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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종정 설석우 대선사 / 제갈공명을 꿈꾸었던 소년 / 망국의 한을 안고 방황한 세월 /
어머니를 찾아나선 사찰 순례길 / 속진을 털고 금강산으로 / 이 좋은 불법, 이제야 만나다니 / 평생의 보물 《초발심자경문》/ 과연 그대는 어디서 온 물건이던고 / 평생의 횃불로 삼은 《육조단경》 / 비구니가 되신 어머니 / 장안사 연담 스님의 제자 삼형제 / 폭설에 묻힌 금강산 마하연 / 세속의 인연은 끊어야지요 / 영원암에서 정진 또 정진 /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 무슨 일에든 지극 정성으로 / 선학원으로 찾아온 딸 / 한용운, 백성욱과 함께 여름 한 철 / 금강산을 떠나 남쪽으로 / 남해로 건너가 해관암 창건 / 만장일치로 추대된 초대 종정 / 천치도 되지 말고 원숭이도 되지 말라 / 한 종소리에 뜬구름 흩어지네 / 석우대종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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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전후의 나이에 불문(佛門)에 귀의한 뒤 평생토록 오매일여(寤寐一如) 참선 수행에만 진력했을 뿐, 부귀영화를 꿈꾼 적도 없었고, 유명한 스님이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으며, 감투를 쓰려고 나선 적도 없었다. 아니다. 그분은 감투를 쓰려고 나서기는커녕, 종정이라는 ‘한국불교 최고 어른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내가 종정입네’ 하고 행세 한 번 한 적이 없는 오직 선승(禪僧)일 뿐이었다. (14쪽)
이토록 자상하고 이토록 보배롭고, 이토록 지혜롭고 자비로운 가르침은 일찍이 어떤 유가(儒家)의 책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보화 스님은 야운 스님의 <자경문>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에 흠뻑 빠져들었고, 저절로 흥이 나서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토록 오묘한 불교의 가르침을 어쩌자고 여태까지 모르고 지냈던가. 생각할수록 한스러울 뿐이었다. (76쪽) “직접 뼈 빠지게 일하는 농부들도 헐벗고 굶주리거늘, 실오라기 하나 쌀 한 톨 농사를 짓지 아니한 우리들 수행자가 오랫동안 일하지 아니하고 손발이 편했는데, 그러고도 어찌 좋은 옷 맛있는 음식을 탐하겠는가? 그래서 옛 스님께서 이르시기를, 수행자는 마땅히 떨어진 헌 옷과 나물밥에 만족하라고 하신 것이야.” (170쪽) “놓아버리란 말이지. 새 소리는 새 소리대로 놓아버리고, 폭포 소리는 폭포소리대로 놓아버리면, 언젠가는 내 귀에 새 소리도 바람 소리도 폭포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네. 내가 조바심 친다고 해서 바람이 그칠 것인가, 새가 울음을 그칠 것인가, 떨어지던 폭포가 멎어줄 것인가. 새 소리는 새 소리대로, 생각 생각은 생각 생각대로,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내버려두게. 버려두고 버려두다 보면 무념의 경지를 만나게 될 것이야.” (191쪽) “스님, 절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그래야 현판을 걸지요. 스님께서 계실 절이니 멋지게 지으십시오.” 이상태 거사가 스님게서 절 이름을 지어주시기를 간청했다. “바다 ‘해(海)’자에 볼 ‘관(觀)’자, 해관암으로 하세나.” “해관암요? 죄송하오나…여기서는 바다가 보이질 않사옵니다만….” “허허허, 내 그 말 나올 줄 알았네. 허나, 육안으로 보면 바다가 보이지 아니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여기서도 바다가 보이는 법일세.” (251쪽) 제자들의 수행이 시원치 않다고 생각되면 석우 스님은 사정없이 호통을 쳤다. “내 그동안 너희들에게 선방에 가거든 실참실오 하라고 그렇게도 일렀건만 좌선하는 시늉만 내다가 왔구나. 선방에 들어갔으면 진실로 참구하고 진실로 깨달아야지, 선방에서 허영된 미친 짓이나 하고, 주장자나 치고, 방망이나 치는 그런 짓을 하려거든 차라리 그런 선방, 방을 파뒤집는 게 나을 것이야.” (257쪽) 이날, 청정교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새롭게 탄생되었고, 새로운 종정에 설석우 대선사가 추대되었다는 소식은 신문 방송을 통해 전국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고 어른이신 초대 종정으로 추대된 우리의 설석우 대선사는 세수 8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경남 고성 옥천사의 산내 암자인 백련암에서 고고한 자태의 학(鶴)처럼 여전히 수행 삼매에 들어 있었다. 설석우 대선사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제자들은 물론 기라성같은 불교계의 거물들이 스님을 친견하러 몰려들었다. 그러나 설석우 대선사는 초연했다. 종정이 되기 전에나, 종정이 된 후에나 석우 대선사는 여전히 평소 그대로 선승(禪僧)일 뿐이었다. (270쪽) 그저 앉으나 서나 화두와 씨름해가지고 견성(見性)해야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사람마다 심성 가운데 제불만조사(諸佛萬祖師)와 더불어 똑같이 갖추어져 가지고 있는데 단지 알지 못하는 고로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자재(自在)하게 쓰기 위해서는 이 공부에 일생을 걸고 열심히 지어 나가야 한다. 화두와 씨름하다 보면 무르익어져 바보처럼 되어버리는데 사람들이 옆에서 볼 때 저 사람이 혼이 나간 사람이다 할 정도로 그렇게 일념(一念)에 푹 빠져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 타파가 되면 사자후(獅子喉)가 나오는 법이다. 사자후가 나오면 석가모니 부처님 살림부터 다 알게 되고, 모든 조사의 살림을 한 꼬챙이에 꿰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견성이다. (282∼283쪽) 인생은 무상하다.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 어떠한 것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여생을 값지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 법을 좇아 살아온 중생들이 인과와 윤회의 법칙을 믿는다면 비록 금생에 이 몸이 사람의 몸을 받기는 했으나 과연 무엇을 하였으며, 내생에 또 다시 사람의 몸을 받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았는가? 아무리 바쁘다 바쁘다 해도 진정 이 일보다 더 바쁜 일이 있을까? (284쪽) 주머니에 하늘과 땅을 싸서 시방세계 밖에 던져버리고 囊括乾坤方外擲 주장자로 해와 달을 따서 수중에 감추고 杖挑日月袖中藏 한 종소리 그치자 뜬구름 흩어지니 一聲鍾落浮雲散 일만 봉우리 푸른 산이 정히 석양이로다. 萬朶靑山正夕陽 (297쪽, 석우 대종사 임종게)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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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을 통해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고승열전 그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조계종 초대 종정 석우 대선사의 발자취 《천치도 되지 말고 원숭이도 되지 말라》 한국불교를 빛낸 스님들의 구도 행적을 소설 형식으로 정리한 고승열전 시리즈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으로부터 경허·만공·효봉·청담 등 당대의 고승까지 두루 다루어 사료로서의 가치는 물론 소설적 재미도 담겨 있어 호평을 받아왔다. 불교방송에서 동명의 프로그램으로 전파를 타 오랫동안 호응을 얻으며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해 왔다. 2002년 고승열전 24 《마음에 타는 불 무엇으로 끄려는가》(청담 큰스님)가 발간된 이후 6년 만에 고승열전 25 《천치도 되지 말고 원숭이도 되지 말라》가 발간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그 모습을 드러낸 고승열전은 또 어떤 선지식의 발자취가 담겨 있을까? 수행자의 영원한 사표, 석우 대종사 불혹의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평생토록 오매일여(寤寐一如) 참선 수행에만 진력한 석우 대종사. 결코 부귀영화를 꿈꾼 적도 없었고, 감투를 쓰려고 한 적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종정이라는 ‘한국불교 최고 어른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내가 종정입네’ 하고 행세 한 번 한 적이 없는 오직 선승(禪僧)일 뿐이었다. 그래서 일까? 불행하게도 설석우 대선사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조선의 혜능’이라 불리며 혼란한 시기에도 결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학처럼 고고하게 선 수행에 열중했던 석우 대종사! 그분은 과연 어떤 분이었기에 그 치열했던 정화운동 와중에도 그 어느 쪽도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초대 종정에 추대했던 것일까? 《천치도 되지 말고 원숭이도 되지 말라》은 어린시절부터 출가 인연, 수행기, 사제간의 에피소드까지 석우 대종사의 구도 행적을 윤청광 특유의 문체로 담아 놓아, 누구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도중에 멈추기가 힘들 것이다. 석우 대종사께서 세상 인연을 마치고 열반에 드신 지 어언 50년. 잊혀져 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 그분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것은, 혼란스러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그분을 ‘수행자의 영원한 사표(師表)’로 모시고자 함에서이다. 석우 대종사 석우 큰스님은 1875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11살 때부터 사서삼경을 두루 암송하였고 의서와 풍수지리를 두루 섭렵하였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이를 애통해하며 팔도강산을 운유(雲遊)하다 대흥사에서 서산 대사의 행장기를 읽고 크게 감명받고 불교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1914년 출가한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가 범어사에서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본 후 출가를 결심하였다. 1915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연담 응신(蓮潭凝信)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으며, 유점사에서 동선 정의(東宣淨義) 율사로부터 구족계를 수지하고 ‘석우(石友)’라는 법호를 수지하였다. 금강산 장안사, 마하연선원, 영원암, 지리산 철불선원, 사천 다솔사, 남해 해관암 등지에서 정진 수행하였다. 갈등과 대립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1955년 전국승려대회에서 만장일치로 통합 종단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불혹의 나이에 불문에 귀의한 뒤 평생토록 오매일여 참선 수행에 진력했던 스님은, 한국불교 최고 어른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오직 선승일 뿐이었다. 1958년 2월 27일,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세수 84세, 법랍 45세로 열반에 드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