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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
이덕일 역사서
이덕일
고즈윈 2008.02.05.
베스트
역사 top20 1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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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1장 문체반정
명말 청초 문집을 성토하다 | 문체반정의 시작
박지원과 순정지문(純正之文)
12장 채제공과 금등지사의 비밀
도산서원에서 치른 별시 | 목이 메어 식사를 폐한 것은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 | 영남만인소
정조의 고민 | 채제공의 사직상소 | 어제 금등지사의 등장
13장 화성의 꿈
숙원 사업의 시작 | 천장(遷葬)
설계도 구비와 장용외영의 설치 | 순조로운 준비
14장 미래로 나아가다
역사적인 해의 시작 | 화성 건설의 원칙 | 만석거와 대유둔
금난전권의 폐지 | 화성에 상가를 조성하라 | 미래 지향의 도시, 화성
15장 임금의 가족들
기구한 운명의 형제 | 정조의 타협안 | 은언군을 다시 만나다
할머니 정순왕후와 어머니 혜경궁 | 부인 효의왕후
16장 철인군주의 하루
독서 군주 | 검소함은 왕가의 전통 | 경연, 『대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민(新民)인가, 친민(親民)인가? | 군사(君師) | 과거 출제관
답안지를 둘러싼 소동 | 사형수를 심리하다
17장 오회연교와 의문의 죽음
주문모 잠입하다 | 오회연교 | 운명의 연훈방
18장 반동
어의의 처벌을 둘러싼 논란 | 시신이 식기도 전에 | 장현경의 딸들

저자 소개 1

李德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객관적 사료와 논쟁적인 주제로 새로운 역사 해석의 선두에 서 있는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이다. 풍부하고 고증된 사료를 근거로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누가 왕을 죽였는가』 『조선 왕을 말하다』 『조선 왕 독살 사건』1·2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우리 안의 식민사관』 등 치열한 역사의식으로 무장한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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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2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512g | 148*210*20mm
ISBN13
9788992975032

책 속으로

이날 아침 정조는 오랜 계획을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소자 임금 자리를 탐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마지못해 임금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년(1804)이면 왕세자가 15세가 되니 족히 임금 자리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혜경궁은 귀를 의심했다. 갑자년에 왕위를 내놓고 물러나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혜경궁은 정조가 말 한마디 거동 하나 생각 없이 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에 사도세자께 자식으로서 하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정조의 입에서 나온 ‘사도세자’란 말이 혜경궁의 가슴에 와 박혔다. 그런 혜경궁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조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선왕의 하교를 받아 이 일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것 또한 의리요, 왕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 내어, 내가 못한 일을 내 대신 행하는 것도 또한 의리입니다.”
드디어 정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 그 시기가 바로 갑자년(1804)이었다. 정조의 나이 쉰셋이자 사도세자가 살았으면 칠순이 되는 해였다. 그 한창 나이에 정조는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하기 위해 왕위를 물려주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통한을 풀고 효도를 다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혜경궁 앞에서 이 구상을 밝힌 정조는 슬피 울었다.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아들의 효도로 이루고, 죽어 지하에서 아바마마를 뵙는다면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2권 p. 160-161

정조 18년(1794) 정월부터 시작된 화성 축성은 원래 10년 기한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예상대로 기한은 단축되어 불과 3년 만인 정조 20년(1796) 10월 낙성식을 할 수 있었다. 34개월 만이었는데 시공연도의 흉년으로 6개월 간 공사를 중지했으니 실제로는 28개월 만에 6백 칸에 이르는 행궁을 비롯한 모든 공사를 완공했던 것이다. 정조의 치밀한 기획과 채제공의 총괄, 그리고 조심태의 현장 감독 능력이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강제 부역이 아니라 도급제 임금 노동을 실시함으로써 노동 효율성이 크게 높아진 것도 큰 몫을 했다. 강제 부역 때는 마지못해 시간만 때우던 백성들이 도급제 임금 노동을 실시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정약용이 설계한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해 ‘4만 냥(兩)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정조가 기뻐한 것처럼 첨단 과학지식과 장비가 모두 동원된 것도 조기 준공에 큰 몫을 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모든 과학 건설 역량이 총동원된 공사였다. 낙성식 전날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 때문에 사도세자의 원찰로 정해졌던 조포사의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로 바꾸기도 했다.

정조는 조선 사회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사대부들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사회 밑바닥에서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었다. 농업생산력 발전에서 시작된 변화는 수공업과 상업으로 옮겨 가 사회 전체에 파급되었다. 정조는 화성이 사회의 이런 변화를 흡수할 뿐 아니라 선도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화성은 행정도시이자 상업도시가 되어야 했고, 농업 발전을 선도하는 농업 시범도시가 되어야 했다. 조선이 나아가야 할 미래 계획도시가 되어야 했다

---2권 p. 124-127

출판사 리뷰

임금 자리에 오른 정조의 두 가지 모순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를 되새기라는 소론 측의 상소에 크게 화를 내며 상소를 올린 이들을 사형시킨다. 사도세자 문제에 대해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보지 못하며, 차마 말할 수 없다”는 할아버지 영조의 ‘3불유훈’은 이처럼 절대 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세력에 대한 토죄를 단행하면 영조의 유훈을 어기는 불효로 귀결되고, 이는 반대세력에게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명에 간 아버지를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다. 세손 시절, ‘나라의 중탁을 세손에게 한다’고 한 할아버지 영조의 말은 정조에게 뼈를 깎아도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이었다. ‘나라의 중탁’을 맡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죽일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이 있었기에 모친도 남편을 버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자니 아버지의 원혼이 울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니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불효손이 되는 모순된 상황에서 정조가 찾은 해법은 경에서 ‘권도(權’道)를 찾는 것, 즉 편법을 찾는 것이었다. 즉 사도세자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사건 당사자들을 다른 명목으로 처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할아버지의 유명도 거역하지 않는 권도를 택한 것이다. 자신의 모순을 뛰어넘으려는 정조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갑자년 구상’은 그 최대의 결과물이다.

갑자년 구상―아들에게 양위하고 화성에서 사도세자의 아들로 살겠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정조가 밝힌 ‘갑자년 구상’의 내용이 나온다. 정조는 나이 쉰셋이 되는 갑자년(1804)에 부친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기 위해 세자(훗날의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 화성으로 가 여생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세자가 국왕이 되어 할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것이 정조가 영조의 유훈을 어기지 않고 부친에게 효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철인 군주의 하루―최고의 학자이자 뛰어난 무관으로 군사(君師)가 되다.
정조는 가슴속의 증오와 분노, 갈등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조금의 여유와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손 시절 그는 시강원의 스승인 빈객에게 준 글에서 “나는 천하만사가 모두 하나의 ‘나(懶:: 게으름)’ 자로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단 한순간의 나태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을 다그쳤다. 이는 정심(正心)의 추구였다.

『대학(大學)』의 정심은 마음에 노함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수양 단계이기 때문에, 그는 매일같이 정심을 되뇌는 것으로 분노와 증오를 다스려야 했다. 그 과정이 그를 철인(哲人)으로 만들었다. 가슴속의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부친의 원수들과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고통을 정심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활을 쏘며 그는 “정심을 하지 못하면 과녁을 맞히지 못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과녁을 맞힐 때는 정심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학문과 정사와 활쏘기가 모두 하나였다. 그렇게 그는 철인 정치가가 되어 갔다.

조정에서 가장 업무량이 많은 사람은 정조 자신이었다. “제왕에게는 사(私)가 없다.” 정조가 자주 되뇌었던 이 말처럼 그는 사생활 없이 밤잠을 줄여 가며 일과 독서를 병행했다. 독서의 군주이자 학문의 군주였던 정조에게 학문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자 자기완성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밝힌 정조에게 중요한 것은 천하를 편하게 다스리는 평치이고 학문의 완성이었다. 경연도 바로 이를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경연을 통해 주자학에 경도된 신하들의 좁은 시야를 넓게 틔워 주고 싶었다. 그러나 경연관들의 수준이 정조에 미치지 못했다. 구체적인 질문을 해도 구체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 경연 자리는 학문에 밝은 신하가 군주의 학문을 인도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정조 때는 거꾸로 바뀌었다. 정조는 경연관들의 수준이 낮다고 경연을 폐하는 대신 그 자리를 자신이 신하들의 스승이 되는 계기로 활용했다. 임금이 모든 신하의 스승이라는 군사론(君師論)의 탄생이었다. 정조가 과거 시험 문제를 직접 출제하고, 초계문신들을 가르치고, 경연에서 스승 역할을 하는 모든 것들이 이 군사론에서 나왔다.
정조는 옥안(獄案)도 직접 꼼꼼히 심사하였다. 정조를 곁에서 지켜본 서용보는 “여러 도의 옥안이 책상과 대에 가득히 쌓이는데 임금이 직접 살펴보고 조사하는 데 밤을 새워 아침까지 이어질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정조가 만난 사람들
철인군주 정조가 자신의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걸었던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은 정조가 만났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결코 미래로 갈 수 없다며 정조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정조 이복동생들의 사형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사도세자를 죽인 증오의 정치구조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과 그를 추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홍국영처럼 미래를 가장해 과거를 걷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에는 또한 정조가 과거를 선택했다면 만날 수 없었을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형제 같은 남인들과 사회의 천시 속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쌓았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같은 서얼들, 그리고 사도세자의 이장(移葬)에 눈물을 흘리던 백성들이 그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정조는 미래를 향해 걸었다. 그 길의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정조에 의해 발탁된 서얼 출신의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들이 단번에 조선의 지식계를 평정한 것처럼 조선은 새롭게 바뀌어 갔다. 그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서학(西學)을 받아들이고 북학(北學)을 주장했다.

채제공과 ‘금등지사’의 비밀―왕도 울고 신하들도 모두 울었다.
‘5월 22일의 하교’로 사도세자 문제가 더 이상 거론되는 일이 없게 된 가운데 영의정으로 임명된 채제공이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다시 사도세자에 대한 얘기를 언급해 노론 측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채제공을 처벌해야만 하는 입장이 된 정조는 대신들에게 선왕 영조의 ‘금등지사(金?之詞)’를 공개하며 채제공을 두둔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후 도승지로 있던 채제공에게 자신이 직접 쓴 글 한 통을 주면서 신위 아래에 간수하라고 명했는데, 그 ‘금등’의 글 가운데 있는 한 구절을 채제공이 사직상소에서 언급한 것이고 이는 선왕과 자신에 대한 충성과 의리에서 나온 것이니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66-67쪽)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라노라.
(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藏千秋 予懷歸來望思)

영조가 손수 적은 ‘금등지사’ 가운데 정조가 공개한 이 두 구절에는 사도세자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영조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정조대왕행장』은 이 비가(悲歌)를 보고 ‘왕도 울었고 제신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체반정의 이유―사대부를 향한 정조의 역습
정조 9년(1785) 을사추조사건을 시작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단 논쟁에 불이 붙었다. 정조는 천주교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신자가 많은 남인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정치적이 아니라 사회적ㆍ철학적 차원으로 접근했다.

“정학(正學)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를 벗어난 이런 책(천주교 서적)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나라 초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급선무이다. … 사대부 중에 한 사람도 오염되는 이가 없으면 화복설에 흔들린 어리석은 백성들도 스스로 깨닫고서 깨어날 것이니, 조정에서 이 일에 많은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이처럼 정조는 국법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렇다고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천주교를 허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창안한 논리가 ‘정학이 바로 서면 사학은 저절로 소멸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노론에 대한 역습이기도 했다. 성리학을 정학으로 신봉하는 노론 인사들이 바로 서면 사학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문체반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조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 청초의 문집부터 금지시켜 패관잡기가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
력히 주장했다. 그리하여 성균관 시험지 중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글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그 글을 쓴 사람은 다시는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또한 남공철, 심상규, 김조순 등에게 문체가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함추(緘推)의 처벌을 내리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명가의 후손들이었다. 정조는 노론 명가의 젊은 관료들이 경전이 아니라 패관소품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천주교 같은 사학이 유행한다는 논리를 성립시켜, 노론 측에서 유학을 빙자해 천주교를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 박지원도 처벌 대상이 되었는데, 정조는 패관잡기가 유행하게 된 원인이 박지원의『열하일기』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반성의 의미로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 올리라 명한다. 박지원을 언급한 것은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에게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주는 방법을 통해서 문체 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었다.

오회연교와 죽음
다시 불붙은 천주교 논쟁으로 남인들이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정조는 재위 24년(1800) 5월 30일 ‘오회연교’를 통해 중대한 결심을 시사한다. 주요 내용 중 하나는 ‘모년의 의리’ 즉 사도세자와 관련한 내용이었고 또 하나는 정계에서 밀려났던 남인들을 다시 중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 정조는 심상치 않은 병세를 보인다. 6월 16일 정조는 심회를 토로한다.

“대개 이 증세는 가슴의 해묵은 화병 때문에 생긴 것인데 요즘에는 더 심한데도 그것을 풀어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畏) 자가 있는지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어 정조는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을 한다.
“오늘날처럼 살피고 엿보기를 잘하는 습속으로 혹시 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안다면 또한 어찌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치는 길이 없겠는가. 숨어 있는 음침한 장소와 악인들과 교제를 갖는 작태를 내가 어찌 모를 것인가. 내가 만일 입을 열면 상처를 받을 자가 몇이나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참고 있는데 지금까지 귀 기울이고 있어도 하나도 자수하는 자가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 …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 이런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 달라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들이 종기처럼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으나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2권 237쪽)

앞서 남인 중용을 시사한 오회연교의 발언과 대숙청을 예고한 지금의 말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6월 23일, 뒤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연훈방(烟熏方) 요법이 의관 심인의 소개로 등장한다. 6월 28일 정조는 정순왕후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숨을 거둔다.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었다. 연훈방을 소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정조에게 알린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인의 친척이란 점에서 심환지는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선왕 정조의 복수를 외치며 관아를 침범한 사건은 왜 조용히 처리되었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한 지 40여 일이 지난 1800년 8월 15일 추석날 밤. 경상도 인동부(현 구미시)에서는 초야의 선비로 묻혀 지내던 장시경, 장시욱, 장시호 형제와 장시경의 아들 장현경이 주축이 되어 ‘선왕의 원수를 갚자’며 군사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인동 관아 앞에서 관군에 막혀 하룻밤의 꿈으로 끝난 이 사건은 그러나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반란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다른 역모사건과는 달리 조용히 처리되었다. 주모자의 서울 압송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담자에 대한 처벌도 의외로 관대했다. 당연히 외부로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정순왕후와 노론이 장악한 조정은 무슨 의도로 이같이 처리했을까. 반란 주모자들은 “국가에서 어약을 과도하게 써서” 임금을 잃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정조 사망 당시의 어의(御醫)들에 대한 처벌 문제로 들썩였던 정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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