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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항일 불꽃으로 산화한
김학준
동아일보사 2008.06.12.
베스트
역사/시대적인물 top100 59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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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장 빼앗긴 나라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
난세에 태어나다
민족의식의 씨앗
3?1운동의 충격
민족의식이 꽃피다
묘지 팻말 사건의 충격
2장 만천하의 동포여, 힘을 기르자
3?1운동 이후 일제식민통치
야학운동에 뛰어들다
브나로드운동과 이 땅의 상록수들
3장 타오르는 항일의 불꽃
신간회 결성
끓는 피를 농민운동에 쏟다
4장 해외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다
역사의 무대로 진출
꺾이지 않는 광복의 염원
5장 만주 망명과 유랑의 시절
만주의 광야에서
망명과 유랑의 시절
6장 독립운동의 본거지 상하이 시대
1930년대 해외 독리운동과 상하이
일제의 분열정책과 만보산 사건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
7장 상하이 의거를 준비하다
의거의 날을 기다리며
하늘이 내려준 기회
8장 조용한 아침에 광풍이 일 듯
마지막 출정의식
천지를 뒤흔든 상하이 의거
9장 순절의 꽃, 성결의 피
“그대들은 나를 재판할 자격이 없다”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연보 및 숭모사업

저자 소개 1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회장, 카이스트 김보정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943년 중국 심양에서 출생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인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서울대학교대학원과 미국 켄트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고,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1983년도에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2년 상해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이 책의 초판에 해당하는 <매헌 윤봉길 평전>을 민음사에서 펴냈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역사와 정치, 인물에 관한 다양한 도서를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회장, 카이스트 김보정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943년 중국 심양에서 출생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인천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서울대학교대학원과 미국 켄트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받고,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1983년도에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2년 상해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이 책의 초판에 해당하는 <매헌 윤봉길 평전>을 민음사에서 펴냈다. 이 외에도 대한민국 역사와 정치, 인물에 관한 다양한 도서를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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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자 : 이수항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편집부 기자, 사회2부 차장, 조사연구팀장, 심의연구실 심의팀장을 거쳤다. 현재 동아일보 2020위원회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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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6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303쪽 | 480g | 148*210*30mm
ISBN13
9788970906249

관련 자료

매헌 윤봉길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남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의거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
1992년 상하이 의거 60주년
2008년 윤봉길 의사 탄생 100주

출판사 리뷰

식민지 교육을 박차고 나오다
매헌은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가혹한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19년 3월 예산 땅에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자 “일본말을 배워 그들의 종살이하라는 교육은 받지 않겠다.”며 보통학교를 박차고 나온다.
그 뒤 마을 서당인 오치서숙에 들어가 매곡 성주록 선생의 가르침 속에 사서삼경을 읽고, 신문과 잡지 등을 구독하며 신학문을 습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덕분에 서숙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열리는 ‘강(일종의 시험제도로 훈장이 지정해주는 글을 암송하며 뜻을 풀이하는 것)’은 늘 동기생들을 앞서갔고, 봄가을에 열리는 시회에서도 장원을 놓치지 않았다. 오치서숙을 졸업할 무렵 매곡 선생은 석별의 정으로 아호를 지어주었다. 매곡의 ‘매’자와 윤봉길이 평소 흠모하던 성삼문 선생의 ‘매죽헌’에서 ‘헌’자를 떼어 아호 ‘매헌’이 되었다.

일본의 탄압과 수탈보다 더 무서운 무지(無知)
묘지 팻말 사건은 청년 매헌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헐레벌떡 매헌에게 뛰어오더니 공동묘지에서 뽑아 온 듯한 나무 팻말을 한아름 보여주며 그중에서 아버지의 묘지 팻말을 찾아달라고 했다. 글자를 읽을 줄 몰라 아버지 산소를 찾지 못한 데 한이 맺힌 남자가 묘지의 팻말들을 모조리 뽑아 와서 읽어달라고 한 것이다. 문제는 그 남자가 아버지 묘지의 팻말을 찾았다 해도 어느 무덤에서 뽑아온 팻말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자신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남의 산소까지 영영 잃어버리게 했다는 이야기다.
서럽게 우는 청년을 보며 매헌은 “무지가 죄로구나. 무식한 것이 한이구나. (무식이) 일본제국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 아닌가? 이 청년 한 사람의 통곡소리가 아니라 이 나라 모든 글 모르는 자들의 통곡소리다.”라고 한탄한다. 이 사건 뒤 매헌은 “실력을 갖추는 것만이 내 나라를 되찾고 우리가 잘살 수 있는 지름길”이라며 마을 청년들을 설득해 야학을 세우고 농촌과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부흥원을 조직하는 등 본격적인 농촌계몽활동에 뛰어든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1930년 3월 6일 새벽, 매헌은 벼루와 먹과 화선지를 꺼내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일곱 글자를 쓴 뒤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만주로 향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2년 4월 26일 매헌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서 다음과 같이 입단 선서를 한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대한민국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한인애국단 앞)

1932년 4월 29일 천지를 뒤흔든 상하이 의거
1932년 4월 29일, 24세의 열혈애국청년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가지고 상하이 훙커우 공원으로 향한다. 이날 훙커우 공원에서는 일본의 군과 정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히로히토 일왕의 탄생일을 경축하고 상하이 사변 승리를 자축하는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오전 11시 40분. 참석자들이 해군 군악대 반주에 맞춰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하자, 매헌은 물통형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식단 한복판을 향해 힘껏 던졌다. 단상 위에 있다. 일본 상하이 파견군 시라카와 대장과 일본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시게미쓰 주중공사, 가와바타 일본거류민단장, 무라이 주중 총영사, 도모노 거류민단 서기장 등이 연기와 불꽃 속에 쓰러졌다. 천지를 뒤흔든 역사적인 상하이 의거의 순간이었다.

내 피가 거름되어 광복의 꽃 피우리라
상하이 의거가 있은 지 불과 27일만에 윤봉길 의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법정에서 윤봉길 의사의 최후 진술은 재판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였다.
“그대들은 나를 재판할 자격이 없다. 또, 무슨 권한과 근거로 나에게 극형을 구형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나는 대한의 전사로서 일본군에 대해 독립전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제 그대들이 내 목숨을 거두게 한다 할지라도 내 독립정신은 죽이지 못할 것이다. 나의 순절의 씨앗은 머지않아 움이 돋아나 꽃을 피울 것이며, 나는 그러한 역사의 흐름을 굳게 믿으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쇠망하는 날까지 지하에서 계속 싸우려고 한다.”
상하이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윤봉길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옮겨졌다가 다시 가나자와 형무소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육군 공병작업장 내 외진 곳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한다. 형이 집행되기 직전 윤 의사의 최후 진술은 “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였다.
그의 유해는 공병장 내 쓰레기장에 암매장되었다. 광복 이후 1946년 5월 순국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그해 6월 30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윤봉길 의사에게 건국공로훈장 중 최고의 훈 격인 ‘중장’(지금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바뀜)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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