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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鄭恒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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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과 철학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 ‘반복’
1. 이 책에 대하여 현대 독일 문학을 넘어 신화, 정신 분석학, 현대 철학, 문학 이론 등을 가로지르며 우리 시대의 징후와 패러다임을 읽는 데 천착해 온 소장 학자의 신간이 나왔다. 저자 정항균은 계몽주의적 관점에서는 폄하되던 ‘반복’이라는 범주가 함의한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고, 이에 엘리아데, 보토 슈트라우스, 키르케고르, 프로이트, 그라스, 카뮈, 라캉, 니체, 들뢰즈, 옐리네크, 막스 프리쉬, 한트케 등 현대 문학과 철학에 나타난 반복의 모티브와 그 유형을 고찰했다. 일반적으로 반복이라고 하면 ‘지루함’이나 ‘단조로움’ 같은 부정적 뉘앙스를 떠올린다. 또한 반복은 ‘기억’보다는 ‘망각’과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 더욱 부정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가령 우리가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기억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기억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최근 들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즉 인간의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적인 재구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역사적 기억의 다원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관점을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기억을 통해 정립된 확고한 자아 정체성 역시 통일된 정체성이 없다는 인식 아래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즉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자아 대신에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자아를 펼쳐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주체가 절대적인 동일성에서 벗어나 잠재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면서 주체는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반복되는 창조적 반복을 연출한다. 이로써 반복은 부정적 함의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에 저자는 반복의 의미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부터 살폈다. 신화적인 세계관이나 종교적인 믿음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반복은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당시 사람들은 항상 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 신성한 것과의 연관성을 의식했고, 그것을 삶에서 반복했다. 그러나 사회가 점차 세속화되고 종교적 질서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면서 인간은 더 이상 신의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으며, 이로써 반복에 대한 평가 역시 변했다. 이제 인간은 반복 회귀하는 시간관을 버리고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시간관을 내면화했다. 이 직선적인 시간관을 바탕으로 인간은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 가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개인 나아가 민족의 확고한 정체성 수립이 핵심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현대로 접어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의식의 발견은 확고하고 통일된 자아의 이상이 실은 환상임을 드러냈고,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이성에 기초한 진보에 대한 믿음에 균열을 일으켰다. 역사는 선형적으로 진보하지 않으며, 인간 역시 지속적으로 성장하거나 발전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현대가 시작되었다. 속도의 미학이 지배하는 현대는 끊임없이 이전의 것과 단절하며 새로움을 추구한다. 근대와 달리 현대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때의 망각은 반복과 내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에도 반복은 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현대의 실험은 한계에 부딪혔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으며 기존에 있었던 것이 반복될 뿐이라는 탈역사주의적 인식을 낳았다. 반복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함의를 없애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은 포스트구조주의에 이르러서다. 이때의 반복은 신화적 시대의 반복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특히 들뢰즈는 반복을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 자체의 반복으로 보았고, 그러한 차이 자체의 반복은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를 생성해 낸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차이 생성을 존재론적으로 규명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장려하기까지 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반복이 함의하고 있는 이러한 ‘창조성’과 ‘생산성’이다. 저자는 반복의 다양한 유형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정리하고, 이러한 철학적 담론이 어떤 미학적 형식으로 표현되었는지를 살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저자의 넒은 지적 진폭과 성실성이 돋보인다. “넓게 우물을 파야 깊이 파는 법”이라 했으니 앞으로의 지적 행로 또한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