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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
1. 입에는 분필이 가득했다 2. 어느새 시시해진 병정놀이 3. 조선독립만세와 한글 책 4. 어느 방학 ‘학생 선생’의 한글 강습 5. 아나톨 프랑스와 「스텐카 라진」의 기억 6. 사립학교 자리, 시새움과 책전이 키운 아이들 7. 연극은 망쳐도 금방앗간 물레방아는 돌아가고 8. 호주머니털이의‘공부도 좋지만 몸이 튼튼해야지~’ 9. 시시한 줄반장에, 문예 당선은 김칫국만! 10. 허풍깨나 치던 바늘도둑 시절에 11. 축구 사건이 앗아간 동무, 과외 시간에 만난 주름치마 소녀 12. 졸업반 시절, 친일파가 당선되고 성적이 조작되던…… 2부; 삶의 뒤안길에서 1. 내게 다시 시를 쓸 기회가 주어지다 2. 병석에 누워 있는 김관식 시인을 찾아간 미당 서정주 시인 3. 취직은 뒷전, 술 실컷 얻어먹으러 따라다녔던 천상병 시인 4. 버스 안을 시 낭송장으로 만들던 주머니시인 백시걸 5. 작가 김말봉의 의붓아들, 거지대장 몰골이었던 이현우 시인 6. 동백림사건 때 모진 고문으로 폐인이 된 천상병 시인 7. 기타를 켜면서 약을 팔던 『문학예술』출신 임종국 시인 8. 차도 점심도 저녁도 명동서 먹었던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 선생 9. 남의 얘기를 절대로 하지 않는 황명걸 시인 10. 심성이 밝고 낙천적인 구자운 시인 11. 고고한 이미지에 준엄한 결백성을 가진 이한직 시인 12. 겉모습과 달리 세심하고 정이 많은 조태일 시인 13. 바둑, 술, 침구 얘기뿐이던 신동문 시인 14. 글을 보는 눈이 밝은 강홍규 작가 15. 계파도 무엇도 없었던 문단의 마당발 이문구 작가 16.『월간문학』사 이름으로 나온 첫 시집 『농무』 17. ‘서울 가면 시골 사람이, 시골 오면 서울 사람이’ 하면서 불러대던 손춘익 작가 18. 작품을 놓고 혹평과 호평을 하던 문학주의자 한남철 작가 |
申庚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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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
4학년을 마치고 여름 방학이 되자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여름 방학 동안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을 상대로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내가 계획을 세웠다기보다 “여러분들은 여름 방학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문맹퇴치 운동을 하라”는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충실히 실행에 옮겼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한글 강습을 하겠다는 내 말을 듣고 해방 직후부터 구장 일을 보던 삼촌은 큰 당숙에게 부탁을 해서 우리 동네에서 가장 넓은 당숙네 사랑방을 강의실로 쓰게 해 주었다. 십수 년 전 야학 때 쓰던 흑판이 광 속에서 꺼내어져 내걸렸다. 나보다도 삼촌이 더 열성이어서 분필은 말할 것도 없고, 공부할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말똥종이 공책과 연필까지도 미리 준비했다. --- pp.49~50, 「어느 방학 ‘학생 선생’의 한글 강습」 중에서 그 무렵 내게는 좋지 못한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주무시는 날이면 마루고 방이고 아무 데나 웃옷을 벗어 놓는데, 호주머니를 뒤져 보면 으레 구겨진 지전 몇 장이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훔쳤고 아버지는 눈치를 채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늘 용돈이 넉넉했다. 이렇게 훔친 돈은 책이나 학용품을 사는 데 쓰이기도 했지만 더 많이는 군것질하는 데 들어갔다. 교문 앞에는 무싯날에도 지글지글 끓는 철판에 즉석에서 설탕물을 부어 온갖 모양의 사탕과자를 만들어 파는 장사가 있어서, 방과 후면 나는 볼일이 없어도 늘 교문 앞을 지나서 집으로 왔다. --- p.84, 「호주머니털이의 ‘공부도 좋지만 몸이 튼튼해야지’」 중에서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행선지는 겨우 도청 소재지인 청주였다. (…) 마침 청주에서는 전국박람회가 열렸고 그에 맞추어 전도 초등학생의 미술과 문예작품 전시회도 있어, 청주를 행선지로 정하는 데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 나도 수학여행이 결정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 학교를 대표해서 시를 써서 제출해 놓고 있었는데, 산문에는 같은 반 다른 아이의 글이 뽑혀서 제출되어 있었다. (…) 그때 수학여행에서 나는 네온사인이며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하던 밤거리와 북적대던 사람들을 보았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도시에 취해 너무 정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전시장을 돌면서도 내 시가 거기 전시돼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물론 보지도 못했다. 한데 마지막 밤, 도 학무과에 다닌다는 담임의 친구가 찾아와 말했다. “자네네 학교에서 당선작이 나온 거 모르나!” 담임은 당장 나를 불러 그에게 인사를 시키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 그 당선자가 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우리는 수학여행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내가 지나가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한 번 더 나를 쳐다보았으며, 내 등 뒤에서 수군수군 내 얘기들을 했다. 집에서들은 더 말할 것도 없어, 이제 정식으로 통지가 오면 잔치를 벌인다고 벼르고 있는 판이었다. 그렇게 구름에 둥둥 떠다니는 것같이 며칠을 보내고서였다.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이 우리 학교에서 작문에 입상자가 나와 큰 영광이라는 말을 길게 늘어놓은 다음 상 받을 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것이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너무 긴장해서 잘못 들었나 해서 담임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나한테는 외면을 한 채 산문을 써 보낸 아이더러 어서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나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그 아이가 상장을 받아들고 절을 한 다음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p.98~103, 「시시한 줄반장에, 문예당선은 김칫국만!」중에서 나도 어려서 허풍깨나 쳤던 것 같다. 잊혀지지 않는 허풍으로는 먼저 삼촌에 관한 것이 있다. (…) 내가 결정적으로 허풍선이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외삼촌에 관계되는 거짓말 탓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내가 외갓집을 다녀온 뒤 작은외삼촌이 다니러 온 일이 있는데, 아이들이 너희 외삼촌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귓결에 고등고시를 공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을 바탕으로, 판사를 하고 있다고 허풍을 쳤다. 이 말이 담임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은 우리 주위에 판사 같은 높은 직위의 사람을 친척으로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담임이 “너의 외삼촌이 판사라고?” 하고 아이들 앞에서 확인했을 때 나는 거짓말한 것을 후회했지만, 일단 나간 말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었다. “예” 하는 내 대답은 아마 목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였을 것이다. 마침내 이 말은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느 날 아버지는 “네가 선생님한테 외삼촌이 판사라고 거짓말했냐!” 하고 다그쳤고, 그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외탁을 했느니 친탁을 했느니, 티격태격 싸웠다. 자기 집안에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저런 아이가 태어난 것을 보면 자기 집안 내력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서로의 주장이었다. --- pp.104~106, 「허풍깨나 치던 바늘도둑 시절에」 중에서 2부 삶의 뒤안길에서 “오늘은 틀림없이 취직이 된단 말이야”하고 택시 안에서 그는 장담을 했고 그 취직할 곳이 바로 문화예술단체의 집합체인 예총이라고 설명을 했다. (…)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예총 사무실로 올라간 그는 대뜸 이사장을 찾았고, 이미 교분이 있었던지 이사장은 반갑게 이사장실로 우리를 맞아들였다. 한데 이사장실로 들어간 김 시인은 응접석에 앉는 것이 아니라 이사장석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첫마디가 이러했다. “이사장, 오늘부터는 내가 이사장을 할 테니까 당신은 이제 그만두시오.” 당시 이사장은 연극 연출을 하는 박진씨였다.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을 것이다. “벌써 취했구먼. 김형 나가서 술 한 잔 합시다”하고 가볍게 받자,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비싼 돈 주고 택시 타고 와서 농담이나 하는 사람인 줄 아시오!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당장 그만두시오. 그리고 사무국장 들어오라고 그러시오.” 시끄러우니까 사무국장은 무슨 일인가 해서 이미 들어와 있었다. “제가 사무국장인데요” 하니까 이번에는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사무국장도 당장 해고야!” 그리고는 나를 향해 “어이, 신경림, 너를 오늘부로 사무국장으로 임명한다!” --- pp.137~138, 「병석에 누워 있는 김관식 시인을 찾아간 서정주 시인」 중에서 천상병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도 거의 같은 무렵이었던 것 같다. (…) 이 사건에 천상병이 연루된 연유는 간단하다. 그의 서울상대 동기에 강모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무렵 유학을 마치고 와서 모교의 전임으로 있었는데, 그 역시 천상병이 가끔 찾아가, 그의 표현에 따르건대 술을 뺏어먹는 상대였다. 천상병을 특별히 좋아하고 믿어서 그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는 그는 어느날 술자리에서 동베를린에 갔던 자랑을 했다. “그거 국가보안법에 안 걸리나!” 천상병의 말은 겁주자는 것이 아니라 농담이었다. 듣고보니 이 순진한 간첩(?) 강모는 걱정이 되어, 혹 알아볼 데가 있으면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침 천상병의 친한 친구 중에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다. 홍은동 산 1번지 김관식이 무단점거한 시유지를 얻어 집을 짓고 사는 이규헌이 바로 그였다. 어느날 천상병이 술자리에서 진지하게 물었다. “서독 유학생들은 동베를린도 갔다 오고 칸다 카더라. 그거 괜찮나?” 정보부라고는 하나 거기서 나오는 기관지를 만들고 있던 얼치기 정보부원 이규헌은 간단히 대답했다. “무슨 일 있어! 아무 상관 없다! 우리니까 남북이 못 다니지 독일은 다르다.” “그거 틀림없지!” 하고 다짐하던 그 자리에는 마침 나도 있어, “야, 그게 무슨 문제야, 아무 문제 없다니까!” 하던 이규헌의 말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이 말을 천상병은 그대로 강모에게 전했고, 잡혀들어간 강모는 자기가 동베를린 갔다 온 것을 기관에서 알고도 문제삼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천상병을 매개로 한 기관원을 통해서 동베를린을 다녀왔음을 기관에 미리 신고한 형태가 된 것이다. 천상병이 잡혀가고 이어 이규헌이 잡혀갔다. 이 사건을 나는 신문에 발표되기 이전에 알았으니, 그것은 며칠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돌아온 이규헌을 통해서였다. 이규헌은 무능한 정보부원으로 판명되어 파면이 되었고, 홍은동에는 실업자가 하나 더 늘게 되었는데, 이규헌은 동료로부터 조사를 받고 나서야 천상병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은 생각이 어렴풋이 들더라고 했다. 말을 더듬는 그는 얼뜨기로 취급되는 바람에 그래도 파면으로 끝났지만, 천상병은 불고지죄가 인정되어 석달 넘게 갇혀 있다가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나왔다. 천상병은 글도 잘 쓰지만 말도 잘하고 재치와 유머가 넘쳐 남한테 얻어먹는 술자리에서도 늘 주인 행세를 했다. (…) 그러나 감옥을 살고 나온 뒤로 그는 사람이 달라졌다. 술은 여전했으나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 한동안 사라졌다가 거의 폐인이 다 되어 나타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 모진 전기고문 탓으로 생식불능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20년이 더 지나서였다. --- pp.156~159, 「동백림 사건 때 모진 고문으로 폐인이 된 천상병 시인」 중에서 1980년 5월,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당국에서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들이던 날이다. 집을 빠져 나온 나는 돌아다니다가 갈 곳이 없어 결국 조태일의 인쇄소를 찾아갔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문을 닫아걸고 인쇄소에 들어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지옥에서 부처님이나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역시 궁리가 서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서울을 빠져 나가기로 하고 예산으로 향했다. (…) 며칠 있다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어영부영하다가 합동수사본부에 잡혀가 보니, 그가 먼저 잡혀와 있었다. “잘 잡혀 온 거예요. 지금 밖에 있으면 뭐해요!” 그가 내게 한 첫 마디였다. (…) 1주일 여 조사를 받고 구속되어 종로경찰서로 넘어올 때는 함께 수갑을 찼다. “이거, 고목에 매미가 붙은 거여, 코끼리하고 생쥐가 한 끄나풀에 묶인 거여!” 종로서에 가니 심심했던지 형사들이 한 마디씩 했다. 조태일은 같은 수갑에 묶인 손을 크게 저어 나를 뒤뚱대게 했고, 여기가 어디라고 장난질이냐며 형사들은 호통을 쳤다. 보름 동안의 유치장 생활도 함께했고, 구치소로 넘어갈 때도 같은 수갑을 찼다. 우리보다 2, 3일 늦게 잡혀온 구중서(문학평론가)가 혼자 차도 괜찮다며 함께 차기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구속한 검찰관조차 우리가 왜 구속되었는지를 몰라, 아마도 문단에서 몇 사람 뽑아서 비례대표로 구속한 것 같다고 짐작한 이 사건에서 나와 구중서는 한 달 만에 기소유예로 나왔지만, 조태일은 한 달을 더 살았다. 광주 태생인 만큼 김대중씨와 어떤 커넥션이 없나 해서 차별을 받은 것이다. “나는 도저히 감옥하고는 체질이 안 맞는다고 했더니 그 말도 일리 있다고 내 준 거라고요.” 공소기각으로 나온 그는 이렇게 또 한 번 싱거운 소리를 했다. --- pp.194~196, 「겉모습과는 달리 세심하고 정이 많은 조태일 시인」 중에서 나는 이문구를 한국문인협회 기관지 월간문학의 편집자 정도로밖에 모르고 있었던 터다. 만난 일도 없어, ‘암소’를 읽은 며칠 뒤에는 엉뚱한 사람한테 당신의 ‘암소’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다가, 그건 제가 쓴 것이 아니고 이문구라는 젊은 작가가 쓴 것이라는 자세한 설명을 듣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이문구와 알고 지내게 된 것도 ‘창비’에 시를 발표하고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처음부터 내가 그를 좋게 본 것은 아니었다. 우선 삼선 개헌이며 유신체제 등 군사정권에서 하는 일이면 덮어놓고 앞장서서 지지하고 나서는 문협(한국문인협회)의 이사장이던 김동리 선생에 대한 맹목적인 의리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반체제적이고 공격적인 시를 쓰는 조태일조차 그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조태일로부터 이문구의 사람됨에 대한 다음 같은 얘기를 들은 뒤부터 그를 달리 보게 되었다. 김지하 시인이 ‘오적’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을 때였다. 젊은 작가들 몇이 모여 데모를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처음 이문구는 극구 반대했다. 다 잡혀 가고 끌려 갈 걸 뻔히 알면서 그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기로 결정이 나자 이문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피켓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마침내 거사일이 되었다. 조태일은 막상 겁이 나서 한 30분쯤 늦게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내심 데모가 끝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데 현장에는 이문구 혼자만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싸들고 나와 서 있더라는 것이다. (…) 70년대 중엽 진보적인 문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자유실천 문인협의회를 만들었을 때 처음에는 글쟁이가 글을 써야지 무슨 단체를 만드느냐고 탐탁해하지 않던 그였지만, 일단 만들어진 뒤에는 조태일, 박태순 등과 더불어 내내 가장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집회며 시위를 주도했다. --- pp.213~215, 「겉모습과는 달리 세심하고 정이 많은 조태일 시인」 중에서 창비를 시작으로 2, 3년 사이에 이곳저곳에 3, 40편의 시를 발표하고 나니까, 주위에서 이제 시집을 묶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얘기들을 했다. 나라고 시집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없었지만, 신인이나 다름없는 무명인 내게 시집을 내준다는 데가 있을 턱이 없었다. 시집을 장사로 출판하는 데는 거의 없던 시절이다. 그래도 출판사에서 체면상 인세를 주고 시집을 내주는 시인은 아마도 서정주나 김광섭 등 몇 원로 시인과 청록파 시인 정도요, 대개가 자비출판이었다. (…) 시집을 낸다면 도리없이 자비출판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영 그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같은 출판사에서 제작을 맡고 있던 서정춘 시인의 격려와 압박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농무’를 자비로 출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책을 내자면 출판사 명의가 필요했는데 그것도 문제였다. (…) 창비는 아직 출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 내 고민을 알고 이문구는 그가 근무하는 월간문학사 이름을 선선히 빌려 주어 결국 ‘농무’는 월간문학사 이름으로 나오게 되었지만, 그곳 역시 출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책이 나온 뒤에야 알았다. 이문구는 어차피 불법 출판물이 될 터인데 무슨 상관쳀냐고 희떱게 눙쳤지만, 그 자신도 정기간행물 등록과 출판 등록을 구별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 pp.224~225, 「『월간문학』사 이름으로 나온 첫 시집 『농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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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시인 신경림, 그의 인생 칠십 여년의 기억과, 문학 반세기 너머의 기록들
그의 시들이 시골의 흙냄새, 고단한 삶의 땀 냄새와 한과 의지를 자양분 삼은 민중의 기록이었다면, 이 책의 글 편들은 그의 문학 이면에 실재했던 인생의 조각들과 우리 문학사의 진기록들이다. ‘신경림 에세이’에는 일제강점 말기와 해방의 공간, 초등학생 허풍선이 땅꼬마 신경림의 좌충우돌 자화상을 비롯해서, 6, 70년대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 이 땅의 글쟁이들의 기행과 헤프닝, 애환, 시국이 만들어 낸 안타까운 사건들의 뒷이야기 등 앞 세대들이 빚어낸 현대 문학사의 향수가 그득하다. ■■■ 작가 머리말에서 평소 지인들로부터 수차례 자서전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은 일이 있지만 번번이 거절한 것은, 내 삶이 남의 흥미를 끌 정도로 화려하지도 못했고 또 기록으로 남길 만큼 굴곡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였다. 말하자면 너무나 재미없는 평범한 글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의 두 글을 쓴 것은 하나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도 앞서 산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공부하며 자랐는가를 알았으면 해서였고, 또 하나는 오십여 년 전 문단의 풍속도를 아는 것이 우리 문학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서였다. (…) 그러나 써 놓고 생각하니 이러한 글들도 내가 시를 쓰는 일을 적잖이 도왔으며,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다소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면구스러운 점 없지 않으면서도 책으로 낼 용기를 냈다. 독자들이 웃고 읽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 시인 신경림을 말하다 작지만 밝고 또렷한 그리고 소탈하고 남을 편히 대하는 신경림 시인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만 봐도 별나게 눈에 띈다. 시인과 함께 하는 자리는 나이가 든 축이건 젊은이들이건 편안함과 여유와 멋을 즐길 수 있는 동구 밖 느티나무 같은 어른을 만나는 시간이다. 가만가만 들려주는 시인의 삶의 이야기는 무엇이 되었건 그의 내면세계를 투영하는 영혼의 안식 같은 시가 되어 멍울진 가슴을 풀어주고, 잘나고 못난 사람이 따로 없는 시인의 곁에서는 힘들고 어려운 지금을 사는 모든 이들이 지친 마음을 달래는 큰 그늘 같은 위안을 얻는다. ■■■ 책 소개 1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노년의 시인이 일제의 강점기와 해방의 공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겪은 추억의 토막들을 기억의 저편에서 끌어올려 되살려낸 이야기들이다. 작은 키에 몸도 허약하여 개구지고 힘센 친구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허풍을 떨고, 때로 거짓말에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등 만년 모범생으로만 자랐을 것 같은 작가의 악동 같은 이면의 모습들을 고해하듯 낱낱이 털어놓았다. 또한 자라면서 책 읽기에 흠뻑 빠지고, 글을 쓰게 한 동기를 부여한 선생님, 사촌당숙, 친구들 이야기를 읽다보면 반세기 훨씬 전의 풍경임에도 결코 낯설지 않은 유년의 이야기들이 독자로 하여금 그립고 안타까운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2부 ‘삶의 뒤안길’에서는, 시인이 한때 글 쓰는 일을 포기했다가 우연히 고향 길거리에서 김관식 시인을 만남으로써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와 만난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벌였던 6,7십년대 우리 문학사의 전설 같은 일화들이 추억의 영화처럼 펼쳐져 있다. 그 시절 종로, 명동, 인사동을 중심으로 만나고 어우러졌던 문인들과의 좌충우돌 인간 냄새 물씬한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쏠쏠한 읽는 재미와 더불어 지나간 시대의 풍경을 맛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