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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 강화와 기독교 2. 기독교와 선천 부록―민족의 영산, 강화 마리산 발간사 _전국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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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한국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은 좋은 토양에 뿌리 없이 자란 허약한 나무와 같다. 그런데 강화와 선천교회는 한국의 좋은 토양에 깊이 뿌리내린 교회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토착’이란 말을 잘 쓰지 않는 대신 ‘토박이’란 말을 즐겨 쓴다. 왜냐하면 ‘토착신앙’이나 ‘토착신학’은 외국의 어떤 종교가 다른 나라에 전해져서 그 나라의 풍토와 역사 위에 정착됨으로써 ‘화민성속(化民成俗)’이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토박이 신앙’이나 ‘토박이 신학’은 화민성속에만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개물성무(開物成務)’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토박이 신앙’이나 ‘토박이 신학’은 그 나라의 풍토와 토양과 역사 속에 깊이 뿌리를 박음으로써 그 민족을 변화시켜 새로운 풍속과 역사를 이룩할 뿐 아니라, 그 민족이 개물(開物), 즉 본래 받은 바 하느님의 형상을 열어 밝히고, 성무(成務), 즉 본래 맡은 바 임무와 일을 이룩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착’과 ‘토박이’는 질적으로 다르다. 내가 ‘토박이’라는 말을 더 즐겨 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리말」중에서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후 빨리 뿌리를 내리게 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본다. 국난을 당하는 경우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호국정신, 빨리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개화되어야 한다는 근대화정신,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하느님 숭배의 신앙정신 등 세 자기 성품이 한국인에게는 있는데, 기독교는 이것을 잘 이용함으로써 빨리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인은 당시 한국인의 공통된 성품이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중략) 강화 사람들의 마음 밭은 성서의 옥토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달리 호국정신·근대화정신·하느님 숭배의 신앙정신이 철저했기 때문이다. 강화인들의 마음 밭은 가히 옥토에 비길 수 있으리만큼 비옥했기 때문에 복음의 씨알이 빨리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화와 기독교」중에서 우리나라 초대 교인들은 예수를 믿은 후 그 아들의 이름을 다윗, 사무엘, 요셉, 요한 등 성경 인물의 이름을 따서 대위(大爲), 삼열(三悅), 요섭(堯燮), 요한(堯翰) 등으로 이름을 짓는 예가 있었고, 이름이 없는 여아들에게는 마리아, 에스더, 뵈배, 나오미 등 세례명을 지어주는 예는 있었지만 한 교회 한 동네 교인들이 다 같이 하나가 된다는 뜻에서 일(一) 자 돌림으로 이름을 바꾸는 예는 없었다. 그런데 강화 교인들은 일(一) 자만 아니라 신(信) 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었다. (중략) 우리는 여기서 강화 기독교인들의 강한 공동체 의식?주체의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처남의 이름까지 일(一) 자로 통일시켰는데, 이는 같은 글자로 부자간의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고래 관습으로 보아 당시로선 문중에서 완전히 추방당할 만한 반역 행위였으며, 사회적으로는 하나의 혁명 행위가 틀림없었다. ---「강화와 기독교」중에서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한 사회학 교수 브루너 박사의 1920년대 조사 보고에 의하면 “일본 교회는 대부분이 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한국 교회는 73퍼센트가 농촌에 있다”고 분석했으며, 따라서 농촌 교회의 교세는 영?호남 지방과 중앙 지방보다 관서?관북 지방에서 더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의 특징은 도시보다 농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정반대로 농촌 교회는 아주 약해지고 도시 교회의 비대화 현상을 보게 되어 실로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유독 강화에서만은 지금도 농촌 교회가 건재해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교회의 뿌리가 강화 토박이들에게 심어져 있고, 교회의 발전이 어떤 선교사에 의하여 위에서부터가 아니라 한국 토박이들에 의하여 아래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강화와 기독교」중에서 선천은 하나의 조그만 읍촌에 지나지 않았다. 의주보다 작은 고을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받아들인 연대도 의주보다 훨씬 뒤진다. 황해도 소래 지방보다도 훨씬 뒤진다. 그럼에도 선천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란 말까지 듣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첫째로 선천을 평북 지방의 선교 본거지로 택했기 때문이며, 둘째로 소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썼기 때문이며, 셋째로 그 지방 사람이 잘 응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말을 한다.(중략) 나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수긍할 수 없다. 관서지방 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교사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교사들이 잘했다 해도 그 지방 토박이들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농부가 좋은 씨를 뿌렸다 해도 그 밭이 옥토가 아니면 그 씨는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관서지방은 가히 옥토라 할 수 있는 고장이었다. 또한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벌써 복음의 씨가 그 지방 토박이들의 힘에 의해 뿌려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와 선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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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택부 선생에게 다시 듣는 ‘토박이 정신’
-드러나지 않은 올곧은 삶과 깊은 신앙의 생명력 《토박이 신앙산맥》전3권이 모두 간행되었다. 이번에 펴낸 3권에서는, 강화도와 선천 지역에 복음이 뿌리내린 과정을 통해 토박이 신앙의 또 다른 단면을 소개하고,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기에 신앙 선배들이 하나님과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으로 헌신한 자취를 돌아보았다. 1권에서 조선 말 신분 사회 해체기의 양상과 맞물려 기독교가 뿌리내려간 과정에서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고, 2권에서 상동파(尙洞派)의 역사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 및 북간도와 러시아?제주도로 뻗어간 신앙 산맥의 자취를 살폈다면, 3권에서는 강화도와 선천을 중점적으로 조명하며 이들 지역에서 기독교의 궤적이 다른 곳들과 두드러진 차이를 그려가게 된 이면을 심층적으로 파헤쳤다. 1, 2권에서도 볼 수 있듯이 3권의‘강화와 기독교'에서는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를 찾기 위한 저자의 특별한 소명의식과 집요한 모습이 현장답사와 인터뷰 및 자료 조사 과정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진다. 《토박이 신앙산맥》(전3권)은‘우리 시대의 어른’전택부 선생(1915-2008)이 남긴 많은 저작물 가운데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민초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뿌리내려 간 신앙의 자취를 짚은 것이다. 저자에게는 한국 교회와 신학의 토착화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뿌리를 찾기 위한 간절한 바람이 담긴 결과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근대화와 산업화에 중요한 축을 담당하며 자리 매김되어 왔음에도‘좋은 토양 속에 뿌리 없이 자란’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저자는 한국 기독교의 흐름 가운데 깊이 뿌리내린 교회와 교인들의 지렛대 역할을 한‘토박이 신앙’의 맥과 줄기를 찾아내고 정리했다. 바로 이 점이 《토박이 신앙산맥》이 지닌 보석 같은 가치라 하겠다. 왜 토박이 신앙인가? -토박이 선비정신 없이는 올바른 예수쟁이가 될 수 없다 1권 머리말에서 저자는 일종의 역사수필인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를“우리 주변의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이 유린당하고, 엉뚱한 사람들이 교계에서 출세하며, 애국적이며 선량한 신앙인들이 무시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들이 사회의 주역으로 군림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어서”라고 했다. 아무 가치 없다고 여겨져 내버려지고 잊힌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서 믿음의 뿌리와 의미를 찾아내는 것에 그는 각별한 소명의식을 갖고 임했으며, 이 책이 진정 한국 기독교회의 사도행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또한 저자는 “‘토박이’는 진정 나의 사관이요, 주장”이라고 했다. 우리 민족의‘한(韓)’ 정신의 실체와 핵심을 분석하고 정리하면서, 그는 우리를 진정 우리답게 하는 것들이 잊히고 왜곡되고 버려진 현실을 질타하며, 우리 심층에 내재된 토박이 정신을 거울삼아 한국 교회의 맹성(猛省)을 촉구한다. 책 들여다보기 ‘머리말’에서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전도 구역인 강화와 선천을 다루게 된 까닭을 언급하고, 《토박이 신앙산맥》 1권이 간행된 1977년부터 3권이 씌어지기까지 약 6년에 걸친 작업의 의의와 성과, 아쉬운 점 등을 피력했다. 이 책의 핵심 주제와 거리가 있는 듯한 강화 마니산 관련 글들을 부록에 싣는 취지도 밝혔다. 1. ‘강화와 기독교’에서는 강화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기독교가 강화에 전래된 시기와 전래자, 전래 과정과 전래 당시의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강화 전도의 개척자이자 교산리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김상임(金商壬)의 삶과 신앙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다루었다. 이어지는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ㄱ. 감리교가 대종을 이루는 강화 기독교의 교세 현황과 교회 성장의 원인 기독교가 전래된 후 빨리 뿌리내리게 된 세 가지 요인―호국정신, 근대화정신, 하느님 숭배의 신앙 정신―이 강화 사람들에게 철저하여 복음의 씨알이 빨리 뿌리내리고 성장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ㄴ. 강화에 학교들이 세워진 과정과 이 학교들이 3?1운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국권쇠락과 부흥운동이 함께 일어나 민족사와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대인 1907년, 강화도에 는 이동휘의 영향으로 73곳의 학교가 세워진바, 이는 기독교 신앙과 호국과 근대화 정신을 토대로 한 것이다. 3?1 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한 황도문(黃道文)의 활약상이 집중 조명된다. ㄷ. ‘기독교 신앙과 단군 신앙의 공존’을 보여 주는 특이한 지역 강화도 단군 때부터 하나님께 제사 지내던 마리산(오늘날의 ‘마니산’)에서 기독교 신앙운동이 일어난 과정을 추적했다. 1910년경-1950년경까지, 사도시대의 행적을 재현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각종 기 사와 이적이 일어나는 등 ‘오순절의 재판(再版)’이라 일컬어지는 마리산 부흥회의 역사를 소개하고, 강화도의 천제(天祭) 풍속이 구약성경의 제사법과 흡사함을 13가지 항목에 걸쳐 지적한 점은 매우 이채롭다. 나아가 우리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의 유사한 풍속, 습관들 55가지를 인용하여 소개 했다. ㄹ. 한국 초창기 신학 교육의 내용과 양상 서구 신학이 어떻게 우리말과 글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토착화 과정을 거쳐 왔는지 돌아본다. ㅁ. 강화 사람들의 강한 공동체의식과 주체의식 이 지역 초대 교인들이 ‘예수 믿고 다 같이 하나가 되자’는 뜻에서 한 일(一) 자, 믿을 신 (信) 자 돌림으로 이름을 바꾼 예를 통해 지명을 기독교 정신에 따라 고치기도 했고, 사람 이 름의 돌림자를 통일시킨 것은 강화 기독교의 특색인 동시에 한국 교회의 자랑임을 설파했다. 끝으로 저자는 한국 교회의 특징이 도시보다 농촌에서 찾아지지만 오늘날에는 정반대 현상을 나타내는 현실을 지적하며, 농촌 교회가 건재한 강화의 현상을 ‘교회의 뿌리가 토박이들에게 심어져 있고, 교회의 발전이 토박이들에 의해 아래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진단한다. 2. ‘기독교와 선천’에서는, 1890년대 인구 3천 명 정도에 불과한 평안북도의 한 작은 마을인 선천읍이 이른바 ‘힌국의 예루살렘’, ‘한국의 에든버러’라고 불린 경위와 원인을 추적한다. 선천에는 1896년 휘트모어 선교사가 처음으로 입주했고, 1901년 선천 선교본부가 개설되었으며, 2년 뒤에는 선천읍민의 10퍼센트가량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최초의 교회인 북교회(1897)가 세워진 뒤 35년 사이에 남교회, 중앙교회, 동교회 등의 교회가 세워져, 이미 1929년에 통계에는 한국 선교구 중 교인이 제일 많은 선교구가 되었다. 저자는 이런 일련의 과정 이면에 선천뿐만 아니라 관서지방에 선교사들이 없었을 때 토박이 신자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교회가 세워졌으며 복음의 씨가 뿌려진 점에 주목한다. 이어지는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ㄱ. 수양동우회 사건(1937)과 직결되는 선천교회의 싸움 북교회 당회장 백영엽 목사가 천거한 사람이 평북노회 목사 후보에서 떨어진 것이 발단인 이 싸움 이 수습되는 과정을 통해, 내분으로 보이는 이 싸움에도 뚜렷한 대의명분과 교회에 대한 순수 함이 있고 열정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싸움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법과 질서가, 신사도와 결투정신 이 있었으며 비겁하고 용렬한 태도가 없었던 점과, 수습하는 노회도 차원 높은 권위와 슬기로 임했 음을 보여 준다. ㄴ. 신사참배 선천교회는 신사참배에 강경한 입장은 아니었다. 8?15 해방 이후 참회 운동이 일어, 평북노회와 인근 6개 노회 소속 교회가 연합해서 ‘신사참배를 통회?자복하는 수양회’를 갖고자 결의하고 실행 에 옮긴 과정이 소개되며, 장소를 제공한 김성준 장로와 그의 부친 김영례 씨 이야기를 통해 저자 는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았지만 역사에서 무시되거나 사라지질기 쉬운 사람, 그가 아니었더라면 위 대한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사람을 조명하는 것이 ‘토박이 신앙산맥’의 핵심 취지임을 다시 강조한다. ㄷ. 대공(對共) 투쟁 선천교회가 낳은 뛰어난 반공 투사 김익준 장로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김익준 장로가 신 성학교 동창들과 ‘신성대(信聖隊)’를 조직하여 치안을 담당하게 했고, 일본에 함께 대항한 소련 군 측에 장비와 보급에 관련하여 정당한 주장을 했으며,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 소련으로 뽑혀 갈 뻔했던 이야기 등이 소개된다. ㄹ. 8.15 해방 직후 선천과 의주 등지에서 있었던 두드러진 기독교 운동 순 기독교 신앙운동의 예로 신사참배 통회 자복 기도회와 이북5도 연합노회를, 기독교 정치사회운 동의 예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소개한다. 105인 사건(1911)으로 기소된 105인 중에서 신성학 교(1906년 창설) 관계 인사 32명의 명단을 소개하며, 창설 초기부터 전도와 선교열이 뜨거웠던 신성학교가 왜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 대상이 되었는지를 추적했다. 선천교회가 낳은 독립투사 가운 데에도 신성학교 관계 인사가 대종을 이루며, 광주학생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때에도 신성학교 출 신의 많은 사람들이 관계되었다. ㅁ. 선천교회가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위대한 공헌-해외 선교 방효원 목사와 방지일 목사 부자(父子), 주현칙 의사(의료봉사) 등의 산동 지방 선교를 소개하며, 이들 선교가 우리 동포가 아닌 토박이 중국인 상대의 외지 선교였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3. ‘부록’에서는, 1990년 3월‘마리산 이름 되찾기 국민대회’ 때 발표된 각계 학자 7명의 글을 실었다. 현재 통용되는 ‘마니산’의 원래 이름이 ‘마리산’이며, 조선 중기 이후 잘못 불리기 시작한 이 이름이 오늘날까지 굳어지고, 원래 이름을 되찾기 위한 많은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 과정 등을 밝힌 글들을 통해 강화 기독교와 마리산의 깊은 역사적 관계를 밝힘으로써 강화도가 ‘우리 기독교 신앙과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의 공존지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