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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들어가는 글 1 인문주의의 영역 2 인문학 연구와 실천의 변화하는 토대 3 문헌학으로의 회귀 4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5 작가와 지식인의 공적 역할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
Edward W. S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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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사이드의 논의는 인문주의에 엄격하고도 지적인 힘을 선사하며, 정치적 현재성을 부여한다.” “저의 관심은 쓸모 있는 실천으로서의 인문주의이며, 이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학자로서 무엇에 기여할 수 있는지 알고자 함이며, 이러한 원칙들을 자신들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세계와 연결하고자 하는 지식인과 학계를 위한 인문주의입니다.” --- pp.23~24 “우리가 인문주의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것을 민주적인 것으로, 모든 계급과 환경에 열려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며 또한 끊임없는 상기와 발견, 자기비판, 해방의 과정으로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더 나아가 인문주의가 곧 비판이며, 이 비판이란 대학 안과 밖의 사건들이 처한 상황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엘리트 육성으로 내세우며, 편협하게 트집 잡는 휴머니즘이 취하는 입장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있지요.)” --- pp.43~44 “실로, 인문주의의 실천과 시민 참여의 실천 사이에 모순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문주의는 철회나 배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인문주의의 목적은 해방과 계몽에 쏟은 인간 노동과 에너지의 산물들, 더 중요하게는 집합적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인간의 오독이나 오해 등을 비판적 검토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정되거나 개선되거나 전복될 수 없는 오해는 없었습니다. 다시금 반추해 그 고통과 업적을 마주했을 때 온정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역사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폭로하고 해명하고 비판할 수 없는 수치스럽고 비밀스런 불의나 잔인한 공동체적 형벌, 명백한 제국의 지배 계획과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인문학 교육의 중심에 있습니다.” --- p.43 “심야 뉴스 해설자가 국무장관에게 사담 후세인에 대한 우리의 제재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정중히 질문할 때, 이때의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 무시무시한 정권에 가담하지 않은, 말 그대로 수백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불구가 되고 기아에 허덕이고 폭격을 맞는 걸 보고 우리의 힘을 실감하게 될 때, 이때의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또는 뉴스 진행자가 현 국무장관에게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한 이라크를 처벌해야 한다는 우리의 기준을 이스라엘의 무기 소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것인지를 물어 대답을 듣지 못할 때, 이때의 우리는 과연 누구입니까? 민간인들에게 폭격을 가하는 우리, 이라크의 위대한 유산이 약탈당하고 강탈당하는 상황을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일이 좀 생겼습니다"라던가 "자유는 난잡한 법입니다"라 말하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 중 누구든 어느 자리를 빌어서든 심도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런 우리가 아니요, 당신이 내 이름으로 하는, 또는 하지 않는 일과도 관계가 없소라고 말이죠.” --- p.117 “왜 개인이나 집단이 침묵보다 글쓰기와 말하기를 더 선호하는가라는 문제에 답하는 것은 지식인과 작가가 공적 영역에서 직면한 것을 구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사회 정의와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며 (아마르티아 센의 정식화처럼) 자유란 문화적·정치적·지적·경제적 발전과 관련된 선택지를 요구할 권리를 포함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개인과 집단의 존재, 그 존재 자체가 누군가를 침묵이 아닌 표명의 욕망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지식인의 소명에 대한 기능적인 관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이러한 기대와 소망의 정식화를 가능하게 하고 확장하는 위치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p.187 “언제든, 어디서든, 변증법적으로, 대립적으로 제가 앞서 언급한 투쟁을 드러내고 설명하며, 강요된 침묵과 보이지 않는 권력의 정상화된 평온에 도전하고 이를 물리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입니다. 거대하고 거만한 권력 집단과 이 집단의 활동을 정당화하고 위장하며 신비화시키며 또한 그에 도전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는 담론 사이에는 사회적이고 지적인 상응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 p.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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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출간에 관하여
『저항의 인문학』은 도서출판 마티에서 펴내는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의 두 번째 책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20세기 지성사의 지형도를 완전히 새롭게 재편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학자이다. 국내에서도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영향을 미친 책을 선정하는 각종 조사에 언제나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최상위권에 꼽히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이제 더 이상 학술적인 전문어가 아닌 일상적인 단어가 될 정도다. 하지만 사이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오리엔탈리즘’에만 지나치게 국한되는 결과를 낳았다. 비평과 예술, 인문학 전반 그리고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인 사이드의 성과를 폭넓게 조망하는 것이 도서출판 마티가 기획하는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의 목표이다. 첫 번째 책으로는 사이드가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고 남긴 유고를 제자가 정리해 펴낸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지난 1월에 출간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저항의 인문학』은 사이드가 생전에 펴낸 마지막 책이다. 백혈병 말기에 이른 사이드가 강도 높은 항암 치료를 받아가며, 컬럼비아 대학과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을 오가며 행한 강연이 이 책의 근간이다. 이어서 세계 지성계에 신성으로 떠오른 30대의 사이드를 만날 수 있는 사이드의 첫 번째이면서 이론적 구도에서 무척 중요한 주저 『시작: 의도와 방법』과, 학문 활동을 시작한 순간부터 마지막 시기까지를 인터뷰 형식으로 갈무리한 『권력, 정치 그리고 문화』가 준비 중이다. 사이드의 자서전(국내에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으로 출간됨)이 유년기부터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의 이야기라면 ,『권력, 정치 그리고 문화』는 그 이후를 아우르는 일종의 자전적 기록이자 사이드의 학문에 대한 가장 쉬운 입문서라는 점에서 사이드 이해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문주의의 영역 좁게는 인문학, 넓게는 인문주의(휴머니즘)에 대한 사망선고는 이미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과 인문주의로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건 실패했으니, 이제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인간을 만들자고 하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시대이니까 말이다. 인문학자들 대신 과학 저술가들이 현대의 지식논쟁을 주도하는 것만 보아도 인문주의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이드는 새롭게 진행 중인 실천으로서의 인문주의에 적절한 연구 영역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인문주의 전반에 불신을 표하고 인문학에 새로운 조류들이 들이닥쳤을 때, 많은 인문학자들이 서구의 고전과 정전의 해석에 배타적으로 몰두해 들어간 것에 대해 사이드는 맹렬히 비판하며 인문학의 정신이란 곧 비판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역사가 끊임없는 자기 이해와 자기실현의 과정임을, 그리고 이것이 백인, 남성, 유럽인이자 미국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인문주의의 본질임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실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셈입니다. 지구상에는 또 다른 지적 전통이 있고 또 다른 문화가 있으며 특유의 신들이 있습니다.” --- pp.48~49 인문학 연구와 실천의 변화하는 토대 사이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상투적인 한탄에 슬퍼하거나 감상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위기는 세상이 인문학의 가치를 몰라주어서가 아니라, 달라진 세계의 흐름을 인문학이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들리던 한탄일 뿐이며 그 해결 방안이 결코 위대한 작가와 위대한 텍스트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은 숭배와 억압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pp.56~57 이어 사이드는 인문학이 세상에 등을 돌리고 텍스트에만 전념하게 된 한 가지 이유를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읽어낸다. --- pp.58~64 냉전의 구도 속에서 민족/국가 중심주의적인 배타적 태도야말로 다문화 사회에서 인문학자와 인문학이 극복해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저는, 우리가 의식적이고 단호하게 유럽중심주의는 물론 정체성 자체와 관련된 태도의 모든 복합체를 벗어 던지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는 이제 더 이상 이전처럼 또는 냉전 시기처럼 인문주의 내에서 쉽사리 용인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인문학이 현 시대의 문학과 사고, 예술에서 단서를 얻으면서 다소 긴박하게 인식해야만 하는 것은 정체성의 정치나 민족주의적 전제를 가진 교육 체계가, 경계나 연구 대상이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제로 행하고 있는 일들의 중심에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 p.85” 독해와 저항 사이드가 새롭게 변화한 세계 속에서 인문학적 실천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방법은 문헌학적이다. 단어의 정확한 뜻이나 어원을 파헤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용과 저항의 인문학을 위한 방법으로 문헌학을 요청하는 것이다. 우선 독해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행위이다. “오직 더욱 더 주의 깊게, 더욱 더 세심하게, 더욱 더 폭넓게, 더욱 더 수용적으로, 더욱 더 저항적으로 (제가 말을 만들어보자면) 읽는 독해 행위만이, 인문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충분히 실행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 p.93 … 경청의 독해는 주의를 요하며 텍스트 속에 숨겨져 있거나 애매한 것들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러한 경청은, 예컨대 전쟁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같은 정치적 결정과 관련된 기사의 경우처럼, 우리가 시민으로서 책임과 양식적 배려를 가지고 텍스트 안으로 개입해 들어가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청이라는 수고를 감당할 까닭이 없겠지요. 결국 정밀한 독해의 계몽적이고 해방적인 목적이라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 p.101 사이드는 이런 경청의 독해를 통해 저항으로 나아간다. 사이드는 인문학 교육의 목표는 결코 잘 읽는 법을 가르치는 데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살고 있는 다양한 세계 속으로 독해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자의 텍스트는 위대한 작품뿐만 아니라 인도주의라는 이름, '우리'라는 탈을 쓴 위선의 언어이기도 하다. “이러한 집합적 강도짓으로의 비약을 깨뜨리는 유일한 말은 인간적인이라는 단어입니다. 일반적 인간성이란 것의 껍질을 벗겨내 다듬고 탈신비화하지 않는 인문학자는 말 그대로 떠벌리는 금관악기요 딸랑거리는 심벌즈입니다.” --- pp.118~119 작가와 지식인 그 자신이 실천하고 저항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사이드는 작가와 지식인을 구분하는 일이 이제 무의미해졌다고 이야기한다. “20세기의 지난 세월 동안 작가는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며, 박해와 고통을 증언하며, 권위와 충돌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서 점차 지식인의 반골적 속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작가와 지식인이라는 두 단어가 서로 융합되는 신호는 살만 루시디의 경우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불관용이나 문화 간의 대화, 내란(보스니아나 알제리의), 언론의 자유와 검열, 진리와 화해(남아프리카,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등지에서), 국가나 종교의 경험을 예증하고, 그 경험에 공적 정체성을 부여해 그것이 영원히 세계의 담론적 의제에 기입되도록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의 특별한 상징적 역할에 헌신하는 수많은 작가 의회와 대회의 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 pp.178~179 그리고 기존의 메이저 언론과 매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안적인 매체(최근 국내 상황에서 실감할 수 있듯)가 있을 수 있으며, 이의 해방적 잠재력을 작가와 지식인이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사이드는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자발적인 망명자일 수밖에 없으므로 "임시로" 거하는 집은 예술이라고 역설하며 이 속에서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쓸쓸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책을 마무리한다. 2008년 대한민국은 다시 거리의 정치, 저항의 시대로 퇴행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80년대와 달리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신념과 행동의 등불이 되지 못하고 상아탑의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 오늘의 이 현실에서, 자신이 속한 시대와 장소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사이드의 비판적 인문정신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