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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성인 시성청원인이 되다.
당시 한국순교자 시성추진 현황 생소한 기적심사관면을 청하다. 눈부시게 빛났던 김수환 추기경의 역할 너무나 고마웠던 시성성 장관 빨라찌니 추기경 시성 확정 시성건의 명칭 변경과 서울에서의 시성 결정 시성후보자 명단 재작성 시성식 준비 걸어서 로마를 다녀오신 김대건 신부님 교황의 방한 일정과 시성식 때의 시성청원 시성식 거행 시성 경축행사 103위 성인 축일제정과 시성칙서 초기순교자 시복 준비 ≪한국천주교회의 교부≫ 출간 파리외방전교회와 아노즈 몬시뇰 그리고 103위 시성 <황사영 백서>와 <신미년 백서>를 다시 만나다. 103위 시복 과정 다시 청원인이 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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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김수환 추기경의 역할은 너무도 눈부시게 빛났다. 김추기경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시성성 장관의 면담 일정을 잡기 위해 4월 13일 시성성 장관을 만났더니, 빨라찌니 추기경이 뜻밖에도 “김추기경이 로마에 체류하는 시간이 짧고 여러 가지 일로 바쁘실 테니 모든 것을 김추기경이 편한 시간에 맞추겠다”고 하여 면담은 너무나 편하고 쉽게 성사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교황청 국무성 장관 추기경과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다른 여러 부서의 장관 추기경들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김추기경께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저희가 어떡하든지 시간을 내드려야지요’라고 하였다. 심지어 교황의 개인알현도 쉽게 성사되었다. 교황까지도 시간이 정 안 나면 식사에 초대해서라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 pp.45~46 시성성 장관 빨라찌니 추기경이나 차관 크리산 대주교는 최고위 성직자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이미 각각 71세, 65세 된 분들이었다. 그래서 당시 32세밖에 안 된 유학생 신부인 필자를 마치 아들이나 손자를 대하듯 늘 인자한 웃음을 지으면서 반갑게 반겨주곤 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무슨 말을 해도 두 분 다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귀담아 들어주곤 하였다. 그런데 차관보 페라야 주교는 당시 60세의 중견 실무자였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으며 주어진 업무에 철두철미하게 최선을 다하는 베테랑 실무자였다. 그래서 필자는 페라야 차관보를 늘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빨라찌니 장관 추기경이나 크리산 차관 대주교를 대할 때와는 달리 늘 긴장을 해야 했다. --- p.100 그때 로마에서 한국을 왕복하는 비행기 표를 제일 싼 것으로 구입하였다. 그랬더니 비행기는 완행버스처럼 몇 곳을 들러 태국 방콕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로마로 가는 비행기로 바꿔 타야 했다. 문제는 방콕 공항에서는 우리나라 쪽에서 온 승객과 필리핀 쪽에서 온 승객이 합쳐져서 한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필리핀 쪽에서 와야 하는 비행기가 사정이 생겨 방콕으로 오지 못하였다. 결국 방콕에서 로마로 가는 비행기도 못 뜨게 되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이 항공사에서 지정해준 호텔에서 김대건 신부님의 왼쪽 종아리 뼈 일부가 들어 있는 가방을 침대 머리맡에 모시고 하룻밤을 잤다. 이렇게 해서 김대건 신부님도 태국 방콕에서 하룻밤을 지내실 수 있었다. --- pp.142~143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일정을 잡는 데 가장 어려웠던 일은 교황의 소록도 방문이었다. 당시 한국정부 관계자들은 교황 방한을 계기로 한국을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교황이 이왕이면 멋진 곳, 시설도 잘되어 있는 좋은 곳을 방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황이 가장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처음에 한국정부 관계자들은 교황의 광주 방문도 꺼려했다. 그러나 “한국에 3개 관구가 있고 광주도 관구니까 교황이 방문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이 문제는 쉽게 넘어갔다. 하지만 교황청과 한국정부 관계자 간에 합의가 잘 안 되어 끝까지 힘들었던 것이 바로 교황의 소록도 방문이었다. --- pp.150~151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방문을 위해 개인적으로도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하였다. 미사를 한국어로 집전하기 위해 한국어 연습을 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1984년 4월 28일에는 ‘한국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한국어로 발표하였다. 그리 길지 않지만 그래도 이 메시지를 발표하기 위해 교황이 기울인 노력은 정말 눈물겨울 정도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인들의 마음과 심정을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하던 중 알래스카를 떠나 한국을 향할 때 같은 항로(R20 항로)를 비행하다 희생된 대한항공 승객들을 추념하는 기도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는 여러 행사에 참여하며 귀한 말씀을 남겼다. --- p.158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아노즈 몬시뇰에게 그 그림에 대해 말해주었다. 한국교회에서 가져가지 못한 이유가 24위 복자들이 하필 일본 사무라이처럼 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아노즈 몬시뇰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자신이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 만든 그림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노즈 몬시뇰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였다. “한국신자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최선을 다해 한 것입니다.” 아노즈 몬시뇰은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하지만 과연 한국교회가 24? 시복청원인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한 그에게서 이런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허탈해하는 아노즈 몬시뇰을 마음을 다해 위로하였다. 그리고 한국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아노즈 몬시뇰에게 한국교회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하였다. --- p.232 103위 순교자들의 시성이 결정된 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차 로마에 온 김수환 추기경은 짬을 내어 1983년 10월 7일 오후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황사영 백서> 원본을 보러 갔다. 필자도 동행하였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황사영 백서> 원본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친구親口하였다. 필자도 너무 감격하여 눈물이 났다. --- p.243 귀중본 보관소에 가보니 각국의 귀중한 자료들의 원본들이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 이런 귀중본들 중에 <신미년에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이 있었던 것이다. 이 편지 원본은 유리상자 속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 너무나 감격스러워 울컥 눈물이 났다. 200년 전 초기교회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애썼던 그 눈물과 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 pp.246~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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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사와 103위 성인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국내에 신앙을 들여옴으로써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문에서 쫓겨나고, 신분도 재산도 잃고 숨어 지내며, 인간의 기본권마저 빼앗기는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1886년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전까지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그리고 병인박해(1866) 때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바로 이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의 순교자 24위와 병인박해의 순교자 79위를 합쳐 103위 성인이라고 부른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로 103위 성인 중 한 명인 김대건 신부(1821~1846)는 병오박해 때 외국인과 교섭했다는 죄목으로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에 매닮)으로 순교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1983년에 김대건 신부를 포함해 우리나라 천주교회가 박해받을 때 순교한 103인의 순교자를 성인聖人으로 승인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이들의 시성식諡聖式을 거행했다. 이 책은 시성 25주년을 기념하여 출간된 저작으로, 시성이 확정되고 시성식이 거행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특별한 한국천주교회사’다. 필자는 한국천주교회가 103위 시성을 추진할 때 로마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시성청원인諡聖請願人이었다. 이 책은 시성 과정 외에도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나 요한 바오로 2세 등 필자가 시성 추진의 실무를 담당하면서 만나게 된 분들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 및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책 속으로 참고). 왜 특별한 한국천주교회사인가? 그렇다면 왜 특별한 한국천주교회사인가? 먼저, 당시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교회에서 기적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기적심사를 관면寬免해줌으로써 103위의 성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시성수속은 시복 후 해당 지역의 신자들이 복자를 공경하여 그 복자의 전구轉求로 인해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기적 검증에 대한 철저한 사전준비 없이 시성수속을 시작했다. 따라서 시성 추진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내세울 만한 기적사례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청 내의 시성 업무를 담당하는 시성성에서는 한국교회가 진료기록의 미비 등으로 기적을 증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기적심사를 관면받을 수 있도록 했다. 둘째, 우리나라의 103위 시성식은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시성식은 오래된 전통에 따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다. 1984년에 서울에서 시성식이 거행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계획되어 있어서였다. 이 밖에 로마에서 시성식이 거행된다면 순교자들의 가난한 후손들이 시성식에 참석하기가 힘들 것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 우여곡절 끝에 결국 시성식이 서울에서 거행될 수 있었다. 교황이 이 땅을 처음으로 찾은 1984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군부의 압제하에 기를 피지 못하고 숨이 막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때 교황이 찾아와 전국을 순례하며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였고 전라도 광주를 방문하여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였다. 또한 가장 소외된 이들을 찾아 소록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신군부 측은 교황의 우리나라 방문을 환영하면서도 광주나 소록도를 찾겠다는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결국 교황청의 설득으로 교황의 방한 일정은 교황의 뜻대로 정해졌다. 그 일정의 정점은 5월 6일에 있었던 시성식이었다. 교황은 시성식을 통해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진리를 위해,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걸어간 길을 축복하였다. 셋째, 103위 시성 명칭을 “한국의 라우렌시오 앵베르, 시메온 베르뇌 주교들과 김 안드레아 및 100위 동료 순교복자들의 시성건”에서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101위 동교 순교자들의 시성건”으로 변경한 점이다. 한국교회는 앞의 명칭은 길고, 이들이 한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데 부적절하다는 이유를 들어 시성성에 명칭 변경을 요청했다. 하지만 시성성에서는 프랑스 출신 순교자들도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순교한 것이니 한국의 성인이 되는 것이라며 가톨릭교회 내에서 국수주의는 용납할 수 없고, 프랑스 출신 순교자들 중 주교가 세 위가 있는데 이들을 제쳐두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시성 명칭에 언급하는 것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며 시성 명칭의 변경에 반대했다. 한국교회는 앞선 이유들 외에도 평신도의 역할이 컸던 한국교회의 상황을 감안해 정하상이 평신도 대표로 시성 명칭에 들어가길 원했기에 시성 명칭의 변경을 거듭 청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교회의 청이 받아들여지고 시성 명칭은 한국교회에서 원하던 대로 변경되었다. 왜 시복시성을 하는가? 시성諡聖이란 무엇인가. 종교상의 이유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산 사람들을 성인품聖人品에 올리고 후대의 신자들이 이들을 귀감으로 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시성에 앞서 시복諡福을 한다. 즉 시성식의 대상자는 복자여야 한다. 시복은, 신자들이 신앙의 영웅을 공경할 수 있는지 이들을 조사해 공적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교황청에서 승인하는 것을 말한다. 복자는 해당 지역교회나 수도원 등에서만 공경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은 전 세계교회에서 공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시복시성은 왜 하는 것인가? 원래 시복과 시성은 복자나 성인이 되는 당사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산 사람을 위해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계신 분들에게 복자나 성인이라는 칭호가 그 어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단지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존경하고 본받으려 할 때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이 바뀌어 결국 그는 하느님이 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가 신앙의 영웅들을 뽑아 시복과 시성을 하는 것이다(8~9쪽). 103위 시성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이유 이 책에는 103위 시성 추진의 전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필자가 시성 추진하는 일을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 교황청에서 한국교회에 어떠한 배려를 하였는지, 한국교회는 무슨 일을 하였으며, 교황청의 오랜 전통을 깨고 어떻게 서울에서 시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는지, 시성식 준비와 시성식 후의 마무리 작업까지 모든 일들을 소상히 적고 있다. 또한 필자가 시성을 추진하면서 만났던 사람과 사건들, 교황의 방한 일정을 정할 때의 이야기들, 시성식 후 103위 성인 축일 제정에 얽힌 이야기들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며, 이런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필자의 느낌들, 특히 신미년(1811)에 조선천주교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친필 편지나 <황사영 백서>를 다시 찾았을 때의 감회를 적고 있다.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귀한 자료와 함께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필자가 이렇게 103위 시성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103위 시성식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시성 과정을 정리하여 발표하는 것이 새롭게 추진하는 시복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요청하는 이들도 있다. 굳이 이런 요청이 아니더라도 103위 시성 과정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하여 일지를 찾아보며 글을 쓰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다. …… 필자가 시성청원인으로 한 작은 일들을 알리고 싶어서 이 책을 내는 것은 아니다. 103위 시성 과정의 ‘이야기’도 역사의 한 부분이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때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것이 우리의 진솔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두어야 발전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한국교회는 새롭게 신유박해 때 순교한 124명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 책은, 124위 시복시성이 제대로 추진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한국교회가 새롭게 추진하는 124위 순교자 시복시성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황청의 관련 법령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책 말미에는 103위 성인들 한 분 한 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