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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너머북스 201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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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top2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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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전사前史

1부 사림의 분열 _ 사림의 정치화
_ 리더십
1장 선조 8년~10년 : 분열의 시작
인순왕후 사망
애도의 정치성|선조, 정치를 시작하다|“낭천을 폐지하라”
‘동서분당’
미해결 살인사건|피혐과 처치|살인사건의 정치적 변주|이이의 처치|허봉과 박근원의 결합|박근원이란 인물|개성 유수, 경흥 부사|사건 배후의 구조
2장 선조 11년~13년 : 대립 구도의 성립
이수의 옥사
서인의 짧은 권세|선조 11년|같은 사건, 다른 처리|동인의 새 파트너, 구신
백인걸 상소 대필 사건
시비에서 정사로|시비와 정사의 여러 거리|“유자가 도를 행함이 이 정도뿐인가|이이에 대한 동인의 첫 공격|김우옹이란 인물

2부 이이의 시간 _ 사림의 이상, 정치의 현실
_ 프레임
3장 선조 13년 말~15년 : 이이의 분투와 좌절
정치의 한복판에 선 정치적이지 않은 이이
선조가 이이를 부른 이유|이이가 돌아온 이유|이이에 대한 동인의 시선|우성전 탄핵 사건|이경중 탄핵 사건|순진한 이이, 저돌적인 정인홍, 배후 조정자 이발
심의겸, 정철 탄핵 사건
수면과 저류|“이는 이발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이발, 정치를 하다|정철 문제에 불을 붙인 정인홍의 한마디
윤승훈 사건
정철은 외척인가|“윤승훈이 무슨 식견을 지녔겠습니까”|대신의 권위, 언관의 권위
일진일퇴
복상과 처치|이이, 선조에게 개혁을 호소하다|“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성혼 눈에 비친 이이
4장 선조 16년 : 계미삼찬
‘이탕개의 난’이 불러온 효과
여진의 성장, 선조의 충격|이이 개혁안과 선조의 변화|경안령 이요 사건
공론은 누구에게 있는가
계속되는 북방 상황|“전천|만군의 죄”|이이의 정체성|이이가 탄핵받은 진짜 이유|“이이를 공격하는 자가 소인이다”
좌절된 이이의 꿈
성혼의 상소|송응개의 상소|송기수라는 인물|기억의 당파성|“언관들이 간사한 것은 아닙니다|동인이 이해한 조제보합론|김우옹의 뒤늦은 상소|선조와 동인의 맞대결
대간의 말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공론|선조와 승정원의 갈등|“신들 역시 조종조 노신의 후예들입니다”|“심의겸이라는 함정”

3부 선조의 시간 _ 나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한 적이 없다
_ 관점의 현재성
5장 선조 17년~22년 : 불안한 평화
계미삼찬 후 조정 풍경
단호한 선조|“이이를 그르다고 한 것은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4월 14일? 4월 17일?|초조한 이이|이이의 입장은
조정의 재편
이이의 죽음|현상 유지|미묘한 변화|김우옹과 신응시|영의정 박순, 탄핵을 받다
선조의 정치
“내 뜻을 말하겠으니 사관은 기록하라”|선조의 이상한 하문|조정 밖 목소리|선조 18년 9월 2일 선조의 전교|이발의 복귀
6장 선조 22년 : 기축옥사 발발
고변에서 체포까지
고변서 접수 직후|고변서가 올라오기까지|정여립 체포에 실패하다|다복, 10월 14일 저녁에서 밤까지|온 산을 태워서라도 체포하라|죽음을 부르는 ‘적가문서’|주륙과 은택
국면의 전환
전주 생원 양천회의 상소|선조의 구언|정철의 복귀|정집의 진술, 김천일의 상소|낙안 교생 선홍복
공포의 정치
조정을 지배한 공포|선조, 사건을 일단락 짓다|이산해, 용 같은 사람|성혼의 상소

4부 파국
_ 책임
7장 정개청 옥사
정암수와 배명의 상소
호남의 중심, 나주|나사침 부자와 그 가문의 내력|구절의 대 배절의
투옥 과정과 심문의 쟁점들
홍여순이란 인물|고발 사유는 사라지고|「절의청담변」을 둘러싼 오해
정개청과 박순
‘배사론’|저마다의 기억|진실은?|향리 가문 출신 서원 원장
8장 최영경 옥사
기축옥사 이전의 최영경
성혼과의 만남|스승을 빼닮은 제자|『심경』이라는 책|최영경이 진주로 간 이유는|“미움이 규모를 달리하고”|“박순과 정철을 반드시 효시한 뒤에야”
‘삼봉즉경영설’의 부상
소문|알리바이
1차 수감, 정철과의 만남
두 가지 쟁점|정철의 올리지 않은 차자
2차 수감, 이이에 대한 기억
‘하늘 그물’|“말의 근거를 자세히 아뢰라”|“신이 한 말이 아닙니다”|죽음, 그 주변

에필로그
부록_1. 이조 및 삼사三司의 관직|사가독서자 일람표|연표: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까지|4. 인물정보
찾아보기

저자 소개 1

작가한마디
선조 대에 활약한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 ‘책임’이다. 사실,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각가 바로 그 사람 청체성의 좌표이고, 그가 맺은 사회적 관계의 액면가이다. 유학에서도 책임은 중심 주제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성리학만큼 강조한 사유 체계도 드물다. ‘수기치인’에서 치인은 세상에 대한 사대부의 책임감으로 설명된다.
퇴계학연구원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시대 대동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퇴계학사전 편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는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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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1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560쪽 | 801g | 153*221*25mm
ISBN13
9788994606446

책 속으로

조선왕조는 건국 당시부터 공론을 중시했다. 성리학을 국가 운영 원리로 삼아 건국한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국가적으로 공론을 중시한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헌법에 민주주의의 이상(理想)을 담았다고 해도 현실에서 법률적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당시 공론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갈등 요소는 누가 공론의 주체인가 하는 문제였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보면 공론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은 한결같지 않았다. 곡초에는 국왕이나 조정 대신들이 공론의 주체로 인식되었다. 18세기에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서 공론이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시기의 중간 즉 16, 17세기에는 공론이 아래 있고, 삼사, 심지어 성균관에 공론이 있다고 생각했다. 16세기는 국초의 공론 소재처에 관한 인식이 바뀌던 시기였다. 주목할 것은 이 시기 격렬하게 이어졌던 사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식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16세기에는 공론이 아래에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것이, 사림이 훈척정권을 물리치고 마침내 조정에서 주도권을 확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이다. 사림은 대신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도덕적 우위를 확신했고 자신들의 정치적 주도권을 당당히 주장했다. 문제는 선조 초 구세력이 힘을 잃고, 사림이 조정의 최고위직까지 올라가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치세력의 구도가 전처럼 ‘부도덕한 훈척대신’ 대 ‘도덕적인 사림’으로 나뉘어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사림 자체의 구조가 진화하여 ‘사림 대신’ 대 ‘사림 언관’으로 분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동서분당 이후 상황은 이러한 정치세력의 구조 변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또 그러한 현실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를 둘러싼 혼란이다. 강경파 동인은 ‘사림 대신’을 ‘부도덕한 훈척’으로 보려 했고, 이이는 ‘사림 대신’과 ‘사림 언관’을 포함한 새로운 구조를 만들려고 했다.
--- pp.195-196

이윽고 선조에게서 미묘한 태도 변화가 감지되었다. 이이 사후 채 두 달도 안 되서, 홍문관 수찬 심희수는 경연 조강朝講에서 선조의 태도 변화를 언급했다. 그는 “상께서 이이를 대우하시는 것이 살았을 때와 죽은 후가 다르니, 필시 그 뜻이 있으신 듯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당초 상께서 중론衆論을 물리치고 (이이를) 등용하셨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선조는 심희수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이가 죽은 뒤 자신이 그를 다르게 대우한 일이 없고, 중론을 물리치고 이이를 등용했던 것은 아니며 자신은 다만 간신들의 사설邪說을 물리쳤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요컨대, 자신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원칙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선조의 주장보다는 심희수의 의문이 조정에서 새롭게 전개되는 상황에 좀 더 가까웠다. 송응개, 박근원, 허봉이 북쪽 변방 오지로 귀양 간 직후, 이조 좌랑 김홍민이 선조의 조치를 비판했었다. 그러자 선조는 “나도 주희의 말을 본받아 이이,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나를 이이, 성혼의 당이라고 부르도록 하여라.”라고 말한 바 있다. 불과 반년 만에 선조는 자신의 이전 말과 크게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이이와의 거리를 벌리면서 선조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해 나갔다. 이이를 추가로 포상하는 은전이 필요하다고 박순이 건의했다. 이에 대해 선조는 대신들과 의논하라고 말했다. 당시 좌상은 노수신, 우상은 정유길이었다. 이들은 박순의 건의에 동의했다. 하지만 선조는 약간의 추가적 은전만을 허락했을 뿐, 관직 추증을 포함해서 박순이 요청했던 수준의 은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이 사망 후 채 두 달이 못 되었을 때 일이다.

--- pp.263-264

출판사 리뷰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이 아닌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열렸지만


선조 5, 6년. 삼사의 청직에서 최고 요직까지 모두 사림이 차지했는데도 좋은 정치가 이뤄지지 않자 이이는 당황하고 고민했다. 그 결과가 선조 7년 1월에 나온 「만언봉사」였다.

“정치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나도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수기’된 군자가 집권을 하면 ‘치인’이 된다는 믿음, 성군과 현신이 만나면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선조대 초반을 경과하면서 흔들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의도와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 의도가 좋다고 반드시 좋을 결과가 온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의도가 아닌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이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이 아닌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즉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새로운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됐다고 생각했을 때 이이는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이이가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백성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이의 그 책임 의식이 상황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게 했던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이이만이 그것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이는 다음 시대에 대동법으로 귀결된 개혁의 아이디어를 사실상 처음 공론화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그들 중 국소수가 살아남아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역사를 좀더 길게 볼 때 광해군, 인조, 효종대가 대동법 등 정책 생산이 가능했던 시대라면, 선조대는 대동법을 만들어갔던 시대의 아버지 세대로 정치세력이 갈등했던 시대였다. 정책 생산은 정치세력의 형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도 개혁이 절실하고 그것을 위한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과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이이의 보합조제론도 이런 맥락이었다. 그는 국정개혁과 정치세력화 둘 다 하려다가 결국 하나도 못 이룬 것이다. 저자는 기존의 당쟁론이나 붕당론이 아닌 이러한 관점에서 선조대의 정치세력의 갈등 양상을 다시 해석한다. 「만언봉사」나 나올 무렵 거의 동시적으로 발발하는 당쟁의 격랑에서 이이에게 국정개혁을 할 정치적 공간과 기회가 과연 있었을까?

사림은 왜 분열했을까?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으로 분열을 정당화하다


당쟁은 이듬해인 선조 8년에 발생했다. 1월 명종비 인순왕후가 죽자 선조는 비로소 자신의 정치를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한 미해결 살인사건에서 시작된 ‘동서분당’ 사태는 김효원과 심의겸을 지방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사림이 무리지어 공개적으로 갈등하는 양상은 이후 국면을 바뀌며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시적으로 서인이 승리한 듯했으나 동인세력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강해졌다.
선조 11년, 12년은 동서 갈등의 진정한 전환점이었다. 이른바 ‘이수의 옥사’와 ‘백인걸 상소 대필 사건’을 거치면서 동인과 서인은 각각 인적 구성과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신념 혹은 대의명분을 갖추었다. 구신과 결합하기 시작한 동인은 자신들과 서인을 선과 악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조정이 ‘외척세력 서인’ 대 ‘진정한 사림 동인’으로 대립한다고 인식했다. 즉 서인 전부를 외척 심의겸의 당여라고 주장했으며 나중에는 이이까지도 심의겸의 당여로 보고 또 그렇게 공격했다. 서인을 ‘친심’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동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공격 방식이었다.
저자는 동서분당 사태 이후 잇달아 벌어지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움직임이 만든 당쟁의 사실(史實)을 엄밀하고도 깨알같이 적시해간다. 이이와 선조는 한순간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김효원과 심의겸은 갈등의 언설 속에 있을 뿐 현실에서는 비중이 없다. 대신에 김우옹, 이발, 성혼, 류성룡, 이산해 등이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림은 왜 분열했을까? 물론 어떤 시대의 정치에도 나타나기 마련인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이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한다. 사림의 분열은 스스로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확신에 기인했다고 한다. 사림(동인)의 강력한 힘은 그들이 가진 도덕성에 있었다. 그 도덕성은 적어도 두 세대에 걸친 사화의 시대를 이겨낸 힘이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하고 분열을 정당화 하는 기제는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이었다. 젊은 사림이 가졌던 도덕적 확신은 역설적이지만 앞 시대 훈척정치가 물려준 유산이었다. 그들이 가진 도덕적 신념은 그 자체로 정당할 뿐 아니라, 불의하고 강력했던 권력을 물리친 정치적 참호이자 무기였다. 도덕적 신념은 고유한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정철과 최영경은 서로를 미워했지만, 흥미롭게도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비슷했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지나치고, 다른 사람 의견을 구차히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단 두 사람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도덕적 확신에 찬 사림은 결국 그것보다 더 강력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의 자장(磁場)으로 빨려들고 마침내 함몰되었다.
이 책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역사적 사고를 하게 한다. 가장 치열했던 진정성조차 시대적 상황에 지배된다는 것, 앞 시대의 ‘정치적 올바름’이 뒷시대까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같은 신념으로 뭉쳤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인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공동체 다수의 객관적 요구가 중요하다는 것, 대의를 잊으면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등이다. 과거는 쉽게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이는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 했고,
대간들은 사회적 결과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선조 8년 인순왕후 사망이 촉발시킨 두 가지 현상, 즉 선조가 자신의 정치를 시작하고 사림이 분열하기 시작한 가운데 이이의 입지가 좁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림이 분열할수록 선조의 주도권은 강해졌고, 사림은 권력에 대한 욕망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어갔다. 선조 8년부터 이이가 사망한 선조 17년까지, 이 구조는 몇 차례 무게중심을 옮기며 유동했지만 계속 유지되었다. 이 책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조에서 이이는 마치 덫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이때 이이가 요구한 국정개혁의 핵심은 공안(貢案)개정, 수령 숫자감축, 감사 구임 등이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은 사림의 대동단결 즉 당파간 조제·보합이 필요했다. 사림이 힘을 합해도 개혁이 어려운데 분열되어서는 가망이 없다는 인식이었다. 다음은 대신이 실제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언관들을 중심으로 공론이 독점되었고, 조정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삼사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던 ‘처치’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국가경영을 할 대신들의 힘이 현저히 약화된 것이 문제라 여겼던 것이다.
이이의 국정 개혁안은 선조와 동료의 외면으로 결국 실패한다. 두 가지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동료의 외면이었다. 이이는 믿었던 이발, 류성룡, 김우옹, 이산해 등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류성룡은 “개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이가 특히 기대했던 김우옹은 계미삼찬 직후 상소에 “이이를 그르다고 한 것은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라고 썼다. 실낱 같은 개혁의 가능성은 지워졌다. 이들은 우선순위 면에서 국정개혁이 당파 간 시비(是非, 옮고 그름)와 정사(正邪, 바르고 삿된)를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세력 간의 시비가 아닌 민생개혁에 대한 추구가 자신들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사림은 분열했고, 그것은 선조의 독재로 이어졌다.
선조 대 조정에서 여러 정치적 행위자들은 정치적 책임을 지는 데 결국은 모두 실패했다. 이이는 개인으로는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 했고, 대간들은 사회적 결과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지위에 있었음에도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던 사람은 선조였다.

선조는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지위에 있었음에도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다


이 책에서 동과 서의 갈등과 분열의 현장에서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가장 주목되는 인물이 선조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조는 양 진영이 극단으로 치솟는 갈등의 상황에서 정국의 주도권자가 되었다. 특히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기축옥사 과정에서 선조는 거의 완전하게 조정을 장악하고 관료들에게 거의 제한받지 않은 독재에 가까운 권력 구축에 성공했다.
선조는 서인과 동인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이쪽저쪽으로 옮겨가며 명망 있는 인물을 정치적으로 소비했다. 이이, 박순, 이산해, 류성룡, 정철, 성혼, 이원익, 노수신 등이다. 그들은 정치적 용도가 다했다고 판단되면 버려졌다. 이이는 그렇게 되기 전에 갑자기 사망했지만, 더 오래 살았어도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선조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철에게 위관을 맡도록 강제했다. 이것이 가져올 당파적 갈등과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최대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은 것이다. 그는 왕이라는 제도가 자신에게 제공한 것을 최대한 이용했고 또 누렸다. 하지만 그것을 토대로 가능한 공적 이상(理想)의 정책적 구현에 무관심했다. 선조는 정치 상황 및 그 결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선조를 통해 정치적 힘과 정치적 책임은 분리되었고, 자연스럽게도 그것은 국정의 무정부적 상태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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