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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 안에서
유리문 밖의 나와 유리문 안의 세상 나쓰메 소세키 연보 |
Natsume Soseki,なつめ そうせき,夏目 漱石,나츠메 긴노스케 夏目 金之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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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바보라서 사람들에게 속거나 혹은 의심이 많아 사람을 받아드릴 수 없거나,
이 두 가지밖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투명하고 불유쾌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이것이 평생 계속된다면 인간이란 얼마나 불행한 존재일까. --- p.126 그는 목을 들어 보이기는커녕 꼬리조차 흔들지 않았다. 그저 하얀 덩어리마냥 울타리에 붙박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 달쯤 못 본 사이에 그가 벌써 주인의 목소리를 잊어버렸구나 싶자,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막 가을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아직 방마다 덧문이 걷혀 있어 활짝 열어젖힌 집 안으로 별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밤이었다. 내가 서 있는 안방 툇마루에는 나 말고도 집 식구가 두엇 더 있었다. 그렇지만 그네들은 내가 그토록 헥토르의 이름을 부를 때도 이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내가 헥토르에게 잊혀 버렸듯이 그들 또한 헥토르를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 이튿날 아침, 서재 툇마루에서 초가을 뜨락을 바라보노라니 또 우연히 헥토르의 하얀 모습이 이끼 위에 보였다. 나는 어젯저녁의 실망을 되풀이하기가 싫어 일부러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선 채 그의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는 나무 밑둥에 붙박아 놓은 돌 세숫대 속에 목을 처박고 거기에 고여 있는 빗물을 할짝할짝 핥고 있었다. --- pp.19~21 성聖 어거스틴의 참회, 루소의 참회, 오피움이터(영국 작가 토머스 D. 퀸시가 쓴 <어느 아편 중독자의 고백Confessions of an English Opium Eater>을 가리킨다)의 참회―그런 것들을 아무리 더듬어 가 보아도 참된 사실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서술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다. 하물며 내가 여기에 쓴 것은 참회가 아니다. 내 죄는―만일 그것을 죄라고 할 수 있다면―지나치게 밝은 쪽에서만 그리고 있는 것이리라. 거기에 어떤 사람은 일종의 불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자신은 지금 그 불쾌감 위에 올라앉아 일반 사람들을 두루 둘러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다. 지금까지 시시한 것들을 쓴 자신마저도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마치 그게 타인이었던 것 같은 느낌으로 역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뜰에서 휘파람새가 또 간간이 지저귄다. 봄바람도 가끔 생각났다는 듯 난 이파리를 흔들러 온다. 고양이가 어디선가 크게 물린 귀언저리 상처를 햇볕에 드러낸 채 가물가물 졸고 있다. 좀전까지 뜰에서 고무풍선을 띄우며 떠들던 아이들은 다함께 활동사진을 보러 가 버렸다. 집도 마음도 차분한 가운데, 나는 유리문을 열어젖히고 조용한 봄 햇살에 감싸여 망연히 이 원고를 끝낸다. 잠시 후에 나는 팔베개를 하고 이 툇마루에서 한숨 잘 작정이다. --- pp.149~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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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나와 넓은 세상 사이에 있는 유리문
유리문으로 된 서재 안에서 병으로 바깥출입을 못한 채 삶과 죽음, 세상에 대해 사유한 일본문학의 별 나쓰메 소세키의 자유롭고도 고독한 내면 풍경 소세키 최후의 산문집 <유리문 안에서>는 나쓰메 소세키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1915년)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산문을 모은 것으로, 만년에 이른 작가의 인간관과 인생관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생을 마감하기 1년 전 신년 연하장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쓸 만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더욱 내성한 눈으로 삶과 죽음을 응시하고 있으며, <유리문 안에서> 전체에는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자각이 배어 있다. 또한 소세키는 처음으로 그동안 터부시해 왔던 자신의 성장과정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인간관계를 둘러싼 고민이나 인생관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쓰고 있다. 양자로 보내진 불우한 어린 시절부터 신경쇠약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괴로움,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발견하는 인간적인 면모들과 세상에 대한 냉소적 시선까지, 그의 문학적 소재가 되었던 많은 것들을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소세키가 남긴 작품의 원류와 그의 인간적 면모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자전적 에세이, <유리문 안에서>. 이 책은 위대한 작가의 인생 여정과 말년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유리문 저쪽에서 보면 내가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리문 이쪽에서 보면 당신이 유리문 안에 갇혀 있다. “아무리 좁은 세계라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사건은 일어난다. 그리고 그 자그마한 나와 넓은 세상 사이를 격리 시키고 있는 이 유리문 안으로 이따금 사람들이 들어온다.” <유리문 안에서>의 ‘유리문 안’이라는 공간은 소세키 산방으로 불리던 그의 집 안의 서재로, 유리문은 당시 일본 집으로는 드물게 유리를 끼워 넣은 서양식 문이다. 소세키는 이 유리문 안과 밖을 자신의 내면과 바깥 세계를 경계 짓는 은유로 사용하며, 담담한 어조로 유리처럼 투명한 마음의 산책을 시도한다. 모두 39장으로 구성된 내용은 현실과 과거로 분류할 수 있다. 현실은 소세키를 방문한 사람들 또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고, 과거는 소년 시절의 회상이다. “죽음이 삶보다 고귀하다고 나는 믿는다.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이 삶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소세키는 ‘죽음’을 통해 ‘삶’, 즉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한다. 이 책에는 소세키 자신은 삶보다 죽음이 더 고귀한 것이라 믿고 있으면서도, 삶의 고통으로 죽어야 할지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여인에게는 죽지 말고 살아달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죽음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인간적인 각오와 결의에 의해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세키 마음속에 깊이 흐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삶을 향한 의지를 엿볼 수 있고, 이상과 다른 자신을 솔직히 인정하는 소세키의 모습에서 진솔한 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죽지 말고 살아 주십시오.” 여자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그러고 나서 백 미터쯤 더 갔다가 다시 집 쪽으로 되돌아왔다. 숨이 막히도록 괴로운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나는 오히려 오래간만에 인간다운 흐뭇한 마음을 맛보았다. … “죽음은 삶보다 고귀하다.” 이러한 말이 요즘 끊임없이 내 마음속을 오가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보다시피 이렇게 살아 있다. …나는 여전히 삶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조언이란 아무래도 이 삶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그녀를 향해 모든 것을 치유해 주는 <세월>의 흐름을 좇아가라고 했다. 그녀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 소중한 기억은 점점 바래갈 것이라고 탄식했다. 공평한 <세월>은 소중한 보물을 그녀에게서 빼앗는 대신, 그 상처 또한 차츰 치유해 줄 것이다. 격렬한 삶의 환희를 꿈처럼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한편 지금의 환희에 따르는 생생한 고통을 잊게 해 줄 수단 또한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 본문 30~33p 독자와 깊이 소통할 수 있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힘 그는 일상 곳곳에서 늘 깊이 사유했고, 고스란히 글로 옮겨 놓았다. 병으로 바깥출입을 못한 채 유리문 안의 서재에서 요양하며 보고 느낀 이야기부터 어린 시절의 잡다하기 그지없는 회상까지 모두 담고 있는 이 산문집에서는 인간 소세키의 면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소설과는 달리 자유로운 정신이 절로 느껴지는 소세키 말년의 산문집은 일관된 주제나 줄거리가 없기에 더욱 수필다운 면모가 가득하다. 그는 일상 곳곳에서 늘 깊이 사유했고, 고스란히 글로 옮겨 놓았다. 이는 얕은 감각을 자극하는 말재주와 본질을 잃은 현란한 수식어와는 분명 차원이 다른 것이며, 이것이 무수한 독자와 깊이 소통할 수 있는 위대한 작가의 힘이다. “집도 마음도 차분한 가운데, 나는 유리문을 열어젖히고 조용한 봄 햇살에 감싸여 망연히 이 원고를 끝낸다. 잠시 후에 나는 팔베개를 하고 이 툇마루에서 한숨 잘 작정이다.” - 본문 150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