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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로 본 사족의 의례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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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책소개

목차

책머리에

1장

『운천호종일기』에 수록된 임진전쟁기 선조의 외교 의례 시행과 의미 · 신진혜
머리말 | 임진전쟁기 외교 의례의 양상 | 『운천호종일기』 선조 26년 8월의 의례 기록 분석 | 맺음말

2장

권문해의 『초간일기』에 기록된 16세기 후반 외방 기양제의 사례와 그 의미 · 김성희
머리말 | 권문해의 생애와 『초간일기』 | 『초간일기』 수록 기양제의 기사의 역사성 | 『초간일기』 수록 기양제의 치제 기록 분석 | 맺음말

3장

18세기 대구 옻골 최흥원 가족의 기제사 실천 양상 · 박미선
머리말 | 백불암 최홍원과 그의 가문 | 기제사 실천의 양상 | 기제사 실천의 특징 | 맺음말

4장

『하와일록』을 통해 본 안동 사족 류의목의 일생 의례 · 윤혜민
머리말 | 부친 류선조에 대한 상례 | 관례와 혼례의 실행 | 맺음말

5장

일기를 통해 본 승문원 관원의 면신례 시행 양상 - 『계암일록』과 『청대일기』를 중심으로 · 임혜련
머리말 | 문과 급제자의 승문원 분관과 면신례 | 면신례의 시작, 신급제 침희 | 승문원 권지의 회자 | 허참례 시행, 면신례의 마침 | 맺음말 : 면신례의 폐해, 그럼에도 중요한 의미

저자 소개 6

광주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대학원에서 「조선 후기 종묘의례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서로는 『조선시대 의례 연구의 현황과 지평의 확장』 『외규장각 의궤 연구: 공신녹훈(功臣錄勳)』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임진전쟁기 종묘의 소실과 재건 과정 연구」 「정조 2년(1778) 영조·진종의 ?廟와 ?의 기록」 「조선후기 各道의 薦新進上과 그 禮獻의 의미」 외 다수가 있다.

신진혜의 다른 상품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동국대학교 사학과에서 「조선 숙종의 군신의리 정립과 존주대의」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서로 『조선시대 의례 연구의 현황과 지평의 확장』 『서울 역사 답사기 5』 등이, 공역서로 『Confucian Reform in Choson Korea - Yu Hyongwon’s Pangye Surok』 『조선 후기 북방사 자료집』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화양구곡 조성의 시공간적 배경과 역사적 함의」 「『하멜 보고서』에 기록된 타자화의 패러독스」 외 다수가 있다.

김성희의 다른 상품

건국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건국대학교 사학과에서 「17세기 후반 국왕의 정국운영과 戚臣의 역할 : 효종·현종·숙종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서로 『조선시대 의례 연구의 현황과 지평의 확장』 『외규장각 의궤 연구 : 공신녹훈(功臣錄勳)』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함양(咸陽) 남계서원(藍溪書院)의 장서(藏書) 운영」 「17세기 홍문록(弘文錄)을 통한 인사 운영 실태와 그 변화 양상」 「정조대 연사례(燕射禮)의 설행(設行)과 그 의미」 외 다수가 있다.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朝鮮時代 國婚儀禮 硏究」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서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함께하는 시간-가족커뮤니티의 개념들 관계편 3』 『양반과 왕실의 문화교류-조선시대 예제와 의례 문화의 확산』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조선 후기 호남 양반의 서행西行 경로와 여행 풍경」 「『충효록』의 편찬과 가문의식」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본 가족담론의 변화」 외 다수가 있다.

박미선의 다른 상품

숙명여자대학교 사학과(한국사전공)에서 「19세기 垂簾聽政 硏究」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정순왕후, 수렴청정으로 영조의 뜻을 잇다』가 있고, 공저서로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 『한양의 여성 공간』 『경종 대정치적 길항과 그 유산』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槐院新參同會錄』을 통해 본 숙종대 承文院 分館과 免新禮 시행 양상」 「몽오 김종수의 정조 묘정 배향과 출향, 복향의 의미」 「조선시대 왕비·대비의 언문교서 작성과 수렴청정시 변화」 「19세기 ‘垂簾聽政儀’의 시행과 즉위의례」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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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한국국학진흥원 인문융합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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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로 본 사족의 의례생활』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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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44쪽 | 152*223*20mm
ISBN13
9791167374714

책 속으로

『일기로 본 사족의 의례 생활』은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 심층연구 포럼의 결과물로, 임진왜란 때 외교 의례의 생생한 모습, 16세기 후반 외방 기양제의, 조선후기 사족들의 관례·혼례·상례·제례의 실제적 사례, 승문원 관원의 면신례 모습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담고 있다. 『운천호종일기』, 『초간일기』, 『역중일기』, 『하와일록』, 『계암일록』, 『청대일기』 등에는 조선시대 사족들의 의례 생활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2023년 5명의 연구자가 모여 1년 동안 ‘조선시대 일기 속 사족의 의례’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같이 공부하고 서로 질문을 던지며 논의를 심화시켜 나가면서 의례 생활에 대해 다각도에서 검토했다.
---「머리말」중에서

임진전쟁기에 선조가 명 장수에 대해 시행했던 접대와 제반 의례가 어떤 형식으로 시행되었는가에 대해 『선조실록』과 『운천호종일기』를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명에서 군사를 파견한 이후로는 명 사신을 대접할 때와 마찬가지로 외교 의례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선조 25년 임진전쟁이 발생했던 초반에는 명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였기에, 선조는 명 사신과의 접견과 연례 절차를 초라하게 준비하면서 조선이 처해 있는 힘겨운 상황을 전달하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조 26년 평양 탈환 이후 강화교섭 시기에 접어들면서 선조는 몸소 명군을 예우하는 모습을 최대한 드러내면서 그들의 조력을 이끌어 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선조가 직접 명 장수에 대해 감사의 뜻을 담은 배례인 사배와 고두례를 행하거나 몸소 나서서 명 하졸들까지 모두 아울러 예우하려 했다. 국왕인 선조가 직접 『국조오례의』에 정해진 절차가 아닌 사배를 추가로 시행한다거나, 황제가 아닌 명 제독을 위해 고두례를 시행했던 것은 당시 조선이 처해 있었던 특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선조는 이렇게 명나라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한편으로는 절박함을 전달하고 협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운천호종일기』에 수록된 임진전쟁기 선조의 외교 의례 시행과 의미」중에서

『초간일기』에 수록된 기우제·여제·해괴제·기청제 치제 기록에 대한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권문해는 대구 부사로 있던 시절 사직단 등지에서 기우제를 지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그가 1588년(선조 21) 윤6~7월에 설행한 기우제는 조선 성종 연간에 제정된 기우제 설행 차제와 내용이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16세기 후반 무렵에는 국가에서 제정한 기우제 규정이 지방 각처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준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1589년(선조 22) 6월 10일에 권문해가 장님 무당과 승려들을 모아 기우제를 설행했던 사실은 비유교적 의례 속성이 당시까지 잔존하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사례로 인식된다. 한편, 『초간일기』에는 당시 권문해가 직접 지어 사용한 기우제 제문 2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비를 염원하는 목민관 권문해의 간절한 마음과 더불어 권문해가 의례 수행 시 그 의례의 내용과 속성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권문해는 대구 부사로 있던 시절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여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여제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1590년(선조 23) 2월 15일에 권문해가 거행한 여제는 도내에 창궐한 역병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이 흩어지지 않고 맺혀 있으면 그 원기로 인해 역병이나 가뭄 등의 변괴가 초래된다는 유교 관념에 기반을 둔 의례 행위다. 한편 권문해는 여제를 지내기 3일 전 성황단에서 발고제를 거행하였는데, 이는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여제 의주에 정확히 부합하는 여제가 주현 단위에서 거행되고 있었던 사실을 증언하는 사례다.

셋째, 권문해는 대구 부사로 있던 시절 사직단에서 해괴제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해괴제는 성변이나 지진과 같이 괴이한 재이현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물리치기 위한 조치로 거행되던 기양제의였다. 권문해는 1590년(선조 23) 2월 3일 지진으로 인해 해괴제를 거행하였다. 앞선 연구를 통해 조선 시기의 해괴제는 단종 대를 기점으로 그 설행 사유가 지진으로 단일화되는 경향이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권문해의 해괴제 설행 사실은 이와 같은 기왕의 입론과도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이다. 해괴제는 조선 전기의 국전 또는 법전 등에 독립된 의례 항목으로 편제되지 않고 『대전통편』에서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지만, 권문해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향축을 받아 사직단에서 해괴제를 거행한 사실을 통해 문종 연간 이래 중앙과 외방의 해괴제가 일정한 정식에 의해 거행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넷째, 권문해는 경중에서 기청제를 지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그는 1583년 3월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동년 6월에 사직하고 귀향하였는데, 이즈음인 1583년(선조 16) 6월 4일 일기에 기청제 거행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권문해는 이로부터 사흘 후인 6월 7일 서울을 떠나 귀향길에 오르는데 고향인 예천으로 내려가는 길에 목격한 물난리의 참상을 계속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기청제가 홍수로 인해 설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기 도성에서 거행된 기청제는 도성의 사대문 안쪽에서 거행되었으며, 산천신을 대상으로 설행되던 제사다. 비록 기청제와 관련한 정확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홍수에 대응하는 조치로서 기청제 설행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권문해의 『초간일기』에 기록된 16세기 후반 외방 기양제의 사례와 그 의미」중에서

1738~1770년까지 기록 중 약 14.7퍼센트는 기제사 유무를 확인할 수 없고, 남은 85.3퍼센트 중 본인이 주관하여 제사를 지낸 경우가 약 70.3퍼센트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음을 확인하였다. 또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 10퍼센트 정도는 가족에게 대신하도록 하면서 참석하거나 또는 전적으로 위임하였음을 파악하였다. 기제사를 지내지 못한 경우는 5퍼센트 정도였다. 즉 종가의 종자라고 해서 기제사를 절대적 가치로 여겨 반드시 직접 실천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오늘날 과 같이 일상의 조건들이 고려되면서 기일제사가 거행되었던 것을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최대한 직접 주관하려 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대행하여 기제사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 기제사의 실천의 특징을 미시적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기제사 거행자와 참석자를 중심으로 참여 인물을 파악하였다. 최흥원이 직접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는 자신, 가족, 마을이 질병으로 인해 정결하지 못할 때였다. 최흥원이 직접 제사를 지내지 못할 경우 숙부의 아들이 대행하여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5대조의 기제사는 최흥원과 그 형제, 조카들이 대행했다. 기제사 참석자들은 엄격하게 무조건 참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고 기일을 맞이한 고비와의 혈연적 친밀성에 따라 참석 범위도 차이가 있었다. 불천위의 기제사에는 8, 9촌 범위의 넓은 일족이 참석하였고, 고비와의 관계에 따라 선친의 서숙庶叔이나 사촌, 6촌, 외손이 참석하였으며, 부친의 기제사에는 직계 후손이 중심이 되어 참석하였다.

넷째, 제례의 시간을 살펴보았다. ‘궐명’, ‘질명’, ‘닭이 우는’ 등에 주의를 기울여 검토하였다. 그 결과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날 것’이 아니라 ‘먼저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다가 ‘닭이 울면’ 곧바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제사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즉 ‘궐명’에 제상을 준비하고 ‘질명’에 주인 및 제사 참여자들이 복을 갖추고, ‘닭이 울면’ 제례를 시작하고, 모든 행례 절차가 끝나면 동쪽에 서 해가 뜨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기제사를 예법에 잘 맞추어 거행하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공간은 집 안 내의 청사, 대청, 안채마루, 안채, 재사 등이 기제사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외에도 초당, 산소 아래 촌집이나 임시 거처 등에서 기제사를 지내거나 둘째 아우나 셋째 아우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신주를 내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지방을 써서 기제사를 지냈다.
---「18세기 대구 옻골 최흥원 가족의 기제사 실천 양상」중에서

『하와일록』을 통해 10대의 류의목이 일생을 살아가며 수행하는 각종의 의례 속에서 어떻게 유교식 예제를 체득해 나갔는지 그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먼저, 부친 류선조에 대한 상례는 기본적으로 『가례』에 따라 진행했는데, 특히 시묘살이를 하지 않고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반혼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었다. 이때 15세의 류의목은 부친상을 치르면서 신주에 쓰기 위해 아명 대신 ‘의목’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부친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관에 옻칠을 하는 실수를 범하기는 했지만 주변 어른들의 도움으로 몸소 유교적 의례를 익힐 수 있었다.

국상으로 인한 소상의 연기, 거듭된 친족들의 상례 참여 등의 의례 경험을 통해 좀 더 복잡한 의례 절차들도 배워 나갈 수 있었다. 류의목이 행한 대상 후의 부제는 속례의 절차를 따른 것으로, 『가례』를 준용하면서도 일부의 속례 관행이 아직 잔존해 실행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류의목의 관례는 부친상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간소하게 진행되었으며, 혼례를 올리기 위한 사전 단계로써 진행된 측면이 컸다. 류의목이 행한 혼례는 『가례』의 친영례와 큰 차이를 보였다. 신부집에서 성혼한 후 신부가 일정 기간 그대로 친정에 머물다가 시가로 가는 방식인 신속례로 거행한 것이다. 류의목의 혼례를 통해 19세기 초까지도 전통적인 남귀여가혼의 풍습이 남아 있는 혼례 형태가 유지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류의목의 일생 의례 시행에서 주목되는 점은 ‘대상 후의 부제’와 ‘신속례’와 같이 예문禮文과 행례의 격차가 있는 부분이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말~19세기 초까지도 『가례』를 모본으로 하면서 시속時俗의 현실을 반영한 유교식 일생 의례가 거행된 사례
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하와일록』을 통해 본 안동 사족 류의목의 일생 의례」중에서

이러한 금령은 면신례로 인한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숙종은 면신례가 군영의 재정까지 충당하는 것으로 변질된 것을 알게 되자 면신례를 금지하는 절목으로 ‘계해사목癸亥事目’과 ‘면신금지사목免新禁止事目’을 각각 반포하였다.74 면신례는 숙종 이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폐지가 시도되었다. 중종 대에 사헌부에서 면신례를 혁파하자고 하였다. 그 이유는 면신례의 폐단이 발생하는 이유가 신래라는 이름에 있기 때문에 후배와 선배, 품계의 차이가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상하가 엄격해져서 괴롭힘을 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래라는 이름을 없애 버리고, 선배와 후배의 예절로 대하게 하고, 허참·면신·침학·책판責辦 등의 일을 일체 혁파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중종은 면신례를 고칠 수는 없으므로 이러한 폐단을 고치도록 하였다. 선조 대에는 율곡이 면신례에서 발생하는 각종 침학을 선비의 위의威儀와 염치廉恥를 버리는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비판하였다. 율곡은 면신례의 풍습을 고쳐서 상견례相見禮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상과 같이 면신례는 상당한 폐단을 만들어 냈다. 이를 금지하기 위한 절목과 법령이 마련되었지만, 폐해는 개선되지 않고 더욱 심각해졌으며, 폐지가 여러 차례 논의되었지만 19세기까지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렇듯 폐단에도 불구하고 면신례가 유지되었던 것은 면신례가 관료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면신례는 문벌귀족 사회였고, 혈연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컸던 고려에서 가문의 위세를 배경으로 하여 선배들을 우습게 여기는 신래들의 기를 꺾어 주기 위해서 시행된 하나의 풍습이었다. 처음 과거에 급제한 신래가 분관이 되어 구관舊官들과 함께 자리할 수 있는 허참례를 마치기까지의 면신례는 관료 사회의 중요한 예절이었고, 나라에서도 용인하는 사대부들의 일상 의례였다. 면신례는 관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로官路에 들어서는 시작점이 되는 중요한 의례이면서도, 공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면신례를 지체하거나 제대로 하지 않으면 탄핵받기도 하였고, 관인官人 명부에서 제명되기도 하였다. 면신례를 시행하면서 침학과 침희로 인한 폐해와 경제적 문제가 발생하였지만, 나라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엄금하고, 때로는 벌을 주면서도 허참과 면신례를 지켜가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일기를 통해 본 승문원 관원의 면신례 시행 양상」중에서

출판사 리뷰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 속
불타버린 종묘보다 명 황제에 대한 예를 선택한 선조의 굴욕 외교

임진왜란이라는 대규모 전란기는 백성은 물론 왕실과 정부도 피난길에 오르게 된 초유의 비상시국이었다. 조선은 오례五禮를 중심으로 국가의례를 주관해온 나라이지만, 전란을 맞아 이를 그대로 구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명군이 조선에 파병되어 있었으므로 명나라 사신에 대한 외교적 의례가 더욱 중요했다. 이 시기, 선조를 호종扈從(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는 사람)하며 사관史官이었던 김용이 선조 26년 8월부터 12월, 선조 27년 6월까지 자신이 선조를 모시며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기록해 3책 분량의 필사본 『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를 남겼다.

이 일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선조는 임진전쟁 초반에는 명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하려는 의도로 명 사신과의 접견과 연례 절차를 초라하게 준비하면서 조선의 어려움을 전달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선조 26년 평양 탈환 이후 강화교섭 시기에 접어들면서는 선조가 몸소 명군을 예우하고, 명 장수에 대해 감사의 뜻을 담은 배례인 사배와 고두례를 행하거나 명 하졸들까지 예의하려고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정해진 절차가 아닌 사배를 추가로 시행한다거나 황제가 아닌 명 제독을 위해 고두례를 시행한 것은 조선이 처해 있었던 특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존망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선조는 국왕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동원해 명나라의 원조를 이끌어내고자 했고, 이후 선조는 환도하면서 불타 버린 조선의 종묘와 명 황제 가운데 어느 쪽에 먼저 예를 표할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적인 예보다는 중국에 대한 사은이 먼저라고 말할 정도로 외교 의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의 어려움은 곧 위정자 부덕의 탓…
유교적 통치의 중요 수단으로 활용된 기양제

조선시대에 수령은 국왕의 통치를 대행하는 존재였고, 수령의 주요 직무 중에는 지역의 행정이나 민사를 보는 일 외에도 각종 의례를 제주로서 집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 시기 국가에 긴급한 재난이나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은 곧 위정자의 부덕이나 잘못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기양제祈禳祭(재앙을 쫓고 복을 비는 제사)는 매우 중요한 의례였다.

16세기 후반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권문해가 남긴 『초간일기草澗日記』에는 자신이 수령으로서 거행한 각종 기양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가뭄이 지속되자 장님 무당이나 승려와 같은 비유교적 인물들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이 억울하게 죽어 전염병을 일으킨다고 여겼던 여귀?鬼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여제?祭를 지내기도 했다. 혹은 성변星變(별의 위치나 빛에 이상이 생김)이나 지진과 같이 괴이한 기상 이변 현상이 생겼을 때에는 해괴제解怪祭를 행하거나, 물난리가 났을 때는 날이 개기를 빌면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낸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 시대 관혼상제에 나타난 사족의 삶
성장과 함께 체득해나간 유교식 일생 의례

『하와일록河窩日錄』은 안동 하회에 살던 류의목이라는 사족이 12세에서 18세까지(1796~1802년) 10대 시절에 쓴 일기다. 조선시대 사족의 10대 시절 기록은 그 자체로 귀하기도 하거니와 어떤 교육을 받으며 조선 사족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기에 중요한 사료다. 이 기록에는 15세 때 부친상을 치르며 시묘살이를 하지 않고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반혼의 모습, 상례 중 유교적 결례를 범해 친족들의 도움을 받는 상황, 국상이 있을 때는 소상을 연기하거나 친족들의 상례 참여 등을 통해 복잡한 의례 절차를 배워나가며 류의목이 성장하는 모습이 소상히 묘사되어 있다. 특히 『가례』를 준용하되 일부 속례 관행을 실행한 점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류의목의 관혼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류의목은 3년 부친상을 마치고 혼례를 올리기 위한 사전 단계로 간소하게 관례를 치른다. 이때 혼례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즉 신부 집에서 혼인을 치르고 일정 기간 그대로 친정에 머물다가 시가로 가는 방식인 신속례로 행하는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도 『가례』를 따르되 일부 시속時俗의 현실을 반영하는 의례를 따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 사족들의 제례 시행은 백불암 최흥원이 쓴 일기인 『역중일기曆中日記』에 잘 나타나 있다. 최흥원은 종가의 종자로서 기제사를 실천했지만 무조건 절대적 가치로 여긴 것은 아니고, 질병 등 일상에서 여의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때에는 가족에게 위임하기도 했다. 8, 9촌까지 넓은 일족이 참석했던 기제사는 ‘궐명厥明(날이 바뀌는 첫 새벽, 망자가 사망한 당일 새벽)’에 제상을 준비하고 ‘질명質明(날이 밝으려 할 무렵)’에 참여자들이 의복을 갖추어 입고, ‘닭이 울면’ 시작하는 식의 시간적 기준에 따랐다. 공간은 집 안 내 대청이나 안채 등은 물론, 초당, 산소 아래 촌집, 혹은 아우의 집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이때는 신주를 내지 않고 지방을 써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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