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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작품해설 찬란하여라, 시간의 금비늘들 제1부 벙어리장갑 사랑하고 싶은 날 눈 내리는 마을 벙어리장갑 태초(太初) 후 45억 년 쥐 고향 하동(河童) 봄 장독대 작은어머니 큰형 은행나무 봄 소식 잠지 송편 엄마 아빠 어버이날 제2부 연애 정말 거짓말 연애 굴비 쟈스민 차 둔치의 사랑 밤배 사랑의 잠 아기 고래 새 우포늪 선운사 배롱나무 우화(羽化)의 꿈 서역(西域)을 찾아서 명사산(鳴沙山) 카마수트라의 힌두 사내 오작교(烏鵲橋)빛 하늘 초등학교 동창회 돌거북 제3부 엘레지 엘레지 임금님 낚시 기러기의 삐삐 강화도 철새 1등 한 날의 그림일기 시 애기노루발풀 검버섯 고정간첩에 관한 명상 남작(男爵) 부인의 초대를 받은 날의 그림일기 감나무 내 마음의 정동진(正東津) 자화상 죽음에 관하여 축 당선 입관(入棺) 실비 오탁번 시인의 연보 |
오탁번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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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매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 p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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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아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벵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 p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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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음담과 유쾌한 풍자가 녹아 있는 순수 서정시
오탁번 시인의 이번 7번째 시집에는 대부분 어린이의 천진성과 어른의 분별력을 함께 지닌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순을 바라보는 연치에 그는 어린애의 시각으로 돌아가 마치 어린애가 장난감을 가지고 재미있게 놀듯 포착한 대상들을 천진하게 바라보고 자신의 시각에 의해 다양한 변조를 꾀하고 있다. 그 즐거움에 독자들도 동참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시를 엮어나가고 있다. 시인의 천진한 시선은 기억이 도달할 수 있는 과거의 시간에 관심을 갖고 그 과거의 시공 속에는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큰형, 누나 등의 인물이 살고 있고 어른으로서의 우주적 상상은 태초의 시공에서부터 현재의 자연 공간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처럼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시선은 모두 자연을 매개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탁번 시의 중요한 두 축은 가족애적 정감과 자연 조응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에도 오탁번 시인의 시의식의 두 측면이 정감 있게 나타나 있다. 그 굵은 두 축 주변에는 말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육체의 노화에 대한 자각, 슬픈 음담과 유쾌한 풍자 등의 요소가 시 안에 교차되어 있다.
대표적인 시 중 <굴비>에 등장하는 아내는, 음담을 다룬 내용이 그렇듯이, 머리가 모자라는 사람이거나 앞뒤를 모르는 답답한 사람이거나, 굴비도 얻고 외간 남자와 재미도 보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사람 정도로 대부분의 독자들은 생각하며 웃었을 만하다. 그러나 오탁번 시인은 웃기는커녕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탁번 시인은 과거에 겪었던 삶의 어려움을 떠올리며 <굴비>에 등장하는 아내를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남들이 다 웃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머금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시래기 죽으로 허기를 채우고 쥐와 벗 삼아 살았던 시인의 가난 체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거의 모든 시에 펼쳐져 있는 자연과의 조응도, 끈끈히 이어지는 가족간의 연민 어린 사랑도 바로 시간을 초월한 무한 자유의 실련을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