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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경제학은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을 구한 경제학자 13인의 가상 좌담 1.조선 최고의 관료 경제 이론가, 김육 백성의 생업 안정을 통한 국가 경제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다 2.시장과 상업 활동의 자유를 옹호한 관료 경제학자, 채제공 신해통공을 이끌어 조선의 상업 발전에 큰 물꼬를 트다 3.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이자 경제학자, 빙허각 이씨 가계 경영 능력이 국가 경제의 뿌리임을 밝히다 4.지리경제학의 개척자, 이중환 전국을 돌며 사회 양극화와 지역 불균형의 해법을 찾다 5.중상주의 학파의 브레인, 박제가 조선이 나아갈 길은 북학과 중상주의임을 밝히다 6.중농주의 경제학의 대부, 유형원 토지 개혁만이 부국강병의 지름길임을 주장하다 7.중상주의 학파의 개척자, 유수원 맬서스 <인구론>의 맹점을 60년 앞서 비판하다 8.18세기 조선 실학과 경제학의 거두, 이익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 체제를 꿈꾸다 9.양반 사대부 출신 대상인, 이지함 조선 최초로 중상주의를 통해 부국을 지향하다 10.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오랑캐라도 섬기고 배워야 한다 11.농업과 일상의 경제학을 완성한 학자, 서유구 널리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모아 <임원경제지>를 펴내다. 12.중농주의 경제학을 집대성한 학자, 정약용 토지 공유와 경자유전의 원리를 가장 합리적으로 밝히다. 13.근대 개화파 경제학의 창시자, 박규수 통상 개화를 통한 자주적 부국의 길을 밝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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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역사에도 백성의 삶을 고민했던 경제학자들이 있었다!
오직 민생과 부국만을 치열하게 고민했던 조선 경제학자 13인의 삶과 사상을 만난다! 조선을 지배했던 성리학은 인간의 최고 가치를 정신적 삶에 대한 추구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 책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부국안민과 부국강병을 위해서라면 물질생활의 가치가 정신적인 삶의 가치보다 더 우선해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 조선의 경제학자들은 봉건 체제 내부의 경제 현상은 물론, 17~18세기 이후 곳곳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던 시장 및 상품 화폐 경제, 즉 근대적인 경제 현상과 징후들을 분석하고 발전 경로를 밝히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서는《택리지》를 저술한 청담 이중환은 최근 경제학에서 각광받고 있는 ‘지리경제학의 개척자’로, 《토정비결》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토정 이지함은 ‘조선사 최초의 양반 사대부 출신 상인이자 중상주의 경제학의 선구자’로 재해석되어 독자들과 만나게 된다. 또한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관료들 중에서도 독창적인 사상과 이론을 갖춘 ‘관료 경제학자’를 찾아냈는데, 대동법을 시행한 잠곡 김육은 민생을 왕권보다 더 우선하는 가치로 여겼던 ‘분배론의 경제학자’로, 그리고 정조 시대 개혁을 지휘한 남인의 영수 번암 채제공은 시장과 상업 활동의 자유를 옹호한 ‘시장주의 경제학자’로 자리매김했다. 농암 유수원은 ‘인구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진 허점을 270여 년 전에 이미 정확하게 비판했다. 그의 경제학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동안 서양의 경제이론과 사상에 치우쳐 있다가 보니 우리 것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지식 불균형’ 상태에 있었다는 필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문 중에서 18세기 경제학자들에게서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구한다! 과연 누가, 어떻게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릴 것인가?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화려한 청사진들이 등장하고 있다. 누가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FTA 문제를 해결하고 어떻게 서민들의 박탈감을 더하는 부동산 문제를 풀 것인지에 대해 각 당에서 여러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과연 누가, 어떻게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박규수 지금 우리 후손들의 상황을 보면, ‘쇄국’과 ‘개국’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다퉜던 그때 상황이 떠오릅니다. 쇄국을 고집하다가 외세의 강압과 무력에 굴복한 개항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때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개국을 해서 일찍부터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틀을 다졌다면 조선이 그토록 허망하게 몰락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FTA를 하더라도 외부의 힘이나 상황에 떠밀려 하는 것은 쇄국만큼이나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주적이고 주체적으로 FTA에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FTA를 추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세계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유형원 농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루고 농민이 대다수였던 우리 시대와는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졌으니까, 무작정 농업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농업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외국 농산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 체제가 된다면, 결코 산업 발전이나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에너지’ 안보 못지않게 ‘식량’ 안보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농업을 희생양 삼아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외국 농산물의 공세 앞에 국내 농업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정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박지원 저도 유형원 선생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비록 대외개방과 통상무역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하더라도,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어느 한쪽이 이익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농업과 상업, 그리고 공업 모두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경제 체제 아닐까요? 물론 우선순위는 있겠지요. 그러나 공업이 농업을 희생양으로 삼고, 상업이 공업을 희생양 삼아 발전하는 경제라면 과연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요? 그런 점에서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느 한곳도 희생당하지 않고 경쟁력을 갖춰서, FTA 체제 하에서도 농공상이 모두 균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제이론과 정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조선을 구한 경제학자 13인의 가상 좌담(본문 중에서) 역사의 강을 면면히 흘러내려온 중상주의와 중농주의의 흐름! 갑오농민전쟁은 중농주의를, 갑신정변은 중상주의를 이은 혁명이었다! 18세기에 경제학의 양축을 이룬 것은 중농주의 학파와 중상주의 학파였다. 이 책에서는 유형원→이익→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중농주의 학파의 사상과 이론이 19세기 후반 ‘아래로부터의 농민(토지) 혁명’을 통해 근대화를 모색한 전봉준과 김개남의 갑오농민군으로 계승되었고, 이지함→유수원→박지원→박제가→박규수로 이어지는 중상주의 학파의 계보는 ‘위로부터의 정치 혁명’을 통해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했던 개화 독립당(개화파)으로 계승되었음을 밝혔다. 강진 지방의 야사에 의하면 정약용의 저서로서 현행본 《경세유표》 이외에 별본이 있었던 것 같다. 《강진읍지》 <명승초의전名僧草衣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초의는 정다산의 시우(詩友)일 뿐 아니라 학문적 동지이다. 다산이 유배지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경세유표》를 밀실에서 저작하여 그의 문하생 이청(李晴)과 초의에게 주서 비밀히 보관, 전포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전문은 중간에 유실되었고, 그 일부는 그 후 대원군에게 박해당한 남상교, 남종삼 부자 및 홍봉주 등에게 전해졌고, 그 일부는 그 후 강진의 윤세환, 윤세현, 김병태, 강운백 등과 해남의 주정호, 김도일 등을 통해 갑오년에 기병한 전녹두(전봉준), 김개남의 수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이용하였다. (갑오) 전쟁 끝에 관군은 정다산 비결이 전봉준 일파의 비적을 선동하였다 하여 정다산의 유배지 부근의 민가와 고성사, 백련사, 대둔사 등 사찰들을 수색한 일까지 있었다. -정약용이 갑오농민전쟁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의(본문 중에서) 그러면 당시(갑신정변)의 혁명가에게 이러한 신사상이 감염되게 된 경로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춘고(박영효)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신사상은 내 일가 박규수 집 사랑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내 백형(필자 왈. 백형이라 함은 영교를 가리킴이다)하고 재동 박규수 집 사랑에 모였지요.”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이유원이 영의정이었을 때 우의정으로 있다가 이유원(李裕元)과 불합하여 괘관(卦冠 사직)하고, 재동 집에 있어서 김옥균 등 영준한 청년들을 모아놓고 조부 《연암문집》을 강의도 하고 중화 사신들이 들고 오는 신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 하고 춘고(박영효)는 당시 신사상이란 것이 평등론, 민권론이란 것을 말했다. -박규수가 갑신정변에 미친 영향에 대한 박영효의 발언(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