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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6세기 일기문학으로서 『성재일기』의 성격과 의의
서론 | 『성재일기』 이전 혹은 그에 빠진 부분 | 『성재일기』의 일기문학으로서 성격 | 『성재일기』의 일기문학사적 의의와 가치 | 결론 2장 16세기 경상도 예안의 사족, 성재 금난수의 삶과 교유 금난수와 『성재일기』 | 도학적 동반자로서의 교유 | 출사 시기의 교유 | 일상생활 속에서의 교유 | 교유는 생존 기반이자 삶 자체 3장 금난수는 왜 남은 아들들을 과거 시험장으로 보냈을까? 서론 | 16세기 중후반 예안현의 사족 금난수 | 문집과 일기를 통해 읽는 인물 | 『성재일기』에 나타난 과거 관련 기록 | 결론: 성공적으로 치러낸 사족으로서의 통과의례 4장 성재 금난수의 학문과 실천 활동 서론 | 퇴계 정신을 계승한 실천적 위기지학 | 위기지학에 근거한 사회적 실천 활동 | 결론 5장 예안 선비 금난수의 수학과 거업 서론 | 이황을 만나기 이전의 금난수 | 이황 제자가 된 이후 | 금난수와 조목 | 위기지학과 거업 | 관직에 나서며 | 결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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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겪어, 당시 고향에서 의병 활동을 벌이고 그에 지지하면서 조정의 소식에도 관심을 가지며 변란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이러한 과정과 모습이 『성재일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재지 사족의 실제 삶과 당대 실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성재일기』는 성재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쟁과 일상의 일을 기록한 점에서, 기존에 16세기 일기의 특성으로 장덕순이 지적한 ‘공적 사건 서술’과 ‘개인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도 활약한 성재의 실제 관심사를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임진왜란 시기에도 일상의 ‘봉제사접빈객’ 또한 꾸준히 기록하고 있는 점에서, 일찍이 주목받았던 『쇄미록』과 같은 특성, 전쟁일기이자 생활일기로서의 성격도 공유한다.
--- p.13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금난수는 조목과 이황의 충실한 제자였으며 그의 삶은 두 사람의 절대적 영향 아래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퇴계학파의 일원으로서 금난수를 이해할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족들의 교유 양상을 이해할 때는 이와 별개로 중요한 측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교유를 통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성취했는지를,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의 금난수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즉 금난수가 이황과 조목이라는 절대적 존재에 의해 규정 지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 영위해 가는 삶의 모습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교유 행위가 갖는 실존적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도학에 대한 열망도 있었지만 동시에 입신과 출세를 향한 의지도 있었으며,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을 것이다. 이점에서 조선 시대 사족들의 생활상과 관련하여 금난수 연구의 의의는 특별할 것이 없는 그의 ‘평범함’에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 말은 금난수 연구를 통해서 조선 시대 사족들의 일반적 모습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 p.62 교유의 상대는 대개 관직에 있거나 관직을 바라보고 도성을 출입하던 인사들이었고 그 중심에는 지연, 혈연으로 맺어진 지인들과 특히 이황 문하의 동문들이 있었다. 그들은 요긴한 정보를 주고받았고 필요한 편의와 도움을 제공했다. 일기를 보면 각종 정보의 원활한 유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정보는 혈맥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교유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들이 출사시기에 이루어진 교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중앙의 여러 요인들을 만났다는 점도 출사기 교유의 특징인데, 대표적인 예가 이이 같은 사람이다. 그는 여러 차례 경릉 참봉으로 있던 금난수의 처소를 방문했으며 금난수도 이를 인연으로 찾아가서 업무를 의논하기도 했다. 이이에 대한 금난수의 평가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 p.73 분명한 사실은 그가 50세에 제릉 참봉에 임직하면서부터 위기지학에 대한 편향된 고집은 이미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반대로 높은 관직이나 봉록(俸祿)을 지향하는 출세주의자로 전향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만년에 그가 성주 판관(星州判官)이나 익위사 익위에 임명 되었음에도 부임하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 직급이 낮은 봉화 현감에 부 임했던 사실이나 또 예안 현감의 감독을 받던 수성장의 직책을 기꺼이 맡았던 사실을 보면 그러한 생각 또한 적절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러한 태도를 보였던 것일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사림에서의 그의 위상과 그의 관직 위계와의 괴리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친교의 자리에서는 당상관들과도 자연스레 어울렸고, 또 율곡조차도 여러 차례 그를 방문하여 얘기를 나누었음을 볼 때, 실천 적인 성격을 지녔던 그가 중앙 정계에서의 낮은 관직의 한계를 자연스럽게 절감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백성들의 실질적인 삶의 개선을 도모했던 그의 실천적 위기지학의 영향도 아마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 p.195 이황의 예안 제자들은 기꺼이 과거 시험을 포기하면서 위기지학으로 자신들의 생애를 마치려했다. 인격적 완성을 통한 자존감의 증대가 사회적 출세가 주는 명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그것도 개인마다 차이가 있었다. 이황은 제자들이 뜨겁게 공명하는 바로 그 공간에서 자신의 사상적 성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제자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이황 사후에도 식지 않았다. 그러한 존경과 사랑이 ‘퇴계학’의 부상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인격적 완성을 통한 자존감의 증대가 사회적 출세가 주는 명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p.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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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되는 일기문학의 중요성
개인 일기에서 시대 읽기의 초석으로 최근 역사 연구는 국가나 민족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개인적이고 일상의 소소한 담론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조직이나 집단의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눈으로 당시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향이 보다 생동감 넘치고 다채롭기 때문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역시 역사 연구의 흐름에 따라 10여 종이 넘는 일기문학을 재조명해왔다. 특히 사대부의 일기는 관찬 사료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시대 생활사를 복원하는 데 더없이 귀중한 사료다. 그 가운데 특히 성재일기는 그날그날의 날씨, 수시로 모시는 제사, 가족의 건강과 간병, 열었던 계회와 유람, 본인과 자제들의 과거 시험 일정과 공부 내용, 시대적으로 중요한 사건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16세기 영남권역의 일상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개인적인 삶과 더불어 당시의 사회상 또한 들여다 볼 수 있는데 이는 사회가 실제로 어떻게 이해되고 움직였는지 생생하게 알아보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마을의 지도자로서 의병 활동을 벌이고 조정의 소식에도 관심을 가지며 적극적으로 대처한 사실을 기록한 부분이 그렇다. 이처럼 생활일기로서 뿐만 아니라 전쟁일기, 더 나아가 관인일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 문헌은 다양한 각도에서 시대를 살피고 고찰하는 데 중요한 텍스트로 연구 가치가 있다. 이번 책에서는 총 다섯 명의 연구진이 참여했는데 이연순 강사는 『성재일기』의 ‘일기문학’적 가치를, 김종석 연구원은 금난수가 이황 사상의 발전을 위해 주로 펼쳤던 교유 활동 기록을 조사했으며, 박청미 강사는 위기지학의 신념을 지키던 금난수가 왜 아들들을 과거에 급제시키기 위해 노력했는지 면밀히 살펴본다. 또한 안영석 교수와 이정철 강사는 금난수가 퇴계 정신을 계승해 실천적 위기지학을 행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그의 사상을 이어가기 위해 펼친 활동을 굵직하게 따라간다. 친사존숭, 애민애향, 위민구국의 선비 금난수 그가 보여준 함께 나아가는 삶의 아름다움 성재 금난수는 이황의 제자로 ‘위기지학’을 삶의 중심점에 두고 다양한 사회적 실천 활동을 펼쳐왔다. 위기지학은 이황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남들에게 보여지는 자기 자신의 모습보다 스스로 세운 신념과 다짐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이런 스승의 가르침을 따랐던 성재는 높은 관직을 탐하기보다 자신의 뿌리인 고향에 머물며 지방 사회의 주춧돌 역할을 한다. 먼저 친사존숭의 학문 활동으로 스승의 저술 작업을 돕는 것은 물론 공동 참여했고 역동서원 등 교육 시설 건립에도 힘썼다. 이황의 최측근이었던 조목을 따라 퇴계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재 『주자서절요』를 작업했고 후에는 『심경의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류성룡에게 위요를 부탁하거나 이이에게 아들의 교육을 부탁하는 등 다른 학맥과 품계의 사람들과도 꾸준히 교유하며 학문의 장을 넓혀 나갔다. 또한 애민애향의 사회적 실천 활동으로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세운 향촌의 자치 규약을 만드는 데 힘썼다. 대표적으로 고향 지역의 문인들이 무리하게 인근 토지를 서원에 부속시키는 것에 반대했고 후에 토착민들의 농지와 점포를 지키기 위해 향약을 만들어 인근 관청과 향리에 전파했다. 위민구국의 애국적 실천 활동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집하여 조직하는 형태로 드러났다. 아들 중 한 명은 군수를 담당했으며 백성들의 형편을 고려해 명군의 보급 역시 지원했다. 이렇게 위기지학의 삶을 꾸준히 실천해온 금난수지만 지방의 한 사족으로서 고을을 가꾸고 키워나가는 데 한계를 느낀 흔적이 일기를 통해 드문드문 드러난다. 마을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향촌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근본적인 해결방침이 되긴 어렵다는 생각에 아들들은 과거에 급제하도록 돕는다. 개인의 명예와 욕심보다는 향촌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성재일기』에는 개인적인 성취보다 함께 나아가는 삶을 택한 금난수의 지조와 정취가 그대로 묻어 있다. 이황의 신념을 이어받아 학문, 향촌, 나라를 위해 실천적 삶을 살아온 그의 행보는 개인주의적이며 목표지향적인 현대인에게 연대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