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머리말 - 예술가 신사임당을 만나다
1장 규방에서 탄생한 군자 남자가 ‘장가를 드는’ 시대 부녀자에게서 글을 빼앗다 오죽헌의 정기를 품고 강직한 아버지, 현명한 어머니 평산 신씨에서 신사임당으로 일곱 살 아이의 화폭에 안견의 그림이 펼쳐지다 사임당의 재능을 사랑한 사람들 임종 직전 유기그릇이 붉게 물들다 2장 사임당 다시 보기 신묘한 붓끝 따라 맑은 자취가 남고 | 덕을 갖춘 화가 성현을 낳으심이 당연하다 | 율곡의 어머니 나라에 충성할 아들을 말없이 기르다 | 군국의 어머니 여성들의 장래희망이 되다 | 남성의 타자로서의 현모양처 스승 같은 어머니, 간언하는 아내, 시·서·화에 능한 예술가 동서를 넘나든 역동적인 삶 -백일홍과 함께한 20년 | 강릉 오죽헌에서의 삶 -신이 점지한 영재를 잉태하다 | 봉평 판관대에서의 삶 -소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잠들다 | 파주 율곡리에서의 삶 3장 진정한 현모의 교육 현모는 희생하지 않는다 | 스스로 모범을 보인 삶 출가한 몸으로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딸 형우제공(兄友弟恭)을 가르치다 먼저, 뜻을 세우라 작은 사임당 | 매창 사절(四節)로 불리다 | 옥산 퇴계와 쌍벽을 이룬 조선 최고의 학자 | 율곡 그 외 자녀들 4장 사임당의 예술 세계 예술가 사임당의 드높은 위상 시로써 부모를 섬기다 | 시인 사임당 글씨에 녹아든 단아한 마음 | 서예가 사임당 -오언절구, 6폭 병풍에 흐르다 -활활 타는 불길에서 구해 낸 등꽃 -저녁에 외는 경구(警句)를 쓰다 -섬세한 붓 속에 철을 품다 생명의 힘을 그리다 | 화가 사임당 -엷은 먹빛이 전하는 탐스런 풍취 | 묵포도도(墨葡萄圖) -줄기와 잎사귀가 마치 이슬을 머금은 듯 | 화초어죽(花草魚竹) -천지 만물이 제자리를 얻다 | 산수화(山水畵) -차가운 꽃술을 그리며 군자를 꿈꾸다 | 매화도(梅花圖) -소망을 담은 그림 | 할미새, 백로, 물소 -가장 작은 자연을 사랑한 화가 -미물의 생명에서 인간을 발견하다 | 초충도 소재의 상징적 의미 -온화한 빛으로 풀벌레를 비추다 | 초충도에 깃든 색채 -앞마당에 나가 볼까 -닭이 종이를 쪼아 먹은 사연 -이것 고이 간직하고 흔한 그림 대하듯이 예사로 보지 마오 -따뜻한 마음 위에 고운 색을 입혔네 수틀 속의 조물주 | 자수 공예가 사임당 맺음말 사임당 연보 참고 문헌 출처 |
유정은의 다른 상품
|
「여성단체 공동성명서」 내용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신사임당이 화폐 인물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내세운 가장 강력한 반대 이유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탄생한 현모양처(賢母良妻)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추앙되고 있는 봉건적 이미지의 현모양처를 시대를 대표하는 화폐 인물로 선정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신사임당 하면 국민의 대다수는 현모양처를 먼저 떠올린다. 그렇다면 신사임당은 과연 현모양처였을까. 그녀가 진정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어진 어머니이면서 착한 아내’인 현모양처의 전형이었을까. 그러나 정작 조선 시대에는 현모양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절개가 굳은 여자를 일컫는 열녀(烈女)와 시부모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효행을 실천하는 효부(孝婦)만이 있었을 뿐이다. --- pp.3-4 조선의 자식들까지 황국신민(皇國臣民)이라는 이름으로 충(忠)을 강조하는 황민화 이데올로기를 심었는데, 그 중심에 조선의 어머니 현모양처를 수단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때 역사 속 인물에서 끄집어낸 인물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이렇게 일본이 심어 놓은 황민화 이데올로기 속의 신사임당을 우리는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여태까지 그렇게 믿어온 것이다. 여전히 현모양처 운운하고 있는 현실은 광복 70년이 지났음에도 일제의 잔재를 털어 버리지 못한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일 뿐이다. 사임당은 결코 자식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무조건 헌신하는 현모의 삶을 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믿는 양처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남편의 잘못된 생각이나 올바르지 못한 판단은 바로 간언하였던 여성이었으며,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추구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현명한 여성이었다. --- pp.5-6 사임당은 자신이 스스로 당호를 정하고 입지를 세웠던 것처럼 7남매의 자녀들도 자신이 걸어갈 인생의 목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정한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설사 어렵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힘써 행할 것을 가르치고 또 가르쳤을 것이다. 『논어』「양화」편에는 “인간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배우고 익힘에 따라 서로 달라지고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받고 어떻게 익히느냐에 따라 군자가 될 수도 있고, 소인이 될 수도 있다. 21세기 우리 시대의 교육은 아이들을 빨리 키우려고만 한다. 과정보다는 결과에 치중하여 바르게 키우기보다 빨리 키우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이들이 뜻을 세울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 뜻도 어머니가 자본주의 시대에 맞춰 맞춤형으로 제시해 주는 일이 허다하다. --- pp.157-158 송시열은 아마도 이 산수화를 사임당이 그린 산수화로 인정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소세양의 시에 “늙은 중이 한가로이 바둑 두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본 송시열은 “부인의 그림에 승려를 운운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라면서 불교와 연관되는 것 자체를 강력히 반발한 것이다. 이렇게 송시열은 사임당의 그림을 유교적인 틀에 맞추어 해석하고자 했고, 사임당을 화가보다는 대유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만 인정하려고 한 것이다. --- p.296 초충도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앞서 말했듯이 대상 자체보다는 소재가 갖는 상징적 의미에 더 중점을 두었다. 상징성이란 특정 사물이 다른 세계를 연상시킨다든가 다른 사물과 흡사하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거기에 현실적인 욕망을 실어 그것이 성취되기를 비는 주술적 사고 원리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그 의미 또한 변화를 겪게 된다. 또한 상징성은 우리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동·식물들의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으로 양면성을 띠면서 나타난다. 우리 민족의 상징 세계는 다양한 모습들로 나타나기도 하며, 조상들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자한 생명성과 정신성을 엿볼 수 있다. --- p.318 이렇게 당대에 이미 ‘화가 신씨’로 이름을 날리고 높은 평가를 받았던 사임당은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깊은 모성과 사대부가 아녀자로서의 부덕을 잘 실천한 유교적인 여성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사임당의 난초 그림에 발문을 붙인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있었다. 송시열은 환국으로 집권 세력이 뒤바뀌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서인의 결속력을 높이고 집권 유지를 위해 서인의 정신적 근간이었던 율곡 이이를 신격화하기 위해 그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붙여 그녀를 송나라 후 부인에 견주었고,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통해 율곡을 기른 어머니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신사임당의 산수화 그림에 소세양이 붙였던 시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후 산수화에 대한 발문은 찾아볼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 후 율곡의 제자들의 발문도 초충도에 한정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인, 특히 노론계 유학자들에 의해서 화가로서의 사임당의 모습은 가능한 은폐되거나 왜곡되기 시작했고, 전통 유교사회가 강조했던 부덕을 잘 실천하여 율곡을 성인으로 만든 ‘율곡의 어머니’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이때 형성된 사임당에 대한 전통적이고 수동적인 이미지가 30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조선 사대부가 남성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지속된 것이다. --- pp.393-394 사임당이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거론되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서 전래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인 부덕의 상징으로 사임당을 추앙하면서 빠르게 공업화를 추진하던 과정에서 국가 발전을 위한 부녀자들의 희생을 요구하였다. 또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에 투영되어 ‘한국적 부덕의 사표(師表)’로 1970년대를 살아간 것이다. 여성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이 아닌 남성의 타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현모양처가 되어 버렸다. 2007년 신사임당이 새 화폐의 초상 인물로 선정되었을 때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박정희 정권 시대에 만들어진 현모양처 이미지 때문이다. 민주화의 실현으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점차 증가하고 이에 따라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임당의 남성 타자로서의 삶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아마도 사임당에 대한 논쟁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굳건히 살아 있는 한 시대를 거듭하더라도 계속될 거라 생각된다. --- p.395 |
|
사임당,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최근 사임당은 ‘현모양처’ 신화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중이다.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 조선 시대의 상황과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 등이 소개되면서 사임당은 자녀를 위해 희생했던 어머니나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아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 사임당은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살았던 예술가로 주목 받고 있다. 하지만 ‘친정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예술가’라는 평가도 있다. 사대부가의 여성으로 태어났고 시집살이를 하지 않아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임당 평전』은 친정이나 신분의 덕을 본 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엄밀한 고증을 통해 기존의 평가들을 뛰어넘고 치열하게 살았던 예술가 사임당의 참모습을 조명한다. 일평생 군자로 살고자 했던 주체적인 여성 저자는 먼저 사임당이 언제나 군자(君子)의 길을 걸었음을 다양한 문헌에 입각해 밝힌다. 조선 시대에 군자란 남성을 위한 말이었지 여성을 위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사임당을 군자라고 불렀다. 사임당은 군자로서 불의와 타협할 수 없었기에 남편이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을 하면 망설임 없이 지적했다. 7남매를 가르칠 때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자신부터 훌륭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아이들이 각자의 목표를 세울 수 있게 기다려 주었다. 군자 사임당은 스승 같은 어머니였고 망설임 없이 조언하는 아내였다. 규방 속에서만 살지도 않았다. 강원도·서울·경기도를 넘나드는 역동적인 삶 속에서도 피나는 노력으로 많은 작품을 완성해 냈다. 부단히 자신을 갈고닦아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이룬 예술가 사임당이 시와 그림에 능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오랜 시간 사임당의 미의식을 연구해 온 저자는 유가 미학을 근거로 사임당의 작품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길어 낸다. 사임당이 추구했던 가치들이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도 밝힌다. 어머니를 그리는 시 속에서 사임당의 지극한 효심을, ‘사임당서파(師任堂書派)’가 형성될 정도로 탁월했던 서예 작품에서 사임당의 올곧은 인격을, 화조도에서 사임당의 간절한 소망을 포착한다. 모든 분석에는 사대부들의 발문과 전문가의 평가가 꼼꼼하게 제시되어 있어 독자들은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사임당에 대한 각양각색의 평가를 두루 읽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사임당 평전』은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았던 예술가의 세계를 가장 정확하고 생생하게 소개한다. 90여 장의 선명한 도판은 시·글씨·그림·자수 작품에 깃들어 있는 사임당의 성품과 미의식을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산수화와 매화도에서는 군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임당의 의지를, 탐스러운 포도 그림에서는 엷은 먹빛과 짙은 먹빛의 절묘한 조화미를 느낄 수 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섬세한 묘사가 일품인 초충도에서는 미물들의 생명력은 물론, 가장 작고 평범한 생명들에 남다른 애정을 주었던 사임당의 따뜻한 시선까지 전해진다. 독자들은 소재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초월한 작품이 주는 편안함과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