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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장 새로운 정착지, 뉴베드퍼드 2장 실비아 이모 3장 유언장 소동 4장 '두 번째 페이지' 법정 소송 5장 도피 6장 벨로스폴스의 다크호스 7장 폭풍우를 몰고 오다 8장 브루클린의 백만장자 9장 후계자 수업 10장 무임승차를 하지 말라 11장 위트 넘치는 법정 소송 12장 여객선을 타고 13장 월스트리트의 마녀 14장 네드의 금의환향 15장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 것이다! 16장 라운드힐의 추억 17장 바람처럼 흩어지다 감사의 글 옮기고 나서 출처노트 참고자료 찾아보기 |
Charles Sl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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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적인 투자자들은 90년 이후 인터넷 투자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회사의 가치가 끊임없이 영원히 올라갈 것으로 믿어, 대기업들의 물탄주식을 대량으로 열심히 긁어모았다. 실제로 1903년 짧은 침체를 제외하고는 실체가 드러나는 1907년 초까지 이런 열광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거품이 빠질 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비롯 개인투자자들만은 아니었다. 많은 은행과 신탁회사들은 스스로 투기꾼이 되었고, 폭등한 주식을 담보로 무리한 대출을 해주었다. 주식은 3월이 되자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고, 7개월 뒤인 10월 21일, 뉴욕의 주요기업 가운데 하나인 유서 깊은 니커보커 신탁회사가 극심한 경영난에 부딪치면서 진정한 재앙이 시작되었다. 격렬한 인출쇄도로 말미암아 니커보커가 문을 닫은 다음 날, 1만 7천 명이나 되는 예금주들이 그들의 3천 5백만 달러를 빼가려고 앞을 다투어 달려들었으나 헛수고였다. 패닉은 1주일 내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 이와 관련된 은행 여섯 곳이 5천 7백만 달러를 날려 문을 닫았고, 더욱더 많은 곳에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패닉은 곧 뉴욕 전체에 퍼져 전국 은행을 위험에 빠트렸다.
헤티는 투기대열에 합류하라는 어떠한 유혹도 거절했다. 1905년 11월, 투기의 붐이 절정에 이르렀을 기간에 그녀는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말했다. “나는 뭐든지 가격이 낮고 아무도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시기에 그것을 사들입니다. 그러고서 나는 그것을 엄청나게 큰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고 있기라도 하듯이 고이 간직합니다. 그것의 가격이 올라가서 사람들이 사고 싶어 안달이 날 때까지 계속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즈니스 성공의 가장 일반적인 방책이죠.” 그녀는 여기에 덧붙였다. “나는 절대 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소유한 주식은 단순히 투자로 사들인 것이지, 절대 투기가 아닙니다.” 그녀의 말에는 분명히 파도 꼭대기를 잡아탄 투기꾼들에 대한 절망적인 혐오감이 표출되었다. 1907년경, 그녀의 지혜로운 투자 방법은 뼈저리게 명확함이 드러났다. 주가가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그녀는 불운한 투자자에게 연민을 느끼며, 그해 가을에 보스턴에 가 있는 동안 "타임스" 기자에게 말했다. “물탄주식의 실체를 보았나요? 그것은 중산층을 파멸시킵니다. 그들은 물탄주식을 아주 많이 보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쥐어짜졌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이 모두 강으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는 동안, 헤티는 자기 소유의 건물과 안전한 채권, 자신의 기준에 맞는 바이어에게 빌려주려고 준비한 현금 수천만 달러 등 실제 자산을 안정시켰다. 1907년 중반, 뉴욕시의 재원을 바싹 마르게 한 위기 상황이 닥쳤고, 조지 맥클레란 시장은 새로운 경찰관의 임명을 동결했고, 새로운 건설 프로젝트를 중지시켰으며 환경미화원들의 월급을 동결시켰다. 전에도 여러 차례 그랬던 것처럼, 헤티는 케미컬뱅크 계좌에서 110만 달러를 찾아 단기 세입담보채로 이율 5.5퍼센트에 빌려주었다. 그녀의 돈은 뉴욕시를 운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번 위기는 다른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는 데 반해, 특히 냉정함을 유지하는 헤티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파티 선물처럼 대출을 나누어주던 은행들은 깊은 시름에 빠져서, 종종 건실한 회사가 확장 차원에서 대출을 요청하는 것조차도 거절했다. 은행이 돈을 빌려줄 경우에는 담보로 내놓는 주식을 실제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은 금액으로 책정했다. 결국, 은행들은 보유한 수많은 가치 없는 서류를 해결하기로 했다. 스스로 필요한 대출금이나 담보를 없애야 하는 홉손의 선택(Hobson's choice)에 직면한 많은 회사는 그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헤티는 계속해서 대출을 하고, 주식의 가치를 시장가와 가깝게 쳐주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 pp.252~254 1885년 1월 15, 이날 「뉴욕증권거래소」는 문을 닫았다. 도시의 금융업자들은 로어 맨해튼에 불어닥친 겨울 한파에 대비하여 이미 코트를 잔뜩 껴입고 만반의 채비를 했다. 시스코앤선은 경영을 중지한다는 간결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을 필두로 주말까지 나쁜 소식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금융업자들은 궁리하여 선별작업을 해야만 했다. 시스코에 대한 루머가 며칠 동안 퍼져 나갔다고는 하지만, 막상 이런 성명이 발표되자, 월스트리트를 혼란에 빠져들게 했다. 시스코앤선은 여전히 신중한 회사로 알려졌었기에 사람들은 경솔한 추측은 하지 못한 상태였다. "뉴욕월드"는 다음날 이런 글을 실었다. '사실, 넓은 의미로 보면 이 은행은 투기사업을 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시스코은행은 무수한 개인과 법인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예치금을 받았고, 여러 철도회사의 재정적 대리인으로 활동했고, 많은 지방 은행가의 거래처였다. 또 이 은행에서는 유럽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에게 신용증서를 발행하는 광범위한 비즈니스를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평범한 재앙 이상의 실패를 안겨주었다.' 로어 맨해튼 주위의 은행가들과 투자자들, 금융담당 기자들은 즉시 시스코 가문이 무너진 데 대한 책임을 질 악역을 찾기 시작했다. 이미 폭로되었듯이,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노여움을 우선 휴스턴앤텍사스 센트럴의 리더인 콜리스 P. 헌팅턴에게 돌렸다. 이 사건에 흥미 이상의 관심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채권지급을 하지 못한 철도회사의 파산은 소량채권 소유자들을 무시한 헌팅턴과 그의 동맹자들이 계획하고 계산한 음흉한 계획인 재정적 재앙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채권 가격이 하락하자마자 헌팅턴 그룹은 비통한 채권 보유자들에게 아주 싼 가격으로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요즘 이런 행동을 했다간 헌팅턴과 그의 친구들은 증권거래위원회나 법무부의 자세한 조사를 받아 적어도 전기의자에 앉힐 수 있는 일이었다. --- p.142 “아무도 제대로 된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또 그녀가 구식 스타일에 다 낡은 검정 손가방을 들지 않은 모습을 본 사람도 거의 없다. 그녀의 외모는 검소하고 간소한 취향을 가진 구식 여성이라는 평 외에 뭐 달리 특별한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골목 잡화상이나 저 아래 빵집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돈의 위력으로 보면, 똑같은 사람인데도 그녀는 이 나라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사람이다.” --- p.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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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브스"선정 100대 부호 중 유일한 여성
지금 우리는 역사상 두 번째 맞는 공황이란 이름의 기회 앞에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불황이라는 강호(江湖)에서 당신의 멘토는 누구인가? 여기 대공황 시절 월가의 영웅(英雄)들과 자웅(雌雄)을 겨룬 ‘헤티’의 재화보전이 있다. 금융제국을 이룬 ‘검은 마녀’, 헤티 그린의 일대기 역사상 최고의 부를 이룬 여성 (2007년 "포브스" 조사) ‘월가의 마녀’란 별칭으로 더욱 익숙한 헤티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회자하는 복리(複利)의 마법사로 ‘역사상 최고의 부를 이룬 여성’이다. 또 19세기 미국 자본사에서 록펠러, 밴더빌트, 카네기, JP모건 등과 더불어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거물 자본가이다. 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께 경제신문을 읽어주며 서서히 비즈니스에 눈을 뜬 그녀는 여덟 살 때 스스로 용돈관리용 계좌를 만들었고, 열세 살부터는 가업인 포경회사의 업무를 도우면서 빠르게 금융시스템을 익혔다. 이런 개인적 자산과 재능은 놀라운 직감과 용기, 노련함, 욕심, 결단력 등과 함께 엄청난 부를 이룬 토대가 되었다. 철도 빅포(big four)의 거두 콜리스 헌팅턴과의 명승부를 포함해 당시 남성 자본가들과의 게임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관습에서 벗어난 미국 최초의 여성 ‘시민 케인’이라 불렸다. 여자에게는 투표권조차 없던 시절 수많은 관습과 금기에 맞서 싸운 여자, 천문학적 재산가이면서도 대중의 모멸과 언론의 비아냥으로 ‘수전노’의 대명사가 된 여자, 연일 뜨겁게 언론을 장식하던 이슈 메이커! 왜 그녀는 채 100년도 지나기 전에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비윤리적인 방법을 서슴지 않던 남성 자본가들의 모략과 그들보다 ‘우월한’ 그녀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재정제국을 통치했지만 ‘헤티’라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게 거의 없는 한 여성 자본가의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이야기. 100년 전, 대공황 시절 헤티는 무엇을 했을까?/ 위기가 곧 기회다. 융단 폭격을 퍼붓는 듯한 최근의 금융 소용돌이는 IMF체제 때보다 훨씬 커다란 불안심리와 공포를 준다. 온 나라가 들썩일 만큼 러시를 이루던 투자 열풍은 곤두박질 치는 주가 앞에 놀랄 겨를조차 없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촉발한 미국발 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순식간에 공황체계로 돌입시켰고 혼란에 빠진 투자자들은 어찌할지 모르고 방황한다. 이렇게 지금은 대단한 위기이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다.” 지금이 바로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10년 전 IMF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듯이, 100년 전 대공황에는 지금 자본주의 체제수호자로 군림하는 거대 금융회사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태껏 그들이 만든 금융 체제가 면면히 이어올 정도로 당시의 위기는 어떤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회와 행운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누구를 모델로 삼아야 할까? 자본주의에서 ‘부자’는 그 존재 자체가 로망이지만 부자가 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이다.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투자 법칙을 ‘증명’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그녀가 바로 헤티 그린이다. 그녀의 평전인 이 책은 한 사람의 전기일 뿐 아니라 놀라운 ‘부의 법칙’을 설파한 재화보전이다. 하지만, 결코 아무나 부자가 되는 건 아니다. 왜냐면 그 비결은 간단하지만 어렵기 때문이다. 기네스북에 오른 ‘역사상 최고의 수전노’ 이 기록은 대단히 불명예스럽지만 ‘월스트리트의 마녀’란 닉네임과 함께 헤티의 아이덴티티를 이룬다. 퀘이커교도였던 그녀는 지나칠 정도의 절약정신으로 많은 언론에 가십거리를 제공하고 세상 사람의 우스갯거리, 놀림거리가 된다. 그런 인색함은 그녀를 최고의 부자란 타이틀보다, 최고의 수전노로 기억하고 불리게 한다. 심지어는 아들의 다친 다리를 치료하지 않아 결국 장애인으로 만들었다는 오명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는 헤티의 유명세와 함께 상당한 과장이 섞여 있다. 아들 네드 그린은 평생 어머니를 가장 존경했다고 하며 아들에게 헌신했던 헤티의 흔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녀의 즐거움은 돈을 쓰는 것보다 버는 것에 있었으며 돈을 벌려면 ‘절약’해야 한다는 원칙을 실천했을 뿐이다. 단지 헤티가 가진 재산의 양이 너무나 엄청나서 정상적인 범인의 눈으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을 뿐이다. 헤티의 교훈 & 철칙 “부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절약하라.” “내려가면 사고 올라가면 팔아라. 그리고 절대로 흔들리지 마라.” 절약습관과 흔들리지 않은 재정철칙(복리투자)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다. 대공황조차 기회로 만든 불멸의 투자법칙! 당시 다른 자본가가 온갖 불법과, 범죄, 악행을 저지르면궼 축재한 것과 달리 헤티 그린은 놀랍도록 대단한 예지력과 불굴의 의지로 엄청난 재산을 만들었다. 그녀가 태어난 시절은 여자에게 투표권조차 없었으? 樂가에는 여자를 찾기도 어려웠다. 하물며 여자들은 비즈니스도 할 수 없는 하등 한 존재로 인식하던 때였다. 헤티 역시도 만약 남자 형제가 있었다면 한푼의 유산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그녀가 물려받은 재산도 자신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도록 신탁된 재산이었다. 당시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헤티의 탁월한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축재에만 온 힘을 쏟을 것 같은 이미지의 그녀지만 청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퀘이커교도로서 뿐 아니라 당시 아무도 모르게 행한 엄청난 사회적 기부는 거의 대부분 헤티의 선행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무튼 그녀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지니고도 단 한푼도 자신에게 허투루 쓰지 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행한 여인으로 기억돼야 한다. “헤티를 미워하거나 잊히게 한 건 대자본을 가진 괴팍한 여자에 대한 언론의 황색속성도 한 요인이지만, 대중이 부자에게 갖는 허위의식이나 대리만족에 부합하지 않은 요인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여성 재정가. 남북전쟁으로 탈진한 미국의 1860년대는 지금까지도 그들의 이름 자체가 자본주의와 동의어로 쓰이는 인물들이 성장한다. 이 특별한 세대가 금융이 지배하는 지금의 세상을 창출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의 ‘노상강도’라고 불리는 그들은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부려 먹고, 저임금을 주었다. 박봉을 받는 노동자 중에는 열한 살이나 열두 살 된 아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광산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손가락에서 피가 나도록 맨손으로 날카로운 석탄 조각을 분류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레드 팁(red tips)'이다. 세월이 흘러, 모건과 카네기, 록펠러는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이름이 사용되는 호화로운 자선행위인 박물관 건립과 도서관 건립, 대학 설립 등의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무자비하고 탐욕의 상징인 자신들의 이름을 자비와 예술적 취향, 공익에 대한 관심 등의 상징으로 바꾸어 놓는데 경악하리만큼 성공하였다. 헤티가 재산을 도서관이나 대학에 기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절대로 정부를 상대로 수천만 달러를 속이지 않았고, 이민 온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어먹거나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1860년대 초, 헤티는 불량 소총을 팔아먹지도 않았고, 돼지고기 가격을 바가지 씌우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는 그들과 다르게 단순하지만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투자방식으로 ‘역사상 최고의 여성 부자’가 되었다. 그 유명한 그녀의 잔혹성도 지극히 개인적인 캐릭터이며 여자들은 돈이나 숫자를 통제할 수 없다고 여기던 19세기에 남자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보인 게 죄라면 죄일까?. 아마 헤티가 지금 시대를 살았다면 어쩌면 시대의 우상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삶은 이미 부자이거나 부자이고픈 사람, 부자를 상대로 비즈니스하는 사람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을 줄 것이다. 왜? 뉴욕 5번가의 억만장자는 찬양하면서, 브루클린의 억만장자에겐 침을 뱉는가? 욕망을 좇는 세상 사람들은 백만장자의 거리(Millionaire's Row)라 불리는 뉴욕 5번가에다 궁전 같은 대저택을 짓고 사는 록펠러, 카네기, 플레글러, 벤더빌트, 구겐하임 등은 동경했지만, 그들 못지않은 엄청난 재산으로 여왕처럼 살 수 있던 헤티가 브루클린 자치구역의 임대아파트에서 월세를 내며 검소하게 사는 것은 오히려 비웃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 누구에게든, 그 무엇이든 절대로 빚지고 살면 안 된다고 배웠다. 심지어 친절까지도. 그렇게 평생 퀘이커교도의 자부심으로 검소와 청빈의 가치를 실천했지만, 그녀가 가진 재산의 부피가 워낙 천문학적이라 가십을 찾는 언론의 속성과 더불어 다른 대자본가를 사주로 둔 신문사의 삐뚤어진 논객은 그녀를 ‘수전노’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지금 세상은 그녀를 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