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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들어가는 말 1. 붓다의 가르침 2. 선종禪宗, 혜능慧能의 종교 3. 날조된 정통성, 전등법계설 4. 무질서하게 수용된 중국 불교 5. 반야와 불성의 기반 위에 세운 선종禪宗 6. 진짜 육조六祖, 신수神秀 7. 신회神會의 환부역조換父易祖 8. 《단경壇經》, 남이 쓴 자서전 9. 여래선, 요행으로 얻는 반쪽 수행법 10. 잔혹한 현실의 피난처 11. 오래 하면 알게 되는 조사선祖師禪 12. 싸마타로 세운 조사선祖師禪 13. 《무문관無門關》을 보는 까닭은 禪 宗 無 門 關 습암의 서문習菴 序 표문表文 무문혜개의 서문自序 불조기연 사십팔칙 목록佛祖機緣四十八則目錄 無 門 關 1. 조주의 무자 제1부. 싸마타를 말하여 자성을 보이다 2. 안심시켜 주다 3. 찰간을 넘어뜨리다 4. 선도 악도 생각 말고 5. 삼좌가 설법하다 6. 용담을 사모하다 7. 그는 누구인가? 8. 외도가 세존께 묻다 9. 파초의 주장자 10. 수산의 죽비 11. 세존, 꽃을 드시다 12. 손가락을 세우다 13. 뜰 앞의 잣나무 14. 운문의 똥막대기 15. 동산의 마 세 근 16. 소가 창틀을 넘다 17. 해중의 수레 만들기 제2부. 무분별한 자성을 보이다 18. 동산의 방망이질 19. 달마는 수염이 없다 20. 여인을 삼매에서 깨우다 21. 천녀의 혼이 나가다 22. 대통지승불 23. 잘못 말하다 24. 조주가 노파를 간파하다 25. 조주가 암주를 간파하다 26. 두 스님이 발을 걷어올리다 27. 남전, 고양이를 베다 28. 물병을 걷어 차 버리다 29. 국사가 세 번 부르다 30. 도솔의 세 관문 31. 청세의 가난 32. 서암이 주인공을 부르다 제3부. 그대로의 마음을 보이다 33. 열반으로 가는 한 길 34. 더 나아가라 35. 큰 힘을 갖춘 사람 36.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37. 이 마음이 바로 부처 38. 평상심이 도道 39.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40. 마음이나 부처가 아니다 41. 향엄, 나무에 오르다 42. 말을 끊고서 43. 길에서 도에 이른 이를 만나면 44. 덕산의 탁발 45. 종소리 울리면 46. 발우를 씻어라 47. 백장과 여우 48. 앎은 도가 아니다 무문혜개의 발문跋文 무문관 불조 법계도 참고하고 인용한 책들 |
無山本覺,본명:이 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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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천 년 불교의 영적 자산을 읽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되는 용어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출전인 <무문관>은 본격적인 간화선 공안집으로, <벽암록>, <종용록>과 더불어 불교계의 대표적인 수행 텍스트이다. 총 48개의 역사적인 핵심 화두가 가진 간결함과 언어의 명료함으로 오늘날 ‘선서禪書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는데, <무문관 강설>은 이 48개 화두의 참뜻과 한계를 번갯불처럼 꿰뚫어 2천 년 불교의 영적 자산을 그대로 보이면서 선불교의 근본 문제를 조목조목 짚고 있다. <무문관 강설>은 동양사상과 불교, 명상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텍스트인 <무문관>의 깊이와 넓이를 확실히 잰 책이라 할 만하다. 2. 지금껏 무비판의 영역에 있던 선禪의 역사적 한계와 문제점을 읽는다 <무문관 강설>은 단순히 <무문관>이라는 불교 고전해설서가 아니다. 오늘날까지 한국불교계가 당연시 해온 화두 수행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열어 보일 뿐만 아니라 삶의 고뇌를 해결하는 진정한 방법을 뿌리부터 드러내어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불교계에서는 선禪을 일러,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경전의 가르침 밖에서[敎外別傳],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直指人心], 자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見性成佛]”고 해서, 스승이 곧바로 제자의 마음을 가리켜 제자로 하여금 스스로의 자성을 보게 하여 깨닫게 한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화두는 ‘제자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킨’ 극적인 이야기로, 스승은 <유마경>에 나오는 유마거사처럼 묵묵히 앉아 있음으로써 답을 대신하거나[良久], 방망이질을 하거나[棒], 악을 쓰거나[喝], 손가락을 세워[竪指] 보이는 것으로 제자의 깨달음을 유도했다. 그러나 <무문관 강설>은 이런 선불교의 수행법과 깨달음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1) 이른바 선의 목적이 “참 나를 아는 것”이라거나, “자성自性 ? 불성佛性을 자각하는 것”이라는 육조혜능 이래 지금까지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먼저 ‘참 나’를 알고, 그 경계에서 더 나아가 싸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아 인식의 청정을 성취하여 해탈을 이룬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2) 선사들이 주장하는 대로 삼매에 들어 일체의 인식상의 분별을 떠나 상대적인 현상계를 벗어나서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적 분별이 사라져 버린 무한 공간에 노닐어 사량분별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이는 단지 우리 인간의 인식 시스템 안에서의 초월적인 변성의식의 인식체험에 불과하다. 이것을 궁극적인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 인식작용에 대한 안타까운 착각에 불과하다. 붓다께서 제시한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究竟]가 아니다. (3) 선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삼매의 경계에 들어가는 사건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것은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열반이나 해탈도, 또한 구경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삼매라는 초월적 변성의식인 마음의 한 경계에 불과할 뿐이다 (4) 지금까지 선사들은 수행자들에게 “어느 때에나, 가거나 ? 머물거나 ? 앉거나 ? 누울 때에 항상 무심無心하기만을 닦아서 오래 하고 또 오래 하다 보면 반드시 진실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고, 역량이 부족하여 단박에 뛰어넘지는 못하더라도 3년, 5년 혹은 10년이 지나서 들어갈 곳을 얻기만 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며,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기연이 맞을 경우 스승의 말 끝에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일상에서 ‘무심하기만을 닦아서’ 생심동념生心動念이 없고, 상相을 벗어나, 인연을 쉬고, 분별망상을 하지 않는 무심에 이른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4) 결론적으로, 선불교에서 말하는 삼매의 경계에서 경험되는 자성청정심 ? 본원청정심이라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적인 변성의식의 상태에서 바라보면 비록 청정한 어떤 무엇을 상정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 일체법의 실상을 여실如實하게 보면, 그것은 단지 찰나생 ? 찰나멸하는 의식현상의 찰나적 결합상을 실재로 착각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무문관 강설>은 오온의 인식과정에서 야기되는 개념화 작업을 진정시키지 않고, 스스로 오염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은 감각적 착각이며 단지 관념적인 자위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단언한다. 자성이니, 불성이니, 진여니, 망심이니 하는 것은 단지 인식주관의 전도망상顚倒妄想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들은 모두 인식과정에서 개념화 작용으로 작위作爲하여 생성시킨 심연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이다. 3. <무문관 강설>, 싸마타와 위빠싸나의 통합 - ‘지관쌍운’의 진정한 복원을 얘기한다 <무문관 강설>은 선禪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인 색色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이라는 오온五蘊의 인식과정 자체의 질적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이와 같은 인식작용의 질적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1) 붓다의 여섯 단계 수행법에 따라 수식數息과 상수常隨를 닦고 다시 싸마타를 닦아 무분별지인 삼매를 성취하고, (2) 깨어 있는 마음으로 일체 대상세계의 실상을 보는 위빠싸나를 닦아 무분별지에서 더 나아가, (3) 싸마타와 위빠싸나를 쌍운雙運하여 일체의 정신적?물질적 대상에 대하여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의 세 가지 특성으로 정사함으로써 ‘세 가지의 청정’을 성취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무분별후득지를 이룰 수 있지만 이 무분별후득지 또한 구경이 아니며, 무분별후득지를 성취한 다음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무문관 강설>은 지적한다. ‘세 가지의 청정’을 성취하고 계속하여 ‘아홉 가지의 명지明知’와 ‘성숙명지’를 닦아, 거스를 수 없이 열반으로 향하는 흐름에 들어간 성자의 지위인 ‘도道와 과果의 명지’를 성취하면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얻게 되며, 여실지견을 얻으면 오온의 인식과정에서 희론戱論을 야기하는 개념화 작용이 진정되어 일체의 물질적 ? 정신적 대상에 대하여 개념이 아닌 실제의 현상(빠라마따. paramattha)을 알아차려 삼라만상의 현전現前을 있는 그대로 청정하고 여여하며 여실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실지견에 이르면 정신적 · 물질적 대상에 취착하게 하는 개념화가 진정됨으로써 일체의 개념적 존재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존재에의 집착을 끊음으로써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을 성취하게 된다고 <무문관 강설>은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종正宗의 붓다의 가르침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중국 선종의 덫, 화두에 치인 한국 불교 그렇다면 왜 선불교는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에서 멀어진 채 이런 근본적인 한계에 갇혀 버렸을까. <무문관 강설>은 중국 선종의 토착화 과정에서 마련된 선禪 수행방법의 성립과정부터 메스를 들이댄다.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 체계가 중국 고유의 문화적 감성과 융합되어 당송 시대에 중국 불교인 선불교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자가당착의 한계를 갖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무문관 강설>은 선禪의 한계와 문제점을 만든 원인으로 두 가지를 짚고 있다. (1) 중국불교는 근본적으로 격의불교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당시 중국의 문화적 수준과 언어문자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유가와 도가적 사고방식에 친숙한 싸마타적인 측면은 받아들였지만 인도 특유의 위빠싸나적인 측면은 수용하지 못했다. (2) 달마와 혜가, 승찬, 도신, 홍인에 이르는 초기 선불교의 개척자들은 모두 반야사상에 기초하여 <능가경>을 전수했는데, 이 <능가경>은 삼계유심의 도리를 중심으로 한 법신상주의 불성사상을 밝히고 있는 여래장계의 경전이다. 이들 반야사상과 불성사상은 모두 싸마타를 통하여 도달되는 삼매의 경계에서 도출되어진 사상들로, 그에 따라 싸마타 불교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뒷날 혜능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위빠싸나를 완전히 제거하고 싸마타만으로 불교 전체를 재해석하여 싸마타의 선종이라는 토착화된 중국 선종의 체계를 완성한다. 온전한 붓다의 수행체계에서 반쪽짜리 수행법만으로 서는 이상한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에 따라 중국 선불교가 정립한 선 수행 즉 화두 수행으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가 정말 어렵게 되어버렸다고 <무문관 강설>은 지적한다. 싸마타와 위빠싸나의 두 가지 수행법으로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과학적인 수행방법을 완성한 붓다의 가르침을, 난해한 고차 방정식으로 둔갑시킨 중국 선종의 덫에 불교계 전체가 천 년 넘게 갇혀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불교계 전체가 선불교적인 한계에 갇혀버린 것일까. 왜 한국 불교는 중국 선종의 한계를 깨고 나오지 못했을까. <무문관 강설>은 이 부분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1) 선불교의 언설이 워낙 현란하고 장대한데다 그 논지 또한 심오한 문자로 되어 있어서, 수행자들이 거대한 통에 빠진 파리처럼 맴돌게 된다. 말 그대로 문 없는 문에 갇힐 수밖에 없다. (2) 전세계에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중국 선종의 간화선이 지배적인 수행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간화선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문화혁명 이후 그 맥이 완전히 끊겨 지금은 겨우 일부분에서 복원하고 있을 뿐이고, 일본에서도 주류의 수행법으로 자리 잡고 있지 못하다. 기타 다른 나라에서는 간화선의 수행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위빠싸나 수행법이 전세계적으로 대표적인 불교수행법으로 평가 받고 실천 수행되고 있다.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간화선의 수행이 불교수행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3) 오랫동안 우리는 중국 불교의 아류로 살아왔다. 비록 원효元曉대사와 같은 빼어난 불교인이 우리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중국 불교의 아류에서 벗어난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다시 일본 학자불교의 아류로 전락하고 있으며, 또 동남아 테라바다(Teravada)의 위빠싸나 불교의 아류가 되려 하고 있다. 5. 지금 <무문관>을 보는 까닭 따라서 <무문관 강설>은 말 그대로 ‘문 없는 문’인 <무문관>을 통해, 그동안 선불교가 주장해온 수행방법의 역사적 성립과정과 한계를 통렬하게 논파한다. 각 화두를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언어 문자’가 얼마나 현란한지, 그리고 그 논지의 정도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밝혀냄으로써, 붓다의 온전한 가르침을 여실히 보여준다. (1) 저자는 이를 위해 <무문관>의 화두 읽기부터 순서를 달리하고 있다. 즉 <무문관>의 48개 화두가 고의적으로 아무런 순차 없이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화두가 제시하는 깨달음의 순서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제1부 ‘싸마타를 말하여 자성을 보이다’에 16개의 화두를, 제2부 ‘무분별한 자성을 보이다’에 15개의 화두를, 제3부 ‘그대로의 마음을 보이다’에 16개의 화두를 정리해서 각 화두마다 강설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조주의 무자’ 화두는 이 전체의 주제 화두로 보아 3부의 앞머리에 두었다. 이 정리된 순차만 해도 선 수행자들에게 상당한 도움이 된다. (2) <무문관 강설>의 앞머리 ‘들어가는 말’에 13개의 글을 통해, 선불교의 성립사와 특징을 요약하고, 붓다의 진정한 수행법 체계를 드러내어 보인다. 이에 대해 저자인 무산본각 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인이 정한 화두의 순서를 허물고, 더욱이 화두에 대하여 설명하여 의심을 해체하는 일은 선가禪家에서 크게 금하는 일이다. 그것은 화두를 설명하여 해석해 버리면 학인으로 하여금 언어에 의한 분별망상을 일으키게 하고, 학인 스스로의 의심을 끊어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선禪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분별적 사유의 길이 끊어진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한다. 그래서 화두를 설명하고 해설하여 의심을 끊는 일은 부처의 종자를 끊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로서 선禪의 체계 안에서 선을 참학하려면, 스승은 마땅히 화두를 해설하여 학인의 의심을 끊어서는 안 되고, 학인은 화두를 분별적 사유로 해석하려 하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 선종의 체계가 아닌 정통적인 붓다의 수행법 체계 안에서 선禪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나는 먼저 정확하고 쉬운 우리말로 화두를 옮기고, 그 화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고, 그 바탕 위에서 붓다의 바른 수행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 이 땅에서, 이 책을 펴내는 뜻이다.” 6. 저자, 무산 본각 선사를 말한다 이와 같이 <무문관 강설>은 ‘화두’ 자체를 깨버리는 혁명적인 책이며, 불교계의 현주소를 냉정히 바라보게 하는 저울대이다. 이 책을 지은 무산 본각 선사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비즈니스맨으로서 무역상사에서 승승장구하여 이란 주재 상사협의회장까지 역임했다가 이란-이라크 전의 참화와 지옥 같은 실상을 접하고 수행의 길을 걸었다. 숭산스님 밑에서 화두수행을 하기도 했던 그는, 1,700 공안을 타파하고도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발견하고, 다시 발심하여 부처님이 가르치신 호흡 공부부터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은 간화선의 수행법이 부처님이 온전하게 가르친 수행법 가운데 싸마타(삼매, 선정) 만을 오로지 수행한 것으로, 그 결과 다른 한짝인 위빠싸나(관조)를 잃어 진정한 깨달음으로 가는 체계적인 수증단계를 잃어버렸다는 점이었다. 싸마타와 위빠싸나의 양 날개를 운용하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을 통해서야 진정한 깨달음의 경지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그는, 붓다가 남긴 정통적인 수행법을 온전히 체계화하여 현재 목포에서 마음닦기 선원을 열어 후인들을 제접하면서, 깨달음의 참된 경지를 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