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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해의 배경
2. 오우진기와 귀화인의 집단이민 야마토 조정과 귀화인과의 관계 오우진기의 성격 『일본서기』의 기년 문제 3. 비문의 영락14년조와 왜한씨의 도래 비문의 영락14년조에 나오는 '대방계'의 위치 왜한씨의 선조 아지사주와 대방 4. 진의 도래와 비문의 영락 9년. 10년조 궁월군의 인부들의 도래에 관한 기사 비문의 영락9년. 10년조의 내용검토 진씨의 일본도래가 집단사민일 가능성 5. 비문의 신묘년조와 백제 아화왕의 옹립 신묘년조에 대한 기존학설의 검토 신묘조에 나타난 고구려의 시각 신묘년조 후반부의 내용분석 6. 여론 오우진기 3년.8년조의 '실례'. '무례' 오우진기 8년조에 인용된 『백제기』의 내용 실증적 자료로서의 광개토왕릉 비문의 가치 참고문헌 부록 : 일본천황의 명칭 대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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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하자면 수만명에 달하는 왜군(또는 왜. 가야의 연합군)이 신라를 점령하고 있다가 고구려군을 보자마자 경주에서 임나가라까지 도주하였다고 해석하면서, 몇 천명 내외에 불과한 안라인이 일본군(또는 금관가야)의 별동대로 활약하여 신라의 왕성을 다시 탈환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헛된 망상이다. 게다가 곧 설명하는 것처럼 '임나가라'는 경북 고령을 가리킨것이므로, 당시 금관가야가 신라침공을 주도하였다는 이야기는 초점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락10년조의 <안라인수병>을 명사로 보고 안라(安羅 : 지금의 경남 함안지방의 가야)사람들로 조직된 군사조직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타당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가야지역의 철기문화를 근거로 가야의 역사를 부풀리는 식의 이야기는 진정한 역사의 복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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