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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개정판〉
머리말 〈초 판〉 Ⅰ.국세청 전야 1. 전 산업화 시대·사세국 최빈국 시대, 재무관료 임관 / 외원 의존 재정, 버려진 상이군인 / 현상논문 상금 받아 첫 효도 / 적자재정 지탱 ‘재무부 사세국’ / 6ㆍ25 전쟁 주역, 농민ㆍ‘토지수득세’ / 예산국회, 옛날도 ‘세금 논쟁’ / 4ㆍ19 전야, 잘못된 세제 개편 2. 60년대 민주당 시절 의욕 가득, 장면정부 ‘경제제일주의’ / 불발로 끝난, 3ㆍ15 부정축재 처리 / 최고회의에서 고친 세법개정안 3. 60년대 5ㆍ16 군정 시절 5ㆍ16 군정 ‘부정축재조사단’ 부정사건 / 산업화 촉진, 세정도 총동원 / 5ㆍ16 군정의 야심작 ‘재무부 감사과’ / 사세직 고역(@ [), 사세청에서 첫 체험 / 근대화 징세군단 ‘국세청’ 등장 Ⅱ.산업화시대 국세청 1. 60년대 공화당 시절 국세청 개청 6개월에 서울청장으로 / 세수목표 700억, 추상같은 ‘국정감사’ / 개청목표 달성에 편법도 동원 / 박 대통령 위로금, 세우회 기금 2. 60년대 개발독재 시절 장충체육관에서 터진 국세청 함성 / 정치사찰 보상 ‘모범납세자상’ / 이태원에서 잡은 ‘위장오퍼상’ / 설렁탕 물 타기, 국세청 물가단속 / ‘세금의 날’ 벌어진 기자소동 / 부하 사표 받은 정통관료의 눈물 / 세금 용도 밝힌 ‘국세이동전시회’ / 휴전선 접적지역, 서울ㆍ중부청 분할 / 세무사찰 대신한 ‘성실보고회원제’ / ‘국회의원 겸직사건’ 흥정으로 끝나 / 국세청 역량 발휘, ‘고리채 신고’/ 3. 70년대 유신헌법 시절 사채대책본부에서 만난 박 대통령 / 이권행정 차단, 법인세 연합조사 / 공평과세 지향, 대중세 혁신 / 조세분야 탈출의 꿈, 끝내 무산 / 강요된 사표, 국세청 ‘74 숙정’ Ⅲ. 민주화시대 국세청 1. 70년대 긴급명령 시절 ‘제2의 인생’, 높은 장벽, 교수 입문 / 재무관료 출신, 대학교수 제1호 / 관료경험 살려 조세학 연구에 / 국세청 74숙정, 대법원 위법 판결 / 관료출신 절대 조심, 대학 보직 / 박 대통령 고민, VATㆍ중화학공업 / ‘서울의 봄’에 열었다 닫은 ‘재정학 교실’ 2. 80년대 전두환 시절 전두환 정부 첫 작업, 교육세 논쟁 / 관학협동 ‘한국조세학회’ 창설 / 관료ㆍ교수경험 살린 신문 논설위원 / 아웅산에서 사라진 ‘조세지출예산제도’ / 21년 만에 폐지된 ‘예ㆍ적금 비밀보장법’ / 친북·반정부학생 설득에 실패 3. 80년대 노태우 시절 6ㆍ29 민주화 ‘헌법재판소’ 등장 / ‘조세의 날’ 받은 동탑산업훈장 / 재정경제자문회의에서 격정 토로 / 남기고 싶은 글 ‘복지국가대망론’ Ⅳ. 밝은 재정을 위해 1. 호사다마ㆍ사필귀정 실력 없는 세무서장에 곤욕 겪고 / 세법 모르는 판ㆍ검사에 봉변당해 / 마침내 회고, 영욕의 세월 50년 2. 칼럼ㆍ신문 인터뷰ㆍ사설ㆍ기고문 ≪신동아≫ 칼럼: ‘원조 국세청맨’ 이철성 박사의 개발시대 세무비화 / 신문 인터뷰: ‘양극화 핑계, 증세주장 안 된다’ / 특파원 칼럼: 미국의 빈부격차 해소법은? / 신문 사설 1: ‘세금 없는 복지’라는 허황된 정치 경쟁 / 신문 사설 2: ‘인사청탁, 불이익 선례 만들라’ / 신문 사설 3: ‘국가 칼이 정권 칼로 비치면 법치 흔들려’ / 신문 기고문: ‘국세청 사람들’ 부 록 Ⅰ. 논문·저서 목록 Ⅱ. 사회 논문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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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한국재정 50년과 함께한 재무관료 출신 대학교수의 회고담
그러나 영세한 농가 및 중소 상공인들은 금융자산 실명제가 실시되고, 신용금고가 저축은행으로 확장되고, 사채업이 대부업으로 합법화된 지금도 뭉칫돈으로 주고받는 고리채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빈ㆍ부의 격차, 이것은 진정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숙명인가? 참으로 안타깝다. ---「70년대 유신헌법 시대」 중에서 그런데 나는 명색이 700억 세수의 선봉장 격인 서울국세청 청장으로서 온갖 간난을 극복, 그날의 영광을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엔 없었고, 대통령 기관표창순서가 됐을 때 그 단상에는 후임 서울청장 서영철 씨가 올라갔다. 그 때 내가 그 자리에 불참했던 이유는, 세금의 날을 앞두고 고락을 같이했던 서울청 국장 1명이 구명운동의 보람도 없이 결국 파직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 「80년대 노태우 시절」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