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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해안선
흙의 노래를 들어라 지옥 속의 낙원 망월동의 봄 만경강에서 도요새에 바친다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다시 숲에 대하여 찻잔 속의 낙원 숲은 죽지 않는다 땅에 묻히는 일에 대하여 그리운 것들 쪽으로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무기의 땅, 악기의 바다 복된 마을의 매맞는 소 고해 속의 무한강산 태양보다 밝은 노동의 등불 원형의 섬 충무공,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길들의 표정 산간마을 사람들 문경새재는 몇 굽이냐 가마 속의 고요한 불 가을빛 속으로의 출발 마지막 가을빛을 위한 르포 노령산맥 속의 IMF 시간과 강물 꽃피는 아이들 한강, 흐르지 않는 세월 강물이 살려낸 밤섬 조강에 이르러 한강은 자유가 된다 |
金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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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혜숙 ruru100@yes24.com
저널리스트이자 수필가, 소설가이기도 한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여행을 즐기고, 삶을 사랑하는 자의 긴 사색의 여로가 담겨 있다. 저자는 자전거로 국토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산을 따라 오르고, 다리를 넘어 비탈길을 향해 내려온다. 지난 해 가을부터 올 봄까지 '풍륜(風輪)'이라 이름 붙인 자전거에 몸을 의지하며 여기저기 내달린 흔적이 사진작가 이강빈의 사진과 함께 아름다운 문장으로 실렸다.
자전거가 밟는 길은 그 자체로 삶의 증거이다. 그는 오르막길 체인의 끊어질 듯한 마디마디에서, 기어의 톱니, 뒷바퀴 구동축의 베어링에서 삶의 부서짐과 태어남을 배운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는 없어도 살아서 바퀴를 굴려 가는 일이 바로 행복이고 기쁨이라고 말한다. 행간 사이사이 바람을 가르는 숨소리를 들으며 힘차게 페달을 밟아 오르는 그의 기운찬 몸짓이 느껴진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넘는 고개에서부터 남루한 바닷가 오지마을에 이르기까지 반도의 구석구석을 순례한 이 책의 화두는 자연과 사람이다. 저자는 자전거 여행으로 만나는 많은 풍경과 사람들을 섬세한 감정으로 읽고 있으며 문장 하나하나 짜내듯 다듬어 정교한 필체에 담아 낸다. '달에 이끌리는 서해는 발해만 깊숙이까지 가득 차올라 산둥 반도와 랴오둥 반도를 적시고, 한반도 서쪽 연안에 넘친다. 그 때, 연안은 부풀어오르고 서해에 닿는 모든 강들의 숨결은 낮아져서 강은 바다를 내륙 깊숙이 받는다. 달이 바다를 내륙 깊숙이 국토의 안쪽으로 밀어 올리고, 새떼들이 앉을 곳을 찾아 갯벌 쪽으로 날아올 때 밀물의 끝자락에 실리는 낡은 어선 몇 척 포구로 돌아온다.' 책을 따라 가다보면 겨울 영일만의 새벽바다에서 느끼는 밝은 빛의 기운이 마음에 와 닿고, 마암 분교 아이들의 자연과 어우러진 삶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가는 곳곳 만나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그리는 순례기에서 80년 5월의 비극이 남아 있는 광주 망월동에서 과거의 아픔을 담고 사는 사람들의 만남은 특히 인상적이다. 아직도 그 당시 가슴에 맞은 총알을 품고 사는 할머니, 다리에 총상을 입고 목발을 짚고 살아가는 청년. 잊혀지기엔 아직 과거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 있지만 삶 속에는 밥과 사랑이 원한과 치욕보다 먼저라고 말한다. "용서와 화해는 불가능한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가해자들은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고 화해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만일 용서를 빌어온다면 부둥켜안고 통곡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일이란 없었다." '아름다운 한국어의 밭'이란 평을 듣는 저자의 문구는 자유롭게 풍경을 스케치하며 조급하지 않게 세상 앞으로 한발 한 발 내디딘다. 이제 여행에 지친 늙고 병든 말처럼 다 망가져 버린 풍륜을 버리고 새 자전거를 장만했다는 저자는 자전거를 통해 세상과의 통정을 꿈꾸며 삶의 굴곡들에 대한 힘찬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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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강남 자전거 도로는 40킬로미터이다. 강동구 암사동 상수원보호구역 앞 강뚝에서 시작되는 이 도로는 하류의 김포대교 밑에서 끝난다. 점점 넓어지는 강을 따라서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싶으면 김포대교를 건너 자유로 방향을 따라서 경기 파주군 교하면의 오두산 통일전망대까지 가면 된다.
--- p. 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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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 온다.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나가는 일은 복되다. 길들의 표정(덕산재에서 물한리까지) - 신경준에게 길은 삶의 도덕적 가치와 상징들 사이로 뻗어나간 공적 개방성의 통로이다. 이 공적 개방성의 통로 위에서, 길을 가는 일은 달리기가 아니라 '행함'이고, 길의 의로움은 집의 어짊에서 출발해서 집의 어짊으로 돌아온다. 신경준의 지리책을 읽을 때, 집에서 길로 나가는 아침과 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은 본래 이처럼 신선하고 새로워야 마땅하다.
--- p.15, ---p.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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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전에, 자전거를 엎어놓고 닦고 조이고 기름쳤다. 서울서 가지고 간 장비들은 현지에서 출발하기 전에 버리고 또 버렸다. 수리 공구 한 개가 모자라도 산속에서 오도가도 못할 테지만, 장비가 무거우면 그 또한 오도가도 못한다. 스패너 뭉치와 드라이버 세트와 공기 펌프와 고무풀은 얼마나 사랑스런 원수덩어리인가. 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진대, 장비가 있어야만 몸을 살릴 수 있고, 장비가 없어야만 몸이 나아갈 수 있다.
출발전에 장비를 하나씩 점검해서 배낭에서 빼 버릴 때, 몸이 느끼는 두려움은 정직하다.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출발전에 장비를 하나씩 빼 버릴 때 삶은 혼자서 조용히 웃을 수밖에 없는 비애이며 모순이다. 몸이 그 가벼움과 무거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짊어지고 바퀴를 굴려 오르막을 오른다. --- 261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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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삶은 들여다본다. 그것을 성찰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지극히 단순한 언어에서 작가의 삶의 태도를 알아챈다. 때로는 종교적인 언어로 때로는 세속적인 언어로 누구나 쉽게 알아채게 풀어내고 있다. 작가는 아마도 不偏不黨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을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작가의 관조에서 고금의 역사에서 찾아진다.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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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 p.117
호텔이나 아파트의 여닫이문은 벽을 헐어내고 뚫은 문이다. 이 여닫이 문짝은 문 밖의 공간을 완벽히 차단하고 제거한다. 차단 기능이 클수록 좋은 문짝으로 꼽힌다. 아파트의 도어는 사람이 드나드는 순간에만 문이고 닫혀 있을 때는 벽이다. 그러니 문이라기보다는 벽에 가깝다. --- p. 150 몸 속으로 흐러 들어오는 산맥은 크고 포근하였다. 산봉우리에서 더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면 거기에 이미 봄이 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잎 진 숲과 마른 나뭇가지 사이사이에 신생의 희뿌연 기운은 서려 있다. 봄은 이산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이 산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봄은 늘 거기에 머물러 있는데, 다만 지금은 겨울일 뿐이다. --- p. 165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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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내면은 무겁게 짓눌려 있고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따. 그는 이 통제된 내면의 힘으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다.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들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그는 정치적 불운에 목숨을 저당 잡힌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의주 피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정치 상황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다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다. 매일매일 바다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그는 기록했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 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 pp.224-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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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의 풍경은 피난 행렬과도 같다. 남부여대해서 어린아이 손을 잡고 젖병 물병 얼음통을 챙겨서 가고 또 간다. 생활을 좀 밀쳐내기란 이처럼 어렵다. 지금 오대산의 전나무숲이나 치악산의 소나무숲, 담양의 대나무숲은 얼마나 깊고 푸르고 그윽할 것인가. 너무 멀고 또 길이 막히니 갈 수 없기가 십상이다. 산다는 일의 상처는 개별성의 훼손에서 온다. 삶은 인간을 완벽하게도 장악해서 여백을 허용치 않는다.
--- pp.86-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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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나무,갈참나무 떡갈나무숲 들의 신록은 거칠게 싱싱하다. 그 숲의 이파리들은 아름다움의 정교한 치장으로 세월을 보내지않고 여름의 검푸른 초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이 숲의 이파리들은 억센 사내들의 힘줄같은 잎맥을 가졌다.....
--- p.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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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는 태안반도의 남쪽으로 길게 뻗은 섬이다. 안면교를 건너서 섬으로 들어온 자전거는 섬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649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섬의 남쪽 끝인 고남리 젓개포구로 간다. 안면교를 넘어서면 창기리, 정당리, 승언리, 중장리 마을의 산과 들에 소나무숲이 펼쳐진다. 소나무숲을 만나면 자전거는 포장도로를 버리고 숲길로 들어선다. 안면도의 소나무숲은 마을의 숲이다. 대문 밖이 숲이고, 밭이 끝나는 곳이 숲이고, 울타리 너머가 숲이다. 숲의 신성은 멀고 우뚝한 것이 아니라 가깝고 친밀해서 사람의 숨결을 따라 몸 속으로 스미는 것임을 안면도 소나무숲 속에서는 알겠다. 안면도 소나무숲 속에서는 50년에서 90년 된, 혈통 좋은 소나무들이 우뚝우뚝하고 듬성듬성하게 들어서 있다.
--- pp.7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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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상징의 표정이 발랄하게 살아 있는 길 위를 저어가는 일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행복이다. 경남 거창에서 전북 무주와 충북 영동 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고개는 37번 국도의 신풍령, 30번 국도의 덕산재, 579번 지방도의 우두령들이다. 도마령은 나제통문 쪽에서 영동 쪽을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비포장 산간 도로이다.
이 옛길에는 아직 도로 번호가 없다. 이 고갯길들은 길다운 강인함과 길다운 느림과 길다운 겸허함의 표정으로 백두대간의 중허리를 남북으로 넘는다. 이 고갯길 사이사이에서 백두대간은 대덕산,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 각호산들과 거기서 흘러내린 수많은 봉우리들의 첩첩연봉을 이룬다. ........ 풍수엣 길의 상징과 물의 상징은 같다. 그것은 모두 공적소통의 조건들이다. 그래서 길의 표정은 그 길이 거느린 물의 표정을 닮는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골과 골을 휘돌아 흐르는 계곡물의 표정을 닮고 큰 강의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점점 넓어지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완만함이 있다. --- pp.229-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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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한심한 자식들. 아직도 살아서 저런 헛소리들을 나불거리고 있구나. 이 자식들아, 너희들하고 이제는 절교다. 절교인 것이다. 아, 다시는 저것들을 상종 안 해도 되는 이 자리의 적막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적막하게 갈란다. 병풍 뒤 칠성판 위에 누워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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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일방성에는 폭력이 숨어 있다. 이 폭력도 근대성의 일종이다. 소쇄원에는 공간의 중심이 없다. 소쇄원의 정자들은 좌향이 어긋나 있고, 면앙정은 그 아래로 펼쳐진 담양 들판을 정면으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소쇄원에서는 보는 쪽이 보여지고, 보여지는 쪽이 본다. 낙원에서는 남의 기쁨이 되는 것이 나의 기쁨인 모양이다. 정자에서는 시간이 공간을 흔든다. 낙원은 고착된 공간이 아니다. 소쇄원의 개울물은 작은 인공으로 거대한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인다. 이 인공의 장치는 자연을 모셔들이는 작은 징검다리와 같다. 이 징검다리의 표정은 수줍다. 정자 앞을 흐르는 개울물을 따라서 시간이 흘러서, 소쇄원의 공간은 흔들리면서 흘러간다.
--- p.4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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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5월의 찻잔 속에서는 이 접합부의 이음새가 드러나지 않는다. 꿰맨 자리가 없거나 꿰맨 자가 말끔한 곳이 낙원이다. 꿰맨 자리가 터지면 지옥인데, 이 세상의 모든 꿰맨 자리는 마침내 터지고, 기어이 터진다.
--- p.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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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돋아난 봄 냉이를 엷은 된장에 끓인 국이 아침 밥상에 올랐다. 모시조개 몇 마리도 국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 냄새만으로도 냉이국이란 걸 알아맞혔다. 아내는 기뻐했다. 국 한 모금이 몸과 마음 속에 새로운 천지를 열어주었다. 기쁨과 눈물이 없이는 넘길 수가 없는 국물이었다. 국물 속에 눈물이 섞여 있는 맛이었다. [...]몸 속으로 봄의 흙냄새가 자욱이 퍼지고 혈관을 따라가면서 마음의 응달에도 봄풀이 돋는 것 같았다.
된장의 친화력은 크고도 깊다. 된장의 친화력은 이중적이다. 된장은 국 속의 다른 재료들과 잘 사귀고, 그 사귐의 결과 인간의 안쪽으로 스민다. 이 친화의 기능은 비논리적이고 원형질적이어서, 분석되지 않는다.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 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 관계이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냄비 속에서 끓여지는 동안 냉이는 된장의 흡인력의 저항안으로 끌려들어가면서 또 거기에 저항했던 모양이다. 냉이의 저항의 흔적은 냉이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속으로 스미는 햇빛의 냄새, 싹터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 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 --- p.3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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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적막하지 않으면 산이 아니다. 산의 아름다움은 오직 적막을 바탕으로 해서만 말하여질 수 있다. 서울의 산은 적막하지 않다. 서울의 산은 도심과 가깝고 일상과 잇닿아 있다. 노적봉이나 만경봉 꼭대기에는 어린이들도 올라와서 논다. 휴일의 산이 군중으로 뒤덮이는 인산 이라 하더라도 산에는 여전히 적막과 일탈의 유혹이 있다.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더럽고 마음 속에서 먼지가 날릴수록 산의 유혹은 더욱 절박하다. 그 유혹은 흔히 하산길에 깨어져버리는 몽환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유혹이 없다면 누가 비지땀을 흘리며 이 만원 지하철 속 같은 인산을 오르겠는가.
--- p.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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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새처럼 옮겨 다니며 살수가 없음으로 이 기진 맥진한 강가에서 또 봄을 맞는다.살아갈수록 풀리고 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은 점점 더 고단하고 쓸쓸해진다.늙은 말이 무거운 짐을 싣고 네발로 서지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엉기는것 같다...--- p. 37
길은 어디에도 없다.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길은 다만 밀고 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뿐이다. --- p. 90 마루는 어떤가,마루는 고래의 불길이 닿지 않고 땅으로부터 일정한 높이로 떨어져 있다.그래서 마루는 서늘하고,불길이 닿지 않아도 습기가 없다.마루는 안방보다 훨씬 더 사회화한 공간이고 사회적으로 진화한 공간이다...--- p. 149 ---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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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홀트 메스너는 유럽 알피니즘의 거장이다. 그는 히말라야에 몸을 갈아서 없는 길을 헤치고 나갔다. 그는 늘 혼자서 갔다. 낭가파르바트의 8,000미터 연봉들을 그는 대원없이 혼자서 넘어왔다. 홀로 떠나기 전날밤. 그는 호텔방에서 장비를 점검하면서 울었다. 그는 무서워서 울었다. 그의 두려움은 추락이나 실종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때문에 짊어져야하는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에 슬픔이 섞여있는 한 그는 산속 어디에선가 죽을 것이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앞쪽으로는 진로가 없고 뒤쪽으로는 퇴로가 없다. 길은 밀고나가는 그 순간에만 있을뿐이다. 그는 산으로가는 단독자의 내면을 완성한다. 그는 외로움에서 슬픔을 제거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외로움의 크고 어두운 산맥을 키워나가는 힘으로 히말라야를 혼자서 넘어가고 낭가 파르바트 북벽의 일몰을 혼자서 바라본다. 그는 자신과 싸워서 이겨낸 만큼만 나아갈 수 있었고, 이길 수 없을때는 울면서 철수했다.
--- p.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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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없는 가난한 어부들은 죽어서 바닷가의 버려진 땅에 묻힌다. 포항이나 울진의 바닷가를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저어가면 이런 무덤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무덤들은 바닷가 잡초 속에서 봉분이 허물어져 있고, 풀들이 언제나 해풍에 쓸리고 있다. 바다가 사나운 날에 물가에 가까운 봉분들은 파도에 씻겨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농부가 밭에 묻히듯이, 가난한 어부들은 백골을 바다에 준다. 그 아들들이 다시 고기를 잡고, 쓸려나간 봉분의 흔적조차도 이제는 편안해 보인다. 바다가 춥고 땅이 따뜻한 것도 아닐 것이다.
--- p. 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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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은 자연림이지만 활엽수립처럼 자유의 산만함이 없다. 대숲은 가지런하고 단정하다. 봄의 대숲은 자작나무숲이나 오리나무숲처럼 생명의 기쁨으로 자지러지지 않고, 여름의 대숲은 다른 활엽수림처럼 비린내 나는 습기를 내뿜지 않는다. 대숲은 늘 스스로 서늘하고, 잘 말라서 질퍽거리지 않는다. 대숲은 늘 꿈속처럼 어둑어둑하다. 이것이 몽밀(夢密)이다. 대나무로는 무기도 만들고 악기도 만든다. 죽창과 피리가 모두 대나무다.
대나무로는 연장도 만들고 가구도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고 사군자도 친다. 세상을 깨부수고 바꾸려는 사람들은 대나무숲으로 와서 무기를 구했고, 세상을 버리고 숨으려는 사람들은 대나무숲으로 돌아와 누웠다. 그래서 대나무숲은 세상으로 가는 전진기지이며 세상을 버리고 돌아오는 후방의 쓸쓸한 낙원이다. 대나무 숲은 전투적 이념의 절정이며 은둔의 맨 뒷전인 것이다. --- p. 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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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의 조바심을 위로하고 복종태도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함대는 다만 군사적 이익을 위해서만 나아가고 물러났다. 전투를 포기하고 군대를 해산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의 외교적 요청에 대해 이순신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의 분노는 정치적 분노가 아니라 군사적 분노이다. 전쟁의 목적은 나라의 원수를 갚고 '적의 종자를 없애는 것'이며 이미 돌아갈 고향도 없다고 그는 임금에게 보낸 글에서 말했다....
그는 자비로운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는 무자비한 지휘관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군율을 어긴 부하들을 조용히 목베었다. 적전 초소이탈, 정보 유출, 투항 미수, 부녀자 강간, 영내 절도, 군수물자 횡령, 작전명령 불복종, 공문서 변조, 유언비어 유포, 허위 보고와 민간인의 개를 잡아먹은 부하들을 그는 목베고 가두고 때렸다. 전투에서 달아나 고향에 숨어있는 자들은 그 은신처까지 형리를 보내서 기어코 목베었다. 그의 일기에서 부하들을 목벤 일은 바다의 날씨를 기록하는 문장과 똑같이 단순 명료하다.... 이순신의 내면은 무겁게 짓눌려있고 삼엄하게 통제되어 있다. 그는 이 통제된 내면의 힘으로 무수한 아수라를 돌파한다. 난중일기와 그가 조정으로 보낸 전황보고서들은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정치적 불운에 목숨을 저당잡힌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의주 피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정치상황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바다의 사실에만 입각해 있었다. 매일매일 바다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그는 기록했다. 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무렵에 동풍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이순신의 죽음이 '의도된 전사'였으며, '위장된 자살'이었다는 주장은 매우 신빙성있는 정황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전후의 권력재편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다케다 신겐이 허수아비를 앞세우고 통과해나간 아수라를 이순신은 자신의 죽음으로 정리했다. 영웅이 아닌 우리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다. 역사는 모순이며 비애이다. 우리는 억눌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우리는 패션이 공격무기가 되는 세상에서 살기 싫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힘이 현실을 개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카게무샤>는 슬픈 영화다. --- p.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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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늘 병고에 신음했고, 슬픔과 기쁨에 몸을 적시는 정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나는 오늘 슬펐다'라고까지만 기록하는, 통제된 슬픔이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에는 수사적 장치가 없다. 이 통제된 슬픔의 힘이 '저녁 무렵에 동품이 잠들고 날이 흐렸다. 부하 아무개가 거듭 군율을 범하기로 베었다'같은 식의 놀라운 문장들을 쓰게 한다. 바람이 잠든 것과 부하를 죽인 일이 동등한 자격의 사실일 뿐이다.
--- p.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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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산에서 가장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숲은 자작나무숲이다. 하얀 나뭇가지에서 파스텔톤의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날 때 온 산에 푸른 축복이 넘친다. 자작나무숲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자작나무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와도 같다. 자작나무 잎들은 겨울이 거의 다 가까이 왔을 때 땅에 떨어지는데, 그 잎들은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그 이파리들은 이파리 하나하나가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바람을 감지하는 모양이다. 그 이파리들은 사람이 느끼는 바람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저마다 개별적으로 흔들리는 것이어서, 숲의 빛은 바다의 물비늘처럼 명멸한다. 사람이 바람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도 그 잎들은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은 멀리서 보면 빛들이 모여사는 숲처럼 보인다. 잎을 다 떨군 겨울에 자작나무숲은 흰 기둥만으로 빛난다. 그래서 자작나무숲의 기쁨과 평화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불러들일 만하다. 실제로 북방민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자작나무숲에 깃들이는 것으로 믿고 있다. 자작나무숲으로 간 혼백들은 복도 많다. --- p.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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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음악과 산하의 리듬이 길러낸 이 바위들은 바위 안에 물의 본질을 수용함으로써 바위의 단단함을 완성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바위라기보다는 생명의 안쪽을 통과해가는 시간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은 수만 년을 깎인 과거의 바위였고, 변화와 생성을 거듭해갈 미래의 바위였으며, 박힌 자리에서 흐르고 또 흐르는, 출렁거리는 바위였다.
--- pp.282~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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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화장실은 변소의 칸막이 담이 높지 않다. 쭈그리고 앉는 사람의 머리통이 밖에서 보인다. 똥을 누는 일은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 변소처럼 감옥 같은 공간에 갇혀서 해야 할 일도 아닐 성싶다. 똥을 누는 것은, 배설물을 밖으로 내어보내는, 자유와 해방의 행위다. 거기에는 서늘함과 홀가분함이 있어야 한다. 선암사 화장실은 이 자유의 낙웍인 것이다. 이 화장실에 앉으면 창살 사이로 꽃핀 매화나무며 눈 덮인 겨울 숲이 보인다. 화장실 위치는 높아서 변소에 앉은 사람은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 p.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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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전거로 쓴 기행문이다. 저자는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봄까지 풍륜이라 이름한 자신의 자전거 하나에 의지하여 태백산맥 소백산맥 그리고 반도 끝 구석구석을 순례하였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산골마을에서 바닷가의 남루한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충무공 같은 위인들에서부터 이름없는 오지의 촌로들과 분교의 아이들까지 자신의 두 바퀴에 담아온 이 땅의 풍경들을 이 책 속에서 핍진한 언어로 되살려내고 있다.
자전거가 보는 길, 자전거가 밟는 길은 그 자체로 인간의 흔적이 된다. 저자 특유의 미문과 범접할 수 없는 시선의 깊이는 바로 땀을 통해 일상 깊숙이 감춰져 있던 삶의 진리를 길어올린 데서 획득한 것이다. 이 때 자전거는 저자의 분신이자 행간마다 숨어 있는 성찰의 매개자로 작용한다. 폐달을 돌리는 저자의 땀오른 근육을 통해 자전거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얘기하고 나아가 모든 인간들의 삶의 굴곡들에 대해 힘찬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자전거를 통해 저자는 세상과의 통정을 꿈꾸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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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이라는 산문의 향기, 그 매혹적인 글쓰기에 대하여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김훈을 일러 ‘<문장가>라는 예스러운 명칭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시대의 몇 안되는 글쟁이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김훈은 저널리스트나 작가, 혹은 비평가라는 장르적 갈래의 사잇길에 있거나 그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글쓰기를 보여준다. 사물에 가닿는 시선의 폭과 깊이가 시인을 닮아 있다면, 그 감성을 풀어내는 언어는 평면적으로 보이는 사물과 풍경을 한 편의 소설처럼 극적으로 부조시킨다. 그 위에 날카로운 비평적 안목과 삶의 깊이를 견인해내는 지성이 가미된다.
가히 언어의 주술사라고 불리는 그의 글은 미문이면서도 결코 산만하거나 장식적이지 않고, 운위되는 것들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언어의 조임과 풀림이 자유자재이다. 그러한 문체의 자유로움은 읽는 이의 호흡을 강압적으로 조이지 않으면서도, 숲속을 어슬렁거리다가 일순 날카로움을 드러내는 맹수처럼 어느 순간 읽는 이의 마음속에 예리한 감각의 비수를 꽂는다. 그러나 그 비수는 결코 차갑거나 사납지 않다. 삶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온 따스함이 날 끝에 맺혀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