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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저자 서문 광종-정관정요 피로 물든 왕좌에 올라 집어든 제왕학의 바이블 태종-대학연의 “이 책을 읽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사옵니다.” 세종-자치통감 조선 최고의 성군, 역사에서 모든 걸 배우다 성종-소학 집권 세력 물갈이의 신호탄이 된 한 권의 책 연산군-춘추 그 남자, ‘춘추필법’에 무릎 꿇다 선조-주역 “만고길흉의 이치가 이 책 속에 다 있으니…” 효종-심경 북벌만 가능하다면… 정치적 도구로 선택된 ‘마음의 경전’ 영조-예기 노회한 왕, 옛 글을 읊조리며 눈물을 쏟다 정조-서경 야심 많은 학자 왕, 요순을 개혁 군주로 재해석하다 고종-효경·조선책략 난세 돌파구를 책 속에서 찾았으나…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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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정관정요
피로 물든 왕좌에 올라 집어든 제왕학의 바이블 광종은 《정관정요》를 신하들 앞에 펴들며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당 태종은 나보다 더했다. 그런데도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고 있다. 나도 당 태종처럼 정치를 잘하면 될 것 아닌가.” ---p. 26 당 태종이 신하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인 명군으로 그려져 있는 《정관정요》는 신하들이 군주들에게 즐겨 추천하는 책이었다. 그랬기에 고려의 신하들은 이 책을 애독하는 모습과 집권 초기 신중한 처신을 보며, 광종이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현명한 군주가 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p. 27 태종-대학연의 “이 책을 읽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사옵니다.” 이복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이방원이 울분을 삼키며 지내던 무렵의 일이다. 어느날 이방원이 조준의 집에 들렀다. 조준은 반갑게 맞아 술자리를 베풀며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대학연의》였다. “이것을 읽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p. 37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태종에게 《대학연의》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었던 것 같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의 기록을 전하는 《태종실록》에 《대학연의》는 스물여섯 번이나 등장한다. 심지어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동하는 도중 임시 천막 같은 곳에 잠시 머물 때에도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당시 무엇이 그를 이 책에 빠져들게 했던 것일까. ---p. 47 세종-자치통감 조선 최고의 성군, 역사에서 모든 걸 배우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요점정리된 역사서에 만족할 수 없었다. 《자치통감》에서 뜻을 알기 어려운 구절들이 나오면 여러 서적들을 참고해 그 해설을 붙여 편찬하라고 하면서 《자치통감훈의》라는 제목까지 미리 지어주었다. (…) 《자치통감훈의》 편찬에 들인 세종의 공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세종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결코 빠뜨리지 않던 경연까지 1년 까까이 연기하면서 편찬 작업을 독려했으며, 매일 밤 그 초고를 친히 교정했다. ---p. 72 세종은 역사가 현재에 전하는 가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던 학자였다. 그런 세종에게 당시 최고의 역사서였던 《자치통감》은 정치 교재이며, 실전 경험을 전해주는 실용서였고, 역사 연구의 전범이었던 셈이다. ---p. 79 성종-소학 집권 세력 물갈이의 신호탄이 된 한 권의 책 《소학》과 폐비 문제를 연관지어 해석한 논의는, 폐비 논의가 시작되던 무렵 승정원에서 다음 경연에 읽을 책으로 사서와 《대학연의》를 추천했는데, 성종이 이를 듣지 않고 굳이 《소학》을 주장한 이유에 대해,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을 치국의 전제 조건으로 삼은 《대학연의》보다 ‘교화’를 주장하는 《소학》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기 더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대학연의》의 정신에 따르자면 부부 불화의 일차적 책임은 성종에게 있다. 수신이 이뤄지지 않아 제가에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소학》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문제의 원인을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중궁 탓으로 돌릴 수 있다. ---p. 94 《소학》에 대한 관심 표명은 당시 “재능과 학문이 으뜸”이라 인정받던 김종직에게 성종이 이미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하며,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를 이제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성종은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거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키웠다. ---p. 99 연산군-춘추 그 남자, ‘춘추필법’에 무릎 꿇다 연산군은 《춘추》를 강하자는 참찬관의 말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춘추》의 의리를 알지 못하면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심을 결단하는 데 있어 미혹되지 않는 자 드물다 했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동궁 시절《춘추》를 읽기는 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으니 재독한다면 반드시 소득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연산군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흔쾌히 선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p. 115 “사관은 틀림없이 내가 어진 정치를 하지 않았다고 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풍습은 고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며 숙청의 칼을 휘두르던 연산. 만일 그가 그 밤 술김에《춘추》를 당하다 폐하지 않고, 정좌한 채 책이 담고 있는 춘추대의를 마음에 새겼더라면 역사 속에 그처럼 흉측한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p. 126 선조-주역 “만고길흉의 이치가 이 책 속에 다 있으니…” 선조는 강의 첫날 《주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만고길흉이 모두 이 《주역》에서 나오니, 그 이치의 신묘함은 무어라 다 말할 수 없겠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만고길흉의 이치를 알고 싶은 마음, 그래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싶은 욕망이 선조의 손에 이 책을 쥐어주었던 것 같다. ---p. 146~147 선조가 《주역》만 읽자, 이를 비난하며 다른 책을 권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그러자 선조는 “《주역》은 그 용도가 한이 없지만 학자들의 마음 다스리는 일도 말한다면 사서四書만 못한 듯하다. 그러나 사물에 접응할 때 어찌 역학만한 것이 있겠는가.”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말에서도 선조가 《주역》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음 다스리는 일”이 아니라 “사물에 접응하는 역학”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p. 148 효종-심경 북벌만 가능하다면… 정치적 도구로 선택된 ‘마음의 경전’ 효종과 송시열은 효종 치세 내내 왕권과 신권의 치열한 대결을 펼치는데, 이때 이들 사이에 흥미로운 책 한 권이 등장한다. 효종 1년 10월 10일 《효종실록》에 등장하는 《심경》이 바로 그 책이다. 효종은 이날 야대에서 《심경》을 공부했는데, 이 책을 임금이 정식 경연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다. ---p. 159 사실 효종에게 《심경》은 일종의 정치적 도구였다. 북벌이 가능하다 믿었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 생각했던 효종에게 ‘마음의 경전’이 눈에 들어왔을 리 없다. 산림들의 정치적 협조를 얻기 위해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을 뿐 ‘마음의 경전’을 마음으로 읽지는 않았다. 어쩌면 경연 시간마다 마음 공부만을 강조하는 산림들의 말에 넌더리를 쳤을지 모르는 일이다. ---p. 172 영조-예기 노회한 왕, 옛 글을 읊조리며 눈물을 쏟다 영조는 《예기》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선왕인 경종이 읽다가 끝내지 못한 부분이라며 눈물을 머금었다. 경종에 대한 사모와 애도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배가 다르긴 해도 형이니 애도의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러나 영조가 경종 독살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 휘둘린 이복형제들 사이의 목숨 건 왕권투쟁을 기억한다면, 그 눈물의 의미가 그다지 순수하게 읽히지 않을 것이다, ---p. 177~178 같은 해 10월 18일에는 《예기》증자문편을 읽다가, ‘임금이 죽고 세자가 탄생하였다.’는 대목에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며 처연해하다가 결국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는 기록도 있다. ---p. 187 정조-서경 야심 많은 학자 왕, 요순을 개혁 군주로 재해석하다 정조는 국왕 중심의 강력한 국가를 꿈꾸었다. 뭇별이 북극성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처럼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가 바로잡히고, 잘잘못의 판명자이자 정치세력의 중재자로서 국왕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것을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 그 이상적 모델을 정조는 《서경》에서 찾았다. ---p. 212 학문적 능력이 탁월했던 정조는 《서경》을 재해석했다. 정조가 본 요순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국왕이 아니라, 정치의 한가운데서 나라의 중심을 세웠던 정치가였다. 폭넓은 재량권을 가진 능동적인 개혁 정치가였다. ---p. 213 고종-효경·조선책략 난세 돌파구를 책 속에서 찾았으나… 제왕학의 첫 번째 교재로 《효경》을 읽어야 했고, 즉위 당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 ‘효’였다. 더구나 자신을 왕위에 앉혀준 아버지였다. 그런 고종이 아버지와 치열한 세력 다툼 끝에 결국 아버지를 몰아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p. 233~234 고종은 《조선책략》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음을 설득했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조야를 뒤덮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이최응은 “구미 제국과 국교를 체결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좌의정 김병국과 함께 개화정책을 지지하고 나섰다. 반면 영남 유생들을 필두로 한 척화파들은 만인소 운동까지 벌이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p. 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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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이방원이 분노와 울분의 나날을 보내던 무렵, 개국공신 조준이 “이 책을 읽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며 한 권의 책을 건넸다. 《대학연의》였다. 이것이 전의를 일깨우는 원동력이 되었을까. 정도전을 비롯한 반대파를 제압한 그는 마침내 왕좌를 차지했고 《대학연의》에서 터득한 통치술로 왕권주의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동하는 도중에도 이 책을 읽었다는 그는 제왕학의 교재로,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하는 도구로 《대학연의》를 사용하며 일생 동안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제왕들이 그 책을 손에 잡은 이유 고려 제4대 왕 광종. 두 형을 무력으로 제치고 왕위에 오른 그가 《정관정요》를 처음 손에 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즉위 직후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는 재앙이 발생했을 때 “덕을 닦음만한 것이 없다”는 조언에 따라 펼쳐들게 된 책이 《정관정요》였다. 당나라 사관史官 오긍이 당 태종의 치세를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이 책은 광종에게 뜻밖의 소득을 가져다주었다.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마저 폐위한 뒤 황제에 오르고도 후세에 성군으로 칭송받는 당 태종을 보며 그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당 태종은 나보다 더했다. 그런데도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고 있다. 나도 당 태종처럼 정치를 잘하면 될 것 아닌가.” 광종은 책에서 배운 그대로 독자적 연호를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강력한 왕권주의자로 거듭났다. 광종 치세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도입도 《정관정요》를 읽으며 구상한 개혁 정책들 중 하나였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가장 훌륭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다’라는 데카르트의 전언을 행동으로 먼저 실천한 이는 호학의 군주 세종이었다. “무릇 잘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치세와 난세의 발자취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요, 그 발자취를 돌아보려면 오직 역사의 기록들을 상고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세종은 역사와 역사서의 가치를 정확하게 꿰뚫은 왕이었다. 그랬기에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총 294권에 이르는 《자치통감》을 다 읽었고 《자치통감훈의》라는 해설서까지 펴내도록 지시했다. 매일 밤 그 초고를 친히 교정할 정도로 애정을 보이면서 그는 사서史書에 기록된 제도와 문화를 당대에 적용하려 애썼다. 세종대에 유독 많은 문물이 개발된 것은 왕의 이 같은 열정 덕이었다. 세종에게 《자치통감》은 정치 교재이며, 실전 경험을 전해주는 실용서였고, 역사 연구의 전범이었던 셈이다. 똑똑한 왕들은 고전을 재해석하고, 이를 매개로 정적들과 불꽃 튀는 권력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성종은 거듭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초학의 글’로 인식되어온 《소학》을 경연 과목에 넣었다. ‘교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책이야말로 종신토록 되뇌며 행하여야 한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성종에게 《소학》은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재야에 묻혀 살며 《소학》의 실천적 덕목을 제일의 가치로 여겼던 사림파, 그들을 중앙 무대로 끌어들여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겠다는 심중의 계산이 《소학》 강독으로 표면화된 것이다. 야심 많은 학자 왕 정조도 마찬가지였다. 극심한 당쟁 속에서 아버지 사도세자까지 잃은 정조는 《서경》에 나오는 요순 임금을 개혁 군주로 재해석해 자신의 역할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노론은 정조의 견해에 끊임없이 반발했고 평화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웠던 그들의 관계는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책은 종종 제왕에게 정치적 도구로도 이용되었다.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 《예기》를 읊조리며 수차례나 눈물을 흘리는 촌극을 연출했다. 자신에게 씌워진 경종 독살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즉 ‘악어의 눈물’이었다. 연산군은 역사 평가의 엄중함을 말하는 책 《춘추》를 손에 들고 “사관은 틀림없이 내가 어진 정치를 하지 않았다고 쓸 것이나…”라고 하소연했지만 결국 ‘춘추대의’에 무릎 꿇은 꼴이 되고 말았다. 효종은 북벌이라는 필생의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마음의 경전’인 《심경》을 선택했다. 조광조 이래 사림들이 임금에게 그토록 읽히고자 했던 책 《심경》을 효종이 경연 과목으로 채택한 이유는 단 하나,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북벌을 감행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걸 양보하며 산림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효종은 송시열과의 기해독대 직후 갑작스레 사망했고, 고독하게 밀어붙였던 북벌의 꿈도 함께 스러졌다. 성공하고 싶은 자 책을 찾고, 책은 위대한 인간을 탄생시킨다 《제왕의 책》에 등장하는 우리 역사 속 국왕은 모두 열 명. 서로 다른 상황과 필요에 의해 책을 선택하고, 그것이 왕의 통치 스타일은 물론 당대의 가파른 국면들과 맞물리는 장면을 읽다보면 지금껏 피상적으로 알던 역사는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곁으로 찾아온다. 어디 제왕뿐이겠는가. 인생의 여러 고비에서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고 싶은 사람들은 절절한 마음으로 책을 손에 잡았고, 책은 위대한 인간을 탄생시켰다. 《제왕의 책》은 바로 그 진리를 역사 속 제왕들의 이야기를 빌려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