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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정치 Politics
1장 _ 코뮨주의와 대중 대중, 그 격랑 이는 바다 죽어 있는 대중 │ 개체 이전의 대중 │ 대중의 유체 역학 │ 대중의 반동 │ 대중과 혁명 2장 _ 코뮨주의와 정치 적대의 정치학, 우정의 정치학 국가와 정치학 │ 마르크스주의와 적대의 정치학 │ 우정의 정치학 │ 계급의 정치학과 대중의 정치학 │ ‘전위’와 대중의 문제 3장 _ 코뮨주의와 소유 탈소유의 소유론 코뮨주의와 ‘사적 소유의 철폐’ │ 소유와 소유화 │ 소유와 추방 │ 소유와 국유 │ 프롤레타리아 - 무산자 그리고 무명자 │ 코뮨주의적 소유 2부 주체 Subject 4장 _ 코뮨주의와 특이성 코뮨주의의 존재론 공동체 없는 공동체 │ 특이성이란 무엇인가? │ 특이성과 구성 │ 유기적 구성체와 특이적 구성체 │ 코뮨주의 정치 5장 _ 코뮨주의와 휴머니즘 휴머니즘 이후의 코뮨주의 ‘인간의 죽음’이후 │ 휴머니즘의 이론적 요소들 │ 휴머니즘의 이론적 공간 │ 휴머니즘의 경계 │ 휴머니즘 없는 코뮨주의 6장 _ 코뮨주의와 타자 사건의 공동체를 위하여 타자의 공동체 │ 얼굴의 윤리 │ 타자에서 타자‘들’로 │ 코뮨주의의 에티카 │ 사건의 윤리 혹은 사건의 공동체 │ 어떻게 삶을 함께 구성할 것인가? 3부 감응 Affect 7장 _ 코뮨주의와 유머 감응과 구성의 정치학 코뮨, 구성의 무한한 반복 │ 코뮨, 감응의 공동체 │ 카산드라의 비극 │ 내부적 원인이 되어라 │ 오직 덜 나쁜 것만을 선택할 수 있다? │ 아이, 혹은 야만인을 기다리며 │ 유머와 아이러니의 정치학 │ 자기이며 타자일 수 있는 힘으로 존재하기 8장 _ 코뮨주의와 욕망 관능적 혁명, 관능적 기쁨 공통의 신체와 무의식적 욕망 │ 자본주의 욕망 분석 │ 가족 공동체에서 독신자들의 코뮨으로 9장 _ 코뮨주의와 능력 자유로운 개인들의 협력 무한 경쟁 시대의 능력 │ 능력의 일반 개념 │ 코뮨주의에서 능력의 개념 │ 능력의 증대를 위한 조건 지은이 소개 찾아보기(인명/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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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혁명을 별도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어떤 면에서 대중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혁명적이라는 것은 “대중이 혁명을 욕망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욕망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대중은 ‘소용돌이(volution)’를 ‘반복(re-)’하는 흐름이다. 따라서 대중 바깥에서 혁명을 기획하고 계산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혁명은 대중에게 속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혁명은 계산 너머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p.64
혁명가란 혁명의 불길을 지도하는 자가 아니라 불을 붙이는 자이다. 그는 시대의 습기를 가장 먼저 날려버린 가장 건조한 지대로서 스스로 타오름으로써 불길을 주변으로 전파하는 자이다. 전달도 증폭도 대중들의 운동이다. 혁명가란 다만 대중의 흐름에서 좀 더 민감한 지대, 좀 더 잠재성이 큰 지대, 좀 더 강렬한 지대일 따름이다. 항상 반동적인 것으로 전화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대는 대중 속에 항상 존재한다. 그것은 대중의 잠재력(potential)이기도 하다. ---p.68 우정의 정치학을 작동하는 가장 일차적인 요소는 타자를 긍정적으로 촉발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친구가 지닌 장점을 좀 더 밀어붙여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지닌 단점을 넘어서게 비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에게 없는 어떤 것, 그러나 그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스승이 될 수 없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는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p.87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정치학은 대중의 흐름에 계급적 성향을 부여하고 대중의 흐름을 계급적 방향으로 촉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정치학은 이러한 대중의 흐름에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이미 옳은 것을 알려주고 그것으로 지도하는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혁명은 어디가 옳은지 잘 모르는 채 진행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른바 전위가 제시한 방향이 사실은 엉뚱한 방향이었던 사례들이 러시아 혁명의 경우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가! 다만, 대체적인 방향 감각 속에서 대중 자신이 보고 느끼고 감지할 수 있는 계급적 선택지들로써 대중의 흐름을 촉발할 수 있을 뿐이다. ---p.107 사적 소유권의 핵심은 자유로운 ‘처분’에 있다. 처분하고 분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것을 비로소 소유할 수 있다. 만약 처분이 불가능하다면 내 소유는 내 향유의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가령 내가 가진 곡물의 처분이 불가능하다면, 곡물의 양은 내가 먹어치울 수 있는 한계를 지시한다. 역설적이지만, ‘나’와 ‘내 것’이 분리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또한 이런 분리가 가능할 때, 나는 타자로부터 ‘그의 것’을 획득(박탈)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사적 소유를 ‘소외’로 파악한 것도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분리’나 ‘박탈’과 관련이 있다. 소외란 ‘나’와 ‘내 것’이 분리되는 현상이다. 즉 내 생산물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나의 생산 ‘활동’이 ‘나’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데서 소외가 시작된다. ---p.115~116 코뮨주의적 소유란 어떤 것인가. 사적 소유의 철폐로서 코뮨주의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코뮨주의에서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해 ‘처분’의 권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것(사물이든, 사람이든)과 공통의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뮨주의적 소유는 타자성에 대한 배제와 추방이 아니라 타자, 그것도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incommensurable) 타자와의 관계 구축이다. 타자와 동료 되기! 코뮨주의에서 소유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타자를 몰아내고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력을 행사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타자와 좋은 관계(코뮨)를 구축할 수 있을까’라고 할 수 있다. ---p.134쪽에서 이렇게 능동적인 구성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체를, 존재론적 공동체와 구별해서 ‘구성적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공동체’와 구별해서 ‘코뮨’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러나 이는 존재론적 공동체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잠재성을 좀 더 능동적으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란 점에서 존재론적 공동체에 부합하는 것이다. 아니, 우리 자신이 공동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활동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해야 적절하다. ---p.167~168 특이성이 크게 변환되는 지점에선 그 변환과 관련하여 좀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 지위가 능력/권력을 주는 게 아니라 능력이 지위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지도자란 타인들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타인들에게 ‘복무하는’ 자이고, 타인들에게 명령하는 자가 아니라 타인들의 요구(명령)를 따르는 자다. 다만 그 요구나 명령을 구성체의 지속이나 우의적 관계의 지속을 위해 적절한 형태로 파악하고 변형해야 한다는 점이 추가된다. ---p.177 코뮨을 구성하는 성분이라면, 그리고 코뮨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데 유효하게 참여하는 특이점이라면,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기계도, 공간도, 사물 모두 특이점이 될 수 있다. 하나의 코뮨적 구성체 안에 참여한 인간조차 특이점이 되지 못한 채 존재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인간 아닌 요소들 ? 자연적 요소든 기계적 요소든, 혹은 단순한 사물이든 간에 ? 이 특이점으로서 코뮨 전체의 본성에 참여/분유(participation)할 수도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p.230 원래부터 지고한 존재는 없으며, 원래부터 목적의 자리에 놓여야 할 존재는 없다. 특이점은 목적도 아니고 수단도 아니다. 문제는 어떤 조건에서 무엇이 목적이 되고 있는지, 무엇이 수단이 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면, 적어도 코뮨주의에서라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한 것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된 것에 감사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나 신 같은 존엄하다고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신체적 마모를 감수하며 무언가를 위해 수단이 되어주는 사물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예를 표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p.231쪽에서 타자의 본질이 따로 있고 그 후에 그와 공동체의 관계가 등장하는 게 아니다. 타자는 항상-이미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참여하고 있으며, 공동체에 속해 있다. 그의 현존은 존재의 공통 장소인 사건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지속과 해체의 과정 어딘가에 타자는 항상 있으며, 타자‘들’과 함께하고 있다. 이 ‘함께함’이 ‘좋은’ 것일 때, 즉 새로운 생성과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될 때 그런 공통성을 우리는 코뮨이라 부를 수 있다. ---p.271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이, 즉 사건화의 촉발점으로서 좋은 만남을 꾀하는 행동이 삶을 구성해 나간다. 그것은 선물을 주는 것이고, 방문을 열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며, 함께 지붕을 고치고 밥을 먹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것이기도 하다. 사건으로서 행동은 삶의 모든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삶의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이념적 선택이 아니다. 실로 코뮨주의의 에티카는 이 모든 사건의 연쇄를 ‘좋은’ 것들의 만남으로, 해체가 아닌 구성과 지속이 되게 하려는 노력(conatus)이 아닌가? ---p.275쪽에서 공포의 전략은 언제나 환상적 이분법에 의해 작동을 개시한다. 무정부주의적 자연 상태냐, 권리를 제한하는 국가적 질서냐? 빈곤한 고립이냐,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로의 편입이냐? 또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 직업 윤리, 생활 스타일 등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무능력한 실업자가 될 것이냐? 등등 모든 사태가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규정된다. …… 이런 이분법에서 모든 선택의 이유는 기쁨이 아니라 공포에 있다.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해주는 선택지는 이미 이러저러한 것으로 정해져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은 결코 사건의 내부적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현실은 이분법적이지 않고, 차악의 선택으로 제시된 대답들은 엉터리일 때가 많다는 점에서 이런 이분법은 환상이다. 이분법적인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다. 이 물음들은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할 것인지 묻지 않는다. 그 대신 죽음을 택할 것인지 삶을 택할 것인지를 묻는다. 차악의 선택은 곧 최악의 상태를 야기한다. 이 선택들이 악순환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p.299~300 사뮈엘 베케트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실패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유머리스트에게도 어울리는 정의이다. 유머리스트는 빈번히 실패한다. 그러나 아무도 실패해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만 실패한다. 그는 피로감 없이 유쾌하고 즐거운 실패들을 이어간다. 그는 자신의 실패, 과오, 심지어는 자신의 성공과도 쉽게 헤어질 수 있을 만큼 이별 능력의 최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실패나 성공과 무관하게 오직 자기 활동 속에 존재하는 유머리스트의 고요하고 영원한 기쁨, 이것을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사랑, 혹은 지복(至福)이라고 불렀다. ---p.322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채 가변적으로 유동하는 자본,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고 상상된 자본가, 자본에 무력한 토지와 기계, 가변 자본(임금 수입)을 잃을까 두려운 노동자, 가변 자본(임금 수입)을 선망하는 산업 예비군으로 이뤄진 오이디푸스 가족이 탄생한 것이다. 자본주의적 사회 제도는 가족 제도이다. 이 가족 제도 안에서 자본의 무의식적 재생산 욕망은 가족 구성원들의 (전)의식적 열망으로 인격화된다. 자본가의 열망, 노동자의 열망, 실업자의 열망 등 이익과 목표에 의해 조직된 가족 구성원들의 열망은 계급 투쟁이라는 가족 갈등의 원천이 된다. 자본주의 가족 안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물론 아버지-자본가이다. 그는 생산력의 원천인 어머니-토지/기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빼앗긴 아들-노동자는 아버지-자본가를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하고자 열망하지만, 아버지의 남근, 즉 가변 자본으로 투여된 임금을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거세 공포 때문에 아버지에게 굴복한다. 이에 반해 임금 수입을 박탈당한 실업자-딸은 그 상실감 때문에 더더욱 남근을 선망한다. ---p.349~350 코뮨의 섹슈얼리티는 자본주의적 가족 제도를 이탈하는 리비도의 흐름 위에서 조직된다. 그래서 코뮨의 향락자는 가족을 형성하지 않는 자, 즉 독신자이다. 독신자는 가족을 형성하지 못한 자가 아니라 가족적 배치를 이탈하는 욕망을 지닌 자, 가족적 배치에 의해 배제된 성적 향락을 누리는 자를 뜻한다. …… (코뮨적) 독신자의 사랑은 ‘나’에게 결여된 것을 ‘타자’에게서 찾지 않으며, 타자에게 결여된 것을 나에게서 찾지 않는다.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느끼지 않는 만큼 타자 역시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여기기 때문이다. ---p.355, 356 능력이란 그것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긍정적 활동의 힘으로 이해되건, 무언가를 파괴하는 부정적 활동의 힘으로 이해되건, 여러 신체들의 관계에 의해 실행된다. 즉 여러 개체들이 하나의 개체를 구성하여 함께 작동함으로써 능력은 현재화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또 다른 개체를 파괴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능력의 실행은 복수의 신체들의 공통된 리듬 조성, 즉 협동을 통해서 가능하다. 현재적 실행의 차원에서 능력이란 바로 협동이다. ---p.366~367 코뮨주의 사회에서는 가치 생산에 유리한 특정한 능력만이 현재화되고, 특정한 소질만이 개발되고, 특정한 활동만이 전문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그들이 연합한 사회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서 다양한 능력과 소질과 활동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코뮨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보다 더욱 증대하게 된다. ---p.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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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1848)이 발표된 지 160년,
지금 여기서 새로운 코뮨주의를 선언한다! 한국 대중지성의 생동하는 현장 연구공간 ‘수유+너머’ 10년 실험의 이론적 결산과 만난다 코뮨주의는 공산주의는 물론 자본주의, 개인주의, 공동체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 유기체주의, 인간주의, 가족주의, 엄숙주의에 반대한다. 코뮨주의는 적대의 정치를 넘어 우정의 정치를, 우울한 슬픔의 정치에 맞서 쾌활한 기쁨의 정치를 선언한다. 국가에 포획되기를 거부하고 자본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하며, 자유로운 개인들의 개성과 차이가 존중되는 공동의 삶이 코뮨이다. 수많은 차이들과 소통하며 공통된 것을 생산함으로써 그 차이를 더 풍요롭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코뮨이다. 차이는 소통의 장애물이 아니라 소통의 가능성이며, 소통의 다리이다 코뮨주의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그 여정이 코뮨주의이며, 매번 시도하는 실험이 바로 코뮨주의이다.《코뮨주의 선언》은 특권적인 지식의 아카데미즘에 대항해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고 공유하는 대중지성의 결실이자,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에 포진한 젊은 학자들의 이론적 성과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는 순도 높은 실천적 철학서이다. 1장 코뮨주의와 대중 대중, 그 격랑 이는 바다 대중에 대한 코뮨주의자들의 전통적 논쟁은 추수주의와 계몽주의 사이를 왕복했다. 대체로 추수주의자들은 대중에 적응하기 위해 혁명을 포기한 사람들이었고, 계몽주의자들은 교육의 명목으로 대중을 지배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추수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은 대중에 대한 어떤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즉 지도자가 대중에게 다가가든 지도자가 대중을 끌고 가든, 그들 모두에게 대중은 대상화된 실체였다. 대중이 그렇게 파악 가능한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한 상황, 인민(the people, 근대 주권자, 일반 의지를 지닌 실체), 군중(the crowd, 서로 무관심한 채로 모인 사람들의 집합), 계급(the clas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상황을 우리는 ‘대중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이런 ‘죽어 있는 대중’ 이미지를 어떻게 전화(轉化)시킬 것인지를 모색한다. 그리고 대중을 ‘흐름’으로 이해할 때, 대중 운동의 역학은 어떤 것인지, 특히 혁명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밝혀보려고 한다. 2장 코뮨주의와 정치 적대의 정치학, 우정의 정치학 우리는 적대와 추방의 정치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불행히도 적대의 정치학은 코뮨주의를 자칭하는 이른바 ‘동지들’ 사이에도 작동했다. 많은 코뮨주의자들이 계급 간 차이만큼이나 계급 내의 차이를 견딜 수 없어했다. 정말로 “긍정적 촉발이 필요한 곳에서 부정적 배제와 억압, 투쟁과 증오의 정치가 작동했다.”적을 선명히 함으로써 자기를 선명히 하려는 시도는, 자기를 오염시키는 내부의 타자들을 색출하는 동일자의 논리를 양산했다. 괴물과 싸우는 자의 최대 위험은 그 자신이 괴물로 돌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정의 정치학을 꿈꾼다. 우리는 누구와도, 그 어떤 존재와도 친구가 될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 앞에서 자기 최면을 걸어 그를 친구로서 발견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친구를 창조함으로써만 우리의 우정을 이어간다. 적을 친구라고 우기는 게 아니라,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우정이고 사랑이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적이 된 타자가 아니다. 우리가 겨냥하는 것은 타자를 적으로 만드는 체제 자체이다. 계급 투쟁은 두 계급 사이에서 일어나는 적대적 투쟁이 아니라, 적대를 양산하는 계급 사회에 대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부르주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자리를 없애는 투쟁이 중요하다. 초월적 권력을 차지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초월적 권력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투쟁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부르주아를 닮은 프롤레타리아가 프롤레타리아를 닮은 또다른 누군가를 지배하는 일만이 반복될 것이다. 3장 코뮨주의와 소유 탈소유의 소유론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사유화(privatization)에 반대한다. 사유화란 공통된 것의 파괴이다. 분리와 배제, 추방이 사유화 속에서 작동한다. 우리의 반대는 공적인 것의 사유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지식과 정보, 각종 에너지, 여러 생명 자원에 사적인 울타리가 둘러지고, 대중의 정서 소통마저 사유화되는 시대를 우리는 반대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코뮨주의를 ‘사적 소유의 철폐’라는 한 문구로 요약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그 선언을 ‘공통된 것의 생산’이라는 말로 번역한다. 공통된 것을 국가적인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공공성은 많은 경우 국가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확산되기를 바랄 뿐 국가적인 것이 확산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에 국가의 개입은 언제나 과잉이다. 부족한 것은 비국가적 공공성, 우리가 코뮨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공통된 삶의 실험이다. 지식, 정보, 사물, 인간들이 여전히 개인의 울타리 안에, 국가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 4장 코뮨주의와 특이성 코뮨주의의 존재론 공동체의 실패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두 ‘개체화’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개체와 집합체의 대립은 무의미하다. 모든 개체는 항상 이미 복수의 요소들로 구성된 집합체이다. 어떤 요소의 활동이 더불어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의 활동과 분리되면, 그것들이 함께 모여 구성하고 있는 집합체의 생명은 끝난다. 죽음이란 구성 요소들의 분해로 정의되는 이 변환의 문턱이다. 우리는 공동체가 존재론적으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개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론적 집합체이자 공동체이다. 복수의 요소들의 복합체를 하나의‘단일한 것’으로 구별되게 해주는 것, 그것이‘단일하다’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것을 ‘그것’이게 해주는 특이적인 성분, 그것을 그것이게 해주는 이 특이적인 본성을 ‘특이성(singularity)’이라고 명명하자. 그렇다면 이제 개체의‘단일성’은‘특이성’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단일하다’는 사실, ‘대체 불가능하다’라는 사실, ‘단독적이다’는 사실이 특이성을 정의해줄 수 없으며, 오히려 반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5장 코뮨주의와 휴머니즘 휴머니즘 이후의 코뮨주의 많은 코뮨주의자들이 휴머니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은 인간들의 코뮨주의를 꿈꾸었을 뿐, 자연이나 사물, 기계 들과 코뮨주의적 관계를 사고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한 ‘인간적인 것’의 보존과 확장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사물들의 세계에서 그들은 다만 인간성 상실을 볼 뿐이다. 그러나 코뮨주의는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그 경계를 근본에서 변환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권력에 분노하면서도 인간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착취하고 쉽사리 버리거나 파괴하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도, 부당함도 느끼지 않는 우리의 감각을, 그런 자명성을 낳는 관계를 변혁해야 한다! 과거의 코뮨주의자들은 코뮨주의를 통해 진정한 인간이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코뮨주의에서 인간적인 것의 진정한 극복을 기대하고 있다. 사물과 동료가 되는 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제3의 종, 아니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예측할 길이 없는 어떤 존재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기꺼이 즐길 것이다. 6장 코뮨주의와 타자 사건의 공동체를 위하여 타자가 누구인지,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만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타자는 우리의 인식 대상이 아니다. “주체로서 나는 타자를 결코 만날 수 없다. 타자가 나에게 이미 알려지고 앎의 대상이 되었다면 그는 더는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로서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와의 마주침은 우리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것과의 마주침이다. 우리가 마주하지만 볼 수 없는 어떤 것과의 마주침. 그것은 고통과 죽음이라는 형태로 나에게 현현한다. 나는 그러한 타자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나를 바치며, 내 죄를 고백하고 참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동일자든 타자든 우리에게는 섬기고 싶은 주인이 없다. 설령 고통받는 자의 얼굴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에게 기도 드릴 생각이 없다. 타자의 절대 권리를 희생자의 절대 권리에서 찾고, 그 절대 권리를 영원한 정의(justice)로 바꾸어내는 사유의 전개 과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재나 테러에 희생당한 자들의 얼굴을 활용하는 오늘날의 제국주의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의 침공이 희생자가 요구하는 무한한 정의에 대한 화답이라고 주장한다. 7장 코뮨주의와 유머 감응과 구성의 정치학 어떤 공동체가 공포에 의해 구성되거나 유지될 때 우리는 이 공동체를‘슬픔의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대로 한 공동체가 기쁨의 감응에 의해 구성원들의 행위 능력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 우리는 이 공동체를‘기쁨의 공동체’로 정의할 수 있다. 코뮨은 기쁜 감응의 공동체이며, 코뮨의 구성적 활동은 기쁜 감응의 구성 활동이다. 유머는 우리의 공포 중독을 치유하는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이다. 진정한 유머리스트는 빈번한 실패 앞에서도 유머의 태도를 상실하지 않는다. 유머리스트는 공포 중독에 빠진 이들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거나 그들의 고통이 거짓이라고 공격하기보다 기쁨을 생산하는 활동을 직접 개시한다. 그는 우선 처벌과 그에 따르는 고통의 사소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소함 뒤에 이어지는 새롭고 다양한 기쁜 감응들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사람들은 유머리스트 곁에서 갑자기 놀라운 기쁨을 체험한다. 이를 계기로 중독의 사슬은 헐거워지고 그 헐거움을 틈타 모방이 시작된다. 그들이 공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위축된 신체를 활성화하고 사건들을 새로이 구성하는 내부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한, 이 감응적 모방은 수동적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쁜 능동적 감응 활동이 된다. 8장 코뮨주의와 욕망 관능적 혁명, 관능적 기쁨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상품경제를 상품 물신주의(fetishism)로 설명한 것처럼,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토대를 왜곡해서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가 아니라 경제적 토대 자체를 형성하는 무의식적 믿음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유물론적 정신 분석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이익이나 합리적 목적에 의해 지탱되는 사회가 아니라 자본의 확대 재생산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의해 지속되는 사회이다. 그 맹목적인 믿음을 지탱하는 것은 미친 소처럼 질주하는 자본의 몸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대중의 무의식적 욕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분석해야 할 것은 생산 양식 자체와 일체가 된 무의식적 욕망이다. 욕망은 이데올로기적 상부 구조를 형성하는 관념이 아니라 경제적 하부 구조 자체를 생산하는 물질적 힘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욕망을 해석되어야 할 관념으로 보았지만, 우리는 무의식적 욕망을 사회적 생산의 물질적 힘으로 본다. 프로이트의 관념 분석은 문명 속의 숙명적 불만으로 귀결했지만, 우리의 욕망 분석은 코뮨주의적 욕망 생산의 실천으로 귀결할 것이다. 9장 코뮨주의와 능력 자유로운 개인들의 협력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와 유사한 무한 경쟁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모두가 경쟁력을 소유하고자 노력하지만 승리하는 이들이 언제나 소수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사회가 결코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수 없음을 알지만,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마저도 신자유주의가 명령하는 삶과 다른 삶의 방식을 이제 꿈꾸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삶은 더욱 불안해지고 고단해지는 역설의 근저에는 경쟁력이라는 신자유주의의 능력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우리에게는 경쟁력과는 다른 능력의 개념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경쟁력으로서 능력 개념과는 다른 능력 개념을 질문한다고 할 때 그것은 위계화된 고립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 호혜적 연합을 통해서 발생하고 증대하는 능력의 가능성을 묻는 것이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기반을 둔 삶의 방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질문하는 것이다. 경쟁이 그것에 참여하는 자들의 고립을 낳는다면 경쟁의 지양, 혹은 경쟁의 폐기는 고립이 아닌 결합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는 마르크스를 따라 경쟁의 지양 역시 공동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능력의 코뮨주의적 구현을 위한 가능 조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