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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낯선 곳과의 연애 미국, 중동, 다시 미국 1998~2005 미국 대륙횡단 2006 인도네시아 2006~2008 여행기를 마치며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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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의 삶은 세간에서 짐작하는 종류의 화려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화려하다. 게다가 낯선 곳에서의 낯선 삶은 더없이 매력적인 덤이다. 지금껏 주로 정무를 맡아서 일했던 탓에, 업무상 알게 된 공적인 사항들을 책으로 펴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겠지만 휴가 동안의 여행기를 엮어내는 거야 큰 흉이 될까 싶었다. 흉이라면, 좀 더 널리 보고 깊이 생각지 못한 것일 터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려 했던 것만을 본다. 여행기를 정리하며 문득 소망한다. 좀 더 많은 것들을 향해 내 눈과 가슴이 열리기를. --- p.7
[중동에서는] 정치 속에 종교가, 그리고 종교 속에 정치가 스며들어 있다. 사람들은 종교적 공동체의 언어로 일상생활을 한다. 안녕하세요?는 '아쌀람 알레이쿰'(알라의 평화가 그대와 함께), 잘 가세요는 '피 아만 일라'(알라의 평화 속에 가라), 글쎄요는 '인 샤알라'(알라의 뜻대로)인 것이다. 상투적 인사말이 아닌 대화에도 종교적 수사는 넘쳐난다. 마틴 루터나 쟝 칼뱅 이전의 서유럽 사람들의 언어생활도 그러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어쩌면 그런 의미에서만) 오늘날의 중동은 중세적 삶을 담고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사람들은 집에 있건 직장에 있건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처럼 행동한다. 대인관계는 전통사회의 풍습에 따라 규율되고, 사람들은 단순하고 솔직하게 직접 상대하는 관계를 맺으며, 이러한 관계는 감정과 정서의 표현들에 의해서 좌우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익사회Gesellschaft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최고급 핸드폰을 능숙하게 조작하고 주식시세에 관심을 갖는 중세인을 상상해 보라. 한국인인 나에게 이러한 삶의 방식이 아주 낯설진 않았던 걸 보면, 우리에게도 공동사회적인 특질은 많이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나는 미국에서보다 오만에서 쉽사리 정다운 벗들을 사귈 수 있었다. 아랍인들의 삶의 방식의 변화 속도를 매우 느리게 만든 제일 큰 원인은 어쩌면 이슬람이라는 종교보다 원유라는 자원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원인이 무엇이건, 아랍세계는 매우 느린 천이과정 속에 있는 저수지와도 같았다. 이제 세계화의 거센 해일이 이 둑을 허물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갈등은 어떤 모습으로건 나타날 수밖에 없던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문명사적 급변 사태는 빈부간의 다툼이라는, 역사와 전통이 아주 오랜 또 다른 싸움과 겹쳐서 벌어지고 있다. 아랍인들은(그리고 많은 비아랍인들도) 이 두 가지를 자주 혼동한다. 사람들은 오사마 빈 라덴이 예언자 모하마드의 후예이기보다 서구적 도시게릴라 운동가들의 후예라는 점을 자주 잊거나, 또는 짐짓 무시한다. --- pp.27-28 얼굴에 솜털이 있을 무렵 헤어진 삼총사가 이제 식솔들을 이끈 가장이 되어 고기집에서 소주잔을 나눴다. 이상하다. 오래 전에 사귄 친구들은 아무리 얼굴이 변해도 만나보면 그 옛날의 모습만 망막 속으로 쏙 뛰어 들어온다. 동창회를 하면 졸업하고 처음 만난 호호백발 할머니들도 서로 '어쩜 넌 하나도 안 변했니' 그러신다더니만…. 우리는 서로 살아온 얘기들을 나눴다. 옛 친구들을 만나면 기쁘고, 또 슬프다. 오래 전에 나누었던 우정이 떠올라 기쁘고, 막상 새롭게 나눌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슬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쓰라린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막막하고 어렴풋하면서, 조금은 달콤하기도 한 그런 슬픔이다. 추억 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없다. 막막하고 달콤한 이것을, 우리는 소주 안주로 삼았다. --- p.85 로버트 듀발은 성격파 배우다. 어떤 역할이건, 그는 늘 자기가 맡은 배역을 다른 누군가가 맡아서는 도저히 그렇게 소화했을 것 같지 않은 존재감으로 가득 채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연기로 영화를 압도하는 법이 없다. 눈에 띄려고 빨간 옷을 입고 결혼식장에 나타나는 신부의 친구 같은, 그런 연기를 하는 법이 없다고나 할까. 그런 그에게, 「Lonesome Dove」는 모처럼 제대로 깔아준 멍석이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가진 최상의 기량을 선보일 뿐만 아니라, 다른 배역들을 좀 더 생동감 있게 만드는 촉매 같은 역할도 해냈다. ... 「Lonesome Dove」가 선사하는 긴 여운을 한두 마디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다만, 느닷없이 외계인이 나타나서 영어의 'frontiermanship'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드라마의 시청을 권해 주겠다. 무릇 프론티어 정신이란, 「Lonesome Dove」가 구현하고 있는, 소략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정서의 몸뚱아리 전체에 가깝다. 어쩔 수 없이 '개척자 정신'이라고 번역되곤 하지만, 프론티어 정신은 산악인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 비슷하기도 하고, 연어가 고향으로 회귀하는 것과 정반대로 낯선 곳에 뼈를 묻는 역逆노스탈지아 같은 정서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미지未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나 할까. 영화 속에서 카우보이들이 죽을 고생을 하며 찾아왔던 몬태나. 비록 그곳을 나는 차를 타고 휙 지나가고 있지만, 내가 찾고 있는 것 또한 경계다. 변방이다. 스스로를 부수고 나아가야 할 저 너머의 어딘가다. --- pp.121-123 여행을 떠나기 전, 미국인 친구 앤디가 은근하지만 강력한 어조로 이 호텔을 추천한 덕분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말랑 자체를 여정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마터면. 나는 이 호텔에 투숙하고 나서 앤디가 말을 아끼는 친구라는 점을 새삼 느꼈다. 투구호텔은 내가 다녀본 호텔들 중에 가장 특색 있고 매력적인 장소였다. 이 호텔은 마치 미하일 엔데의 『자유의 감옥』에 묘사된 야릇한 공간 같았다. ... 벨기에를 여행할 때 브뤼헤에서, 방은 여남은 개뿐이지만 주인이 우리를 친척처럼 반갑게 맞아 주던 파트리시우스Patritius 호텔은 우리 외할머니의 식탁처럼 정갈했었다. 자동소총 소리 심난하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제일 오래된 호텔이라던 마르나 하우스Marna House는 옛 부호의 저택을 호텔로 개조한 곳이었다. 여행이란, 발자국을 객지에 남기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에 남기는 일이다. 숙소를 잘 고른다면 일단 그 여행은 절반 이상 성공하는 것이리라. --- pp.237-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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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외교관 박용민
이 책의 저자 박용민은 현직 외교관이다. 19년째 외교관 노릇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북핵협상과장이다. 그런데 여행서를 냈다. 지난달엔 영화책도 냈다. 그뿐인가. 이번 책에 쓰인 그림들을 모두 직접 그렸다. 사진은 물론이고. 이쯤 되면 ‘별난 외교관’이라는 딱지의 정체가 대충 짐작된다. 외교관 작가 박용민의 밤잠은, 그래서 짧다. 아내의 타박을 뒤로 하고(가장 지근거리의 관찰자일 아내는 그에게 ‘취미번잡증’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잠자리에 누울 시간을 아껴 타블렛으로 그림을 그리고, 틈틈이 모아둔 악기들을 만지며 작곡을 하고, 영화나 책 리뷰를 쓴다. 그걸 또 싸목싸목 블로그(thebaldface.com)에 올려 네티즌들과 소통한다. 문화 취향의 세련화로써 자신의 삶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외교관, 바로 그 점에서 박용민은 유별나다. 혹자가 보기엔 쉽지 않을 자기계발 노력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웬걸, 박용민에게는 그게 그저 가슴 뛰는 재미이다.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던 맏아들, ‘천상 부산 어른들’이신 부모님의 뜻을 쫓아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고, 노래를 부르고 방송국을 기웃거리면서도 결국 외교관이 되었다. 타고난 ‘끼’와 예술 재능의 자연스럽고 신나는 발현, 그것이 그를 ‘별난 외교관’이 되게 했고, 그래서 이때의 ‘별나다’는 ‘멋지다’와 거의 동의어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어린 시절 동경했던 여행작가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가족들과 함께 떠난 휴가여행에서도 자신을 거쳐갔던 영화와 책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한 나라의 운명과 인류의 문명을 곱씹는다. 그 능수능란하고도 웅숭깊은 성찰의 힘을 꿰뚫어본 소설가 복거일 선생은, 그래서 그에게서 “새로운 재능의 탄생”을 본다. 새로운 재능의 탄생 여행기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다시 복거일 선생의 말을 인용하자면, 여행이 고스란히 녹화되는 요즈음엔, 재미있는 여행담은 고사하고 여행담 자체가 아예 사라지는 듯하다. 그 빈자리를 메우고 드는 현란한 볼거리 위주의 여행책들…. 여행 전문 출판사인 바람구두도 이제껏 그에 일조했을지 모르지만 ― 10권 정도뿐인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 『별난 외교관의 여행법』은 새로운 재미의 기행문학을 접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지루하고 힘들 것 같은 자동차여행의 정의를 기록한 부분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여행이 가족들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떠난 휴가여행이다.) “쏟아 붓는 비가 침범하지 못하는 한 평 남짓 불가침의 공간에… 가족들과의 거리가 한결 오롯이 가까워지는… 그렇게 광대무변한 세상 속을 누비는….” 볼거리를 빼어난 사진 프레임에 담아내는 작가의 재주도 훌륭하지만, 그 풍경을 넘어 땅에 새겨진 인간의 무늬를 포착하는 데 있어 박용민은 빼어난 감각의 소유자다. 역사와 문학, 영화와 음악, 회화 등 온갖 사회적, 예술적 알레고리들의 의미를 남달리 짚어내는 데서 이 책의 재미는 깊게 우러나온다. 그냥 아름다운 건 없다.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의 유명한 감옥 알카트라즈. 그 감옥의 창살 밖으로 손에 잡힐 듯 빤히 내다보이는 ― 허나 다다를 수 없는 ― 샌프란시스코 언덕의 아름다움을 작가는, 4월을 일컬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시인 엘리엇 류의 ‘시적 잔혹함’의 아름다움이라고 짚어낸다(95쪽). 『영화관의 외교관』이라는 전작에서 선보였듯, 이 책에서도 영화나 미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스타 트렉」 얘기는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밀하고 폭 넓다(76쪽부터). 그저그런 스릴러 영화라고 여겼던 「다이 하드」나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영화 한 장면을 빌어, 헐겁기 짝이 없게 개념화된 ‘테러리즘’이라는 우리 시대의 병리를 곱씹어보는 화두로 삼는다(51쪽부터). 80년대 미드인 「머나먼 대서부」는 ‘프론티어 정신’을 역노스탤지아 혹은 ‘미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케 해준 실마리가 되었고, 「Sex and the City」는 뉴욕의 변화를 일러주는 척도로 거듭 언급된다. 작가의 섬세한 눈길은 자카르타 남부의 어시장에서는 “살아 있는 것, 살려는 것, 산다는 것”의 그 모든 욕구를 짚어내고(169쪽), 인도네시아의 외진 길에서의 치안 부재를 탓하면서는 로마 멸망의 원인까지를 떠올린다(180쪽). 또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식민도시 반둥에서는 열등생들의 회합처럼 변질되어 버린 비동맹회의를 반추한다(194쪽). 안달루시아의 건조한 냄새까지도 쏙 빼닮은 뉴멕시코의 어느 캠핑장에서 김치통을 열고 밥을 해먹을 때는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조선인들”을 떠올린다(61쪽). 노래하는 박용민이 궁금하신가? 여행지에서 찾아뵌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 내외분과 기타 퉁기며 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선한 마음의 소유자인지를 헤아리게 한다(90쪽). 모든 여행자는 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낯선 곳을 기록한다. 노트에, 가슴에, 사진기에, 머리에…. 선하고, 멋지고, 유별난 여행자 박용민의 여행법은 그래서 딱 그만큼 포근하고 은근하고 독특하다 바람구두 여행문고 001 볼거리보다는 읽을거리 위주의 편성을 내걸고 탄생한 바람구두 여행문고의 첫 책으로 이 별난 외교관의 여행담을 소개하게 되어 참으로 느껍다. 예나 지금이나 책 한 권은 무용지물로부터 인생 전환의 빌미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좋은 여행이 더 나은 생의 동력이 되듯, 좋은 기행문학 한 권이 보다 풍성한 삶을 꿈꾸게 했다는 뿌듯한 독후감을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