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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평전
양장
돌베개 200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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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중국어판 서문

1장. 시대적 분위기
‘천붕지해’ 시기의 사회적 모순
_ 명 말기 조정의 실패와 농민들의 대반란
_ 소규모 남명 왕조의 전복과 청 초기 통치자의 전략
경제구조에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
_ 명 말기 경제에서 나타난 변화
_ 청 초기 경제에 나타난 ‘이질’적인 요소의 확대
문화의 측면에서 나타난 역사적 변천
_ 유학의 변화로 본 시대의 특성
_ 실학을 숭상하는 기풍의 일면

2장. 인생 역정
소년시절의 생활환경
_ 황죽포에서 태어나다
_ 선성의 황 추관
_ 동림당 인사들의 몰락
_ 부친의 옥사
청년시절의 당인 활동
_ 북경에서 벌인 부친의 신원 활동
_ 학문 탐구와 교우 활동
_ 남도공게
계속된 항청 활동
_ ‘세충영’의 건립
_ 노왕을 수행하며 계속된 항청운동
_ 생명의 위험에도 웅대한 뜻을 꺾지 않다
유림에 몸담은 말년의 생애
_ 제자 양성과 강학 및 저술 활동
_ 절조를 지키며 변화에 순응하다

3장. 봉건정치체제에 대한 반성 속에 싹튼 민주계몽의식
‘주권재민’의식
정치체제에 대한 견제의식
‘공상개본’의식의 확립

4장. 이학과 심학의 정합
이학의 비판과 정합
심학의 비판과 정합
이학과 심학의 비판적 정합

5장. 절동사학 학풍의 확립
역사에 대한 식견
학안체의 창안
『명사』 편찬 과정에서의 역할과 영향
사학 분야의 주요 저술

6장. 문학의 이념과 창작
문학 이론
_ 시론
_ 문론
_ 곡론
시가의 창작
_ 지류
_ 풍격
부체의 창작
_ 함의와 정감
_ 특색과 풍격
역사문 및 전기문의 창작
_ 절개를 표창하고 충의를 찬양하다
_ 전통방식을 수용하되 새로운 생각을 표현하다
_ 장중하고 우울하며 간략하며 평이하다.

7장. 교육관, 경제관, 과학사상
교육관
경제관
과학사상

관련 지도
황종희 연보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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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2

쉬딩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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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定寶

1950년 절강성 영파시에서 태어났다. 영파사범학원(寧波師範學院) 중문과를 졸업하고, 남경사범대학(南京師範大學)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영파대학(寧波大學)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파대학 도서관장 겸 대학 부설 절동문화연구소(浙東文化硏究所) 소장을 맡고 있다. 오랫동안 중국고대문학과 ‘절동’ 지역의 문화사에 대해 연구와 강의를 병행해 온 저자는 특히 이 지역이 배출한 대사상가 황종희 연구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이 책 이외에도 『황종희시선』黃宗羲詩選, 『황종희연보』黃宗羲年譜(주편), 『능몽초연구』凌蒙初硏究, 『월요청자문화사』越窯靑瓷文化史(주편), 『절동문화
1950년 절강성 영파시에서 태어났다. 영파사범학원(寧波師範學院) 중문과를 졸업하고, 남경사범대학(南京師範大學)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영파대학(寧波大學)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영파대학 도서관장 겸 대학 부설 절동문화연구소(浙東文化硏究所) 소장을 맡고 있다. 오랫동안 중국고대문학과 ‘절동’ 지역의 문화사에 대해 연구와 강의를 병행해 온 저자는 특히 이 지역이 배출한 대사상가 황종희 연구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이 책 이외에도 『황종희시선』黃宗羲詩選, 『황종희연보』黃宗羲年譜(주편), 『능몽초연구』凌蒙初硏究, 『월요청자문화사』越窯靑瓷文化史(주편), 『절동문화개론』浙東文化槪論(부주편) 등이 있으며,『원매전집』袁枚全集의 표점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이외에도 중국의 여러 학술지에 총 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73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현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과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계속 수학했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번역기획공동체 ‘窓’의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신의 아들 홍수전과 태평천국』, 『삼국지 강의』(공역), 『사고전서』, 『황종희 평전』, 『건륭제』, 『만주족의 역사』, 『예교주의』, 『고대국가 부여의 역사: 고고학과 역사적 기억』(근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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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2월 2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656쪽 | 1050g | 153*224*35mm
ISBN13
9788971993293

출판사 리뷰

‘중국의 루소’라 불리는 17세기 유학자 황종희는 전제군주제의 폐단을 비판하고 ‘주권은 민의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원 총리의 황종희 심취는 중국 지도부가 민주화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이어서 지식인은 물론이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황종희 공부 열풍이 불었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보다 수십 년 앞서 출간된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은 새로운 사회를 갈망한 근대 지식인들에게 훌륭한 교과서 역할을 했다. 삼민주의로 유명한 손문(孫文)은 일본 망명 시절 혁명 단체인 ‘흥중회’를 결성하면서 이 책을 선전 팸플릿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양계초(梁啓超)는 『중국근삼백년학술사』에서 이 책을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유하고 황종희를 중국의 루소라 불렀다. 루소의 사상이 서구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중국의 근대화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개혁적인 내용 때문에 청나라 정부로부터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혁명 사상가 담사동(譚嗣同)은 전제군주 배척과 인권 존중의 측면에서 가장 탁월한 책이 『명이대방록』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황종희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의 부친 황존소는 동림당(東林黨)의 일원으로, 소년시절에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모진 탄압으로 옥사했다. 이와 같은 환경 탓에 명 말기의 극도로 불안한 정국 속에서 황종희의 삶과 사상은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청년이 된 그는 문학 결사인 ‘복사’(復社)에 참가하고 정의로운 선비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청군이 침입하자 그는 향리의 자제들을 규합하여 항전했지만 실패했고, 그후에도 반청 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청 왕조의 중국 지배가 확립되고 명 왕조가 부활할 가능성이 사라지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끝까지 명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고 강희제가 탁월한 선비들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한 박학홍유(博學鴻儒)로 추천되었으나 거절했고 명사관(明史館)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았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유종주(劉宗周)를 사사하여 양명학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공리공론을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을 중시했다. 또한 사학에도 전심하여 경학과 사학을 함께 연구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을 개발하여 청대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로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유학안』(明儒學案), 『송원학안』(宋元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등이 있고, 그가 창시한 ‘절동학파’(浙東學派)에서 만사동(萬斯同), 전조망(全祖望), 장학성(章學誠) 등의 우수한 역사학자가 나왔다.

황종희와 한국

황종희는 한국과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을까? 그와의 인연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지하다시피 소중화를 자처하던 조선의 선비들은 명을 중화로 섬기고 청을 오랑캐라 여겼기 때문에 병자호란 이후 이따금씩 연행사만 오갔을 뿐 양국의 본격적인 왕래는 거의 없었다. 조선의 실학자 가운데 상당수는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을 방문했던 이들이다.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김정희, 이서구, 홍대용 등의 실학자들은 청나라에 가서 당시 그곳에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던 경세치용학, 즉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 저명한 고증학자들이 저술한 실학적 내용을 담은 저서들을 조선으로 실어 날랐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 청의 문물에 대한 조선 선비들의 생각과 학술 교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중국 고증학자들의 경세치용학은 영ㆍ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ㆍ『경세유표』(經世遺表)ㆍ『흠흠신서』(欽欽新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 서유구(徐有)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등 각 분야에서 실학의 내용을 담은 저작들은 그런 학풍에 영향을 받아 집필된 것이다. 주자학 일변도의 강고한 조선 성리학 학풍에 물린 조선 유학자들에게 이러한 실학은 일대 충격이었다. 정조의 문체반정도 따지고 보면 그런 학풍과 문체에 영향 받은 조선 선비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조정의 단호한 조치였던 셈이다.

이후로 한국에서 황종희의 이름이 부각된 시기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기 유신 정권 성립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위기의 시대를 타개하기 위한 그의 아이디어가 담긴 『명이대방록』이 여러 차례 번역 소개된 것이다. 이는 당시에 휘몰아쳤던 민족주체성 발견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의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되새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진정한 ‘민주’의 뜻을 살피는 차원에서 300년 전 중국의 한 선비가 온몸으로 던졌던 질문에 귀기울여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

[내용 소개]

1장. 시대적 분위기
명말청초를 두고 황종희는 ‘천붕지해’(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다)의 시기라 부른다. 명의 멸망한 원인은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큰 원인은 무능한 황제와 부패한 관리들로 인한 내정의 실패, 이자성과 장헌충을 중심으로 한 농민 반란군의 흥기, 마지막으로 북방의 만주족 정권의 강력한 무력 침공을 들 수 있다. 전체 인구 대비로 보면 한족은 90%, 만주족은 2%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은 멸망하고야 만 것이다. 한족 지식인들은 분노를 곱씹었다. 황종희가 활약한 것은 이러한 난세였다. 그는 꺼져가는 명의 생명을 되살리고자 애썼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황종희는 명이 멸망한 원인을 분석했고 그것을 정치?경제?사회?사상?문화 등 제 분야에 걸쳐 학술적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2장. 인생 역정
황종희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소설 같은 삶이었다. 어린 시절에 부친은 난을 만나 죽었다. 이 장에서는 황종희가 살아온 86년의 생애가 네 단계로 구분되어 서술된다. 첫 번째 단계는 17세 이전의 생활, 즉 출생에서 약관에 부친을 여읜 시기(1610~1626)까지가 황종희의 소년시절이다. 두 번째 단계는 17세에서 36세까지, 북경에 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던 때부터 남명(南明)의 홍광(弘光) 정권이 멸망할 때까지(1626~1645)로, 바로 황종희가 말하는 ‘당인’(黨人)의 시기이다. 세번째 단계는 36세부터 53세까지, 노왕(魯王)의 감국(監國) 정권 때부터 남명의 영력(永歷)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1645~1662)로, 황종희가 반청복명(反淸復明)에 참가한 ‘유협’으로 살아간 시기이다. 네번째 단계는 53세부터 86세까지, 직접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을 편찬한 때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1662~1695)로, 황종희가 장장 30여 년 동안 강학(講學)과 저술을 하며 ‘유림’에 몸담은 학자로서 생활한 기간이다.

3장. 봉건정치체제에 대한 반성 속에 싹튼 민주계몽의식
황종희는 전통적인 봉건정치체제에 대해 깊이 반성했으며, 봉건정치체제의 부패와 죄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격렬한 규탄을 가했다. 그러나 분명히 봉건적인 군주제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황종희가 반대하고 질책한 것은 군주제도 내의 전제적인 형태와 군권의 남용과 집중이었지, 결코 군권 자체의 합리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황종희는 군주제도에서 군권이 운영되는 정상적인 질서를 수립하려 노력했다. 그는 이를 통해 주권이 백성에게 있다는 의식, 정치체제를 감독하려는 의식, 공업과 상업이 모두 근본이라는 의식 등 근대의 민주계몽의 색채를 띤 일련의 정치적 주장을 제기했다. 봉건적인 전통체제에 대한 황종희의 반성이 거대한 사상적 가치를 드러내고, 그로 인해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 때문이었다.

4장. 이학과 심학의 정합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명나라의 유로(遺老)들은 망국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심각하게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들은 이학(理學)이 리기(理氣)와 심성(心性)의 문제에만 너무 치중해 공리공담으로 전락함으로써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지 못한 것이 한 원인이라고 파악하고, 한족(漢族)의 문약함과 물질적 가난을 구제하고 당시 사회의 혼란상을 구제하려면 송명 이학을 비판·수정하여 현실의 행동 세계를 긍정하고 창조하는 데 기여하는 이론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청대 초기에서 청대 중기에 이르는 기간의 유학은 송명 이학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뿐 아니라 송명 이학의 관념적 세계관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 즉 경세치용의 학문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가장 먼저 이러한 경향을 내보였던 이는 유종주(劉宗周)였고 그를 사사한 황종희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특히 『명이대방록』을 완성한 후부터 그의 정주 이학(程朱理學)에 대한 비판과 육왕 심학(陸王心學)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런 비판 과정에서 양자의 좋은 요소를 취하여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냈다.

5장. 절동사학 학풍의 확립
황종희는 걸출한 역사가이다.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사학에 공헌했다. 치밀하고 독창적인 견해를 갖추었던 그는 사체(史體)도 창조적으로 표현했다. 청이 들어선 이후에는 『명사』(明史)의 찬수(撰修)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사학 저작은 후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것은 절동사학(浙東史學)의 기본정신의 기초를 다졌고, 그 자신도 청대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절동사학파’(浙東史學派)의 창시자가 되었다.

6장. 문학의 이념과 창작
황종희는 당대 문단에서 명성을 날리던 문학가이기도 했다. 그의 문학이념은 심미적인 견해를 갖추고 있고 강렬한 시대정신이 충만했다. 그의 시론(詩論)과 문론(文論)은 모두 당시 사회의 병폐를 경고하고 진실한 감정을 제창했으며 경세(經世)를 중시하고 실효(實效)를 강조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곡론(曲論)은 비록 온전한 논술은 없지만 희극(戱劇)에 대한 관념의 적극적인 변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문학창작은 형식이 다양하고 범위가 넓어 시(詩)도 있고 부(賦)도 있다. 그리고 산문의 창작에서 가장 탁월성을 발휘한 것은 역사전기문(歷史傳記文)이다. 황종희가 창작한 작품은 종종 이미지가 강렬하고 생동적이며, 자유자재로 써내려가면서도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시적 정취 중에는 항상 호연(浩然)하고 바른 기운이 흘렀고 문풍 속에는 수시로 향토적인 냄새가 넘쳤다. 사물을 묘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묘사하는 데 있었고, 사람을 묘사할 때에는 특히 그 사람 일생의 정신을 중시했다. 이 비범한 사상가의 안목과 재능은 각종 양식의 문학 창작에서도 충분히 표현되었다. 따라서 황종희를 청대 절시파(浙詩派)의 창시자이자 청 건국 이후의 유민(遺民) 작가군 중에서도 발군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7장. 교육관, 경제관, 과학사상
황종희는 공부를 함에 있어서 경학과 사학을 축으로 하고 문학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전인적 교육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당시로서는 최신 지식이라 할 수 있는 서양의 과학기술 성과까지도 교육 내용에 포함시켰다. 그 폭과 깊이에서 당시 최고 수준이 교육사상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황종희는 경제 분야에서도 탁월한 이론가였다. 당시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의 입장에 서서 세제 개혁을 주장했고, 공업과 상업이 괄시받던 시대에 ‘공상개본’(工商皆本)이라 하여 공업과 상업을, 농업과 마찬가지로 중시하는 앞서가는 선각자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공업과 상업이 진흥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유통하면서 화폐 사용의 중요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황종희는 중국의 과학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역법을 연구하고 책으로 출간했고, 지리학 분야에서도 다수의 저작을 집필했으며 수학 연구에도 잠심했다. 이외에도 음악 및 의학에도 널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경세치용적 관점에서 비롯된 이러한 광범위한 학문 연구는 평가할 만하다.

추천평

근대의 뿌리를 동아시아 전통시대 역사 속에서 찾으려는 작업은 중국과 식민지 조선에서 이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 물론 지나치게 목적론적으로 전근대의 ‘이단적’ 사상가들의 생각 속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는 것은 무리지만, 1930년대 이후의 연구로 우리는 다산과 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유교담론 속에 남아 있으면서도 성리학의 한계들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서구적 근대와 맥락이 닿아 있는 부분도 있지만 총체적으로 봤을 때 유교문화권의 자생적인 탈(脫)중세적 진일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산과 비견될 만한 중국의 사상가는 바로 황종희다. 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정치인이기도 한 그는, 유교담론 속에서 근대적 발전의 핵심이라고 할 ‘공’(公)의 윤리와 논리를 세웠다. 그가 주장한 법치의 확립과 감찰권 독립 그리고 학자들에 의한 ‘공론(公論) 정치’는, 이전 시대의 전제주의와의 확연한 단절과 새 시대로의 도약을 의미했으며,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당면과제를 생각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까지도 중요한 시사점들을 던져준다. 다산과 연암을 통해서 동아시아 실학의 일면을 이미 아는 한국인에게는, 철저한 비판적 고증정신으로 씌어진 쉬딩바오 선생의 이 책을 통해 실학의 거목 황종희의 사상을 배워 실학에 대한 국경 넘는 지역적 안목 갖기를 권고하고 싶다.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 교수)

바야흐로 명이(明夷)의 시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인가. 돌이켜보면 시대는 늘 그러했다. 황종희는 그런 시대에서 밝은 새벽을 기다리며 미래의 희망을 위한 청사진을 그렸다. 그 청사진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으니, 우리는 지적(知的) 평전의 한 모범이라 할 이 책을 통해, 황종희가 ‘그들의’ 과거완료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게 된다.
훌륭한 평전의 미덕으로 빼놓을 수 없는 시대 배경에 관한 서술에서 이 책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17세기 명말청초(明末淸初)라는 혼란과 전환의 시대를 그 정세, 경제, 문화와 사상 등에 걸쳐 종합적으로 조망함으로써, 황종희라는 전경(前景)의 모양새를 한층 더 분명하게 소묘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 표정훈 (번역가,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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