한 이미지를 창조해냈다. 본문 체제는 세로쓰기와 내리받이 조판, 국한문 혼용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띄어쓰기와 국문전용, 언문과 현토주해 등 다양한 편집 기법을 선보였다. 따라서 이 당시의 활자본 고소설은 근대 초기 시각문화와 출판 편집 기술의 변천도 살펴볼 수 있다. 3. 작품 내용 《춘향전》의 이본으로, 1935년 삼문사에서 발행되었다. 1930년대 출판업계가 전반적으로 위축된 상황인데도 190쪽에 이르는 비교적 두터운 분량에 삽화까지 있어서 《춘향전》의 대중적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12년 이해조가 《춘향전》을 개작한 《옥중화》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고 이것이 다시 단행본으로 출판되면서 활자본 고소설이 출현했다. 이후 《춘향전》의 주류는 《옥중화》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이 차지한다. 《여중화》 역시 《옥중화》 계열로, 그 가운데서도 《도상 옥중화》 계열에 속한다. 삽화와 그 설명이 들어 있고 전체가 8장으로 나뉘며 인물들의 대화가 희곡 형식을 취한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창극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본문 첫머리에 ‘이국창 창본’ ‘무연거사 교록’이라고 밝혀져 있는데, ‘이국창’은 당대의 명창 이동백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내용면에서 기존의 《춘향전》과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다만 이몽룡이 과거에 급제한 후 어사라는 직임을 자원한 것이라고 서술하고, 방자가 한양을 가다가 몽룡을 만났지만 몰라본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을 덧붙이는 등 작품의 전후 맥락을 일치시키려 했다. 월매의 개성이 강하게 부각된 점은 이 작품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춘향과 몽룡이 이별한 후 한양에서 온 편지에 돈이 들어있지 않은 것을 알고 “요놈의 새끼 천살을 콱 맞아라”라며 몽룡을 저주하거나 어사가 자신의 사위임을 모른 채 춘향에게 어사 수청을 들라고 권하는 내용 등은 월매의 속물적 근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결말 부분에서는 이몽룡이 변학도를 치하하며 춘향의 절행이 그 때문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감사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신분 갈등의 첨예한 대결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