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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잊혀진 천재가 된다는 것 -종교가 그의 영화를 망쳐버렸던 걸까 -1980년대 한국영화의 전위, 이장호 감독 한국영화사가 가장 사랑한 러브스토리 -만들면 다시 새로워진다 -16편의 영화, 16개의 같고도 다른 「춘향전」들 어떤 아방가르드의 기억 -아까운 재능이 고작 9편 찍고 퇴출되다 -1990년대 충무로의 불량학생 장선우 감독 웃음 뒤에 남은 것 -바보들, 행진하다 -스트레스死한 히피세대의 스타 하길종 역사 속의 미아들 -왜 멀쩡한 영화인들이 군국주의 깃발 아래 줄섰을까 -발굴되는 역사, 친일영화·친일영화인들 진지함의 절정 -독립운동하듯 영화를 찍다 -「오발탄」과 영원한 모범생 영화학도 유현목 감독 혹사당한 영혼을 애도함 -무엇이 한 영화천재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미완의 천재, 희대의 낭만주의자, 이만희 감독 가고 또 가는 길 -왜 아직도 임권택인가 -구세대가 전멸한 충무로에 100편의 영화로 남은 임권택 감독 뮤즈와 메시아의 만남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살다 -신상옥과 최은희, 그리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검열의 시대 -감독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걸작 소설에서 ‘에로영화’로 전락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슬픈 악녀 -다섯 번 다시 보기, 마침내 하녀 편에 서다 -심리스릴러의 걸작, 김기영의 「하녀」 유혹의 맛 -애절하게 기적을 꿈꾸다 -이광수의 꿈, 신상옥 배창호의 꿈, 예수의 꿈 귀신영화의 교과서 -CG 이전, 한국 공포영화의 구석기시대를 만나다 -「월하의 공동묘지」와 최고의 악녀 캐릭터 도금봉 70년 만의 생환 -변사와 악단, 미국에 가다 -역동적이며 리드미컬한 소동극, 「청춘의 십자로」 리바이벌 엔조이 여성 변천사 -자유부인들, 어디로 가시나 -「자유부인」에서 「바람난 가족」까지, 집 나온 노라들의 운명 에필로그 엔딩크레딧 찾아보기 |
趙善姬
조선희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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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 영화를 한마디로 설명하는 말은 무엇일까. ‘1990년대 충무로에서 가장 아방가르드에 가까웠던 감독’ 정도 아닐까. 한국영화에서 무엇을 아방가르드라 부를 수 있을까. 전위란 늘 이동하는 것이어서 시공을 초월한 절대기준은 없다. (…) 다만 전위 작가들에게서 어떤 공통적인 태도를 추려낼 수는 있을 것 같다. 1. 과거와의 단절, 필사적으로 새롭고자 함. 2. 비상업적인 태도, 적게 쓰고 얼마 벌든 상관 않기. 3. 관객에게 아부하지 않기, 논쟁과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음. 여기서 2의 경우 그가 언더그라운드에서 충무로로 올라오는 길에 어딘가에 내던져버렸을 테고, 최소한 1과 3에 관한 한 1990년대 충무로에서 가장 합당한 사례는 장선우였음에 틀림없다. --- p.55
1960년대 영화판에서 신상옥 감독이 상업영화 시스템의 최강자였다면 그 반대편 맨 끝에 유현목이 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감독이 영화의 예술 가치를 만드는 데 머리의 30퍼센트밖에 쓸 수 없으며 나머지는 잡념에 시달린다면서 “원고지에 글을 쓰는 문인이나 작곡가, 미술가들이 부럽다”라고 한 적 있다. 그는 밀실에서 작업하는 고독한 작가들을 부러워했다. 그는 영화 제작비를 조달하고 제작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을 잡념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신상옥 감독은 반대였을 것이다. 심지어 신상옥 감독은 연출로 부족해 제작까지로 오지랖을 넓혔다. 신상옥은 할리우드 웰메이드 영화가 모토였고 유현목은 한국의 소설가들과 호흡을 같이 한 것은 이런 직업관 차이와 관련 있다. 그럼에도 유현목 감독은 그 시스템 안에서 비교적 널찍한 활동공간을 확보했다. 게릴라 식으로 찍은 「오발탄」 같은 작품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충무로 시스템 안에서 「카인의 후예」도 찍었고 「춘몽」도 찍었다. 그런 진지함도, 실험성도, 걸러지거나 가공되지 않고 스크린에 투사될 수 있었다. 한국영화가 산업적으로 영악해지기 전의 일! 그것이 1960년대였다. 유현목의 그 지극한 60년대적 진지함에 대해 나는 향수와 함께 존경의 염을 품는다. --- pp.141-142 김기영 감독이 왜 ‘식모’ 대신 ‘하녀’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층 양옥, 라이스 카레, 피아노 레슨처럼 모더니즘 취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좀 더 계급 색깔 나는 쪽을 택한 것 아닐까 싶다. (…) 김기영 감독은 의사 출신이다. 서울대 의대를 나왔고 잠시 의사 일을 했으며 아내는 치과의사였다. 김기영 감독은 메스를 든 의사의 자세로 영화를 찍는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각각 하나의 해부학 교실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해부당하는 건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라는 또 하나의 육체다. 사회 시스템, 그 기본 단위인 가족, 그것을 견인해나가는 여인, 이것이 김기영 감독의 집요한 해부학 과제다. 일견 탄탄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중산층 가정이지만 이 가족의 공동생활을 해부했을 때 그 내부는 비릿비릿하고 너덜너덜한 오장육부의 엽기적인 풍경이다. --- pp.233-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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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자료원장 3년, 조선희를 매혹한 전설의 영화들
「청춘의 십자로」에서 「꽃잎」까지, 50여 편을 말하다 전 「씨네21」 편집장이자 이번 9월 24일자로 한국영상자료원장 3년 임기를 마치는 조선희. 그가 한국 고전영화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로 일한 19년간 ‘새것 중독’에 빠져 있던 그가 뒤늦게 발견한 고전영화의 세계, 그 흥미진진한 텍스트 안팎을 조망한다.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씨앗이 된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이장호 감독에서 시작하여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영화 「춘향전」, 충무로 아방가르드 장선우 감독, 일제 식민시대 친일영화와 영화인들, 그 밖에 하길종, 이만희, 임권택, 신상옥, 김기영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사에 방점을 찍은 감독과 배우, 대표작 들을 다룬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하거나 주요 감독들을 다룬 책들은 있었다. 하지만 한국 고전영화와 영화인들을 이처럼 밀도 있게, 풍부한 자료를 근거로 직접 취재하고 교류한 기록까지 담은 책은 드물다. 더욱이 화석화한 옛날 영화로서가 아닌, 현대 작품과 감독들에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살핀다. 그 사이사이에 저자의 경험담과 논평을 실었다. 조선희는 자신의 산문집 제목(『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에서처럼 ‘영화판’이라는 정글에서 살다가 돌연 소설가로, 다시 공직사회의 ‘정글’로 나타나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그에게 『클래식 중독』은 정글의 삶을 총정리한 일종의 고백록이다. 이 책이 한국영화에 대한 평론이자 생생한 취재기요, 애틋한 감성이 묻어나는 에세이로 읽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요즘 영화에 없는 진지함과 사랑스러움을 보라 2000년대 한국영화는 할리우드영화 못지않은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낸 깔끔한 영상과 정교한 스토리를 자랑한다. 하지만 조선희는 ‘오히려 사유의 깊이는 예전 영화들보다 얕아진 게 아닐까. 화려한 영상에 가려 영화의 다양한 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지’ 하는 의구심을 품는다. 한국영화의 첫 번째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1960년대는 진지하고 심각한 단편소설이 그대로 영화언어로 직역되던 시대다. 또 그렇게 심오한 영화를 관객들이 기꺼이 보아주었다. 저자는 1960년대 영화들을 만났을 때 “이삿짐 싸다가 장롱 구석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저금통장을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라고 말한다. 당시는 영화 편수와 영화 인구가 늘었을 뿐 아니라 그 속에서 걸출한 감독들이 배출되었다.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 이만희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이만희 감독의 「귀로」가 보여주는 도저한 비관주의와 문제제기적 태도는 요즘 상업영화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개봉 당시 흥행했던 것을 보면, 그때는 진지하고 심각하면서도 폼 나고 분위기 있는 영화로 작가와 관객이 서로 통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감독의 「여섯 개의 그림자」나 「마의 계단」은 미스터리 스릴러의 수작들이고 「여자가 고백할 때」 「검은 머리」 「원점」도 독특한 매력을 지녔다. ‘고전영화 넘버 1’으로 꼽히는 「오발탄」을 비롯해 유현목 감독의 영화들은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문학작품들을 고스란히 번역해 관객에게 각성을 요구하고 토론거리를 던져주었다. 거칠고 소박한 옛날 영화 속에 놀랍도록 진지한 정치의식이 살아 있으며 삶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때, 영화를 대하는 기준과 태도 역시 달라질 것이다. 나아가 당대 현실과 영화인들의 삶을 알고 본다면, 영화가 오락거리 이상의 농밀한 텍스트이자 귀중한 체험임을 깨달을 것이다. 굴곡 많은 시대와 삶, 숨은 에피소드까지 여타 예술 장르가 그렇듯 영화도 당대의 사회문화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는 고전영화에 영향을 끼친 시대와 영화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저자가 ‘뒤늦게 발견한 걸작’으로 꼽는 영화 「꽃잎」은 장선우 감독이 영화를 통한 정치적 발언에 성공한 케이스다. 야만의 시대는 야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 「꽃잎」은 우리에게 어느 만큼 눈에 익은 다큐멘터리 동영상의 표면을 열고 그 폐부로 들어간다. 그것은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인데, 그것을 진저리치지 않고 좀 더 온건하고 편안한 방식으로 대면하게 해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 장선우가 선택한 ‘강간과 폭력’은 가장 적절한 화법이다. 관객은 생살이 찢어지는 느낌으로 1시간 40분의 고문을 견뎌야 할 의무가 있다. 장선우 감독은 언제든지 이 사건을 잊힌 기억 속에서 불러내는 가장 소름 끼치는 소환장치를 발명한 것이다. ―52쪽에서 「꽃잎」이 한 시대를 효과적인 언어로 텍스트화한 경우라면, 텍스트 밖의 시대상황 때문에 창작의 자유가 가로막힌 사례들도 많다. 영화 검열이 바로 그것이다. 하길종 감독의 1975년 작 「?보들의 행진」은 군사정권하의 억압적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는데, 실제로 영화 필름과 감독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하길종은 검열을 거치지 않은 이 영화 편집본으로 시사회를 열었다가 작가 최인호와 함께 안기부에 잡혀 들어가 곤욕을 치렀으며 결국 필름은 30분 분량이나 잘려나갔다. 더욱이 민주주의가 폭발하던 60년대 미국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돌아온 하길종 감독에게 한국사회는 거대한 감옥과 다름없었다. 결국 그의 의욕과 열정은 꺾였고,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난 그를 저자는 ‘스트레스死’했다고 본다. 한편, 식민시대에 태어나 영화 데뷔하던 해에 군사정권이 시작된 불운한 천재 이만희 감독. 그는 「7인의 여포로」 때문에 반공법으로 실형을 산 최초의 작가가 되었다. 또한 계급 문제를 다룬 걸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81년에 영화로 나왔지만 걸작이 아닌 통속 에로물로 전락했다. 수차례 심의, 검열을 거치고 개작을 거듭하면서 에로신만 두드러지고 만 것. 저자는 「바보들의 행진」과 「난쏘공」에 대한 당시 심의 서류를 원문 그대로 인용, 당시 검열 과정과 영화 제작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암울했던 시대를 말할 때 일제 식민지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2004년 이후 영상자료원에 중국과 러시아에서 발굴된 필름들이 들어오면서, 그 시대 영화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유물들의 귀환이 반갑지만은 않은 것이, 1938년 이후의 영화들은 거의 군국주의 협력영화, 그러니까 친일영화이기 때문이다. 1941년 작 「지원병」 「집없는 천사」, 1943년 작 「조선해협」 등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이것을 ‘시대적 조울증’과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해석한다. 특히 「집없는 천사」는 필름이 발굴, 공개되기 전에는 친일영화임을 알 수 없었다가 일장기 아래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는 결말이 밝혀지면서 명백한 친일영화 목록에 올랐다. 친일 예술활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 저자는 ‘지도도 없이 미로에서 길 잃은 사람들’이라 말하며 딱한 심경을 토로한다. 영화계 현장에 함께한 저자인 만큼, 감독과 배우 등 영화인들의 사연도 흥미롭게 펼쳐 보인다. 남한과 북한, 미국을 넘나들며 60년 세월을 함께한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또 이만희 감독의 젊은 연인이었던 문숙. 2006년 우연히 그녀를 만난 이야기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천재감독의 사랑과 인생, 그것은 영화 그 자체였다. 영상자료원의 안과 밖 임기 동안 거둔 성과 그리고 말 많던 의혹에 관하여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으로 재직한 3년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부임했을 당시 ‘옛날 영화와 사귀는’ 자료원 사람들이 신선했고, 그 속에서 자신도 옛날 영화를 자주 접하면서 마침내 클래식의 가치에 눈떴다고 말한다. 3년 임기 동안 영상자료원에서 이룬 성과는 적지 않다. 우선 예산투쟁에서의 성공. 덕분에 상암동 새 청사 이주를 성공리에 마무리했고 필름 복원복제 시스템의 주요 장비들을 갖추었으며, 디지털 아카이빙과 고전영화 온라인 VOD서비스를 시작하고 한국영화사연구소와 보존기술센터를 만들었다. 또한 2000년대 영화들이 칸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동안 우리 고전영화들도 칸영화제 클래식부문에 개근했다. 영상자료원이 디지털 복원한 「열녀문」이 2007년 처음 칸영화제에 진출한 데 이어 2008년에는 「하녀」가, 2009년에는 컬러영화로 첫 디지털 복원한 「연산군」이 진출했다. 디지털 복원작을 매년 칸에 가져간다는 것은 한국영상자료원의 수준을 말해주는 동시에 한국의 지적?문화적 수준을 보여주는 의미를 띤다. 그 밖에 해외 아카이브를 뒤지면서 초창기영화를 발굴해 ‘텅 빈 필름창고’를 채울 수 있었던 것도 보람이었다. 덕분에 최초의 한국영화는 2004년 중국전영자료관에서 찾아온 「군용열차」의 1938년에서 2005년 들여온 「미몽」의 1936년으로, 다시 2007년 발굴한 「청춘의 십자로」의 1934년으로, 2년씩 기록을 갱신해왔다. 「에필로그」 후반부에서는 영상자료원장 사퇴 압력 의혹에 대해 차분히 해명해놓았다. 임기 내 정권이 바뀌면서 영상자료원장 자리에 대해서도 여러 설들이 난무했던 게 사실. 그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밝히면서, 정치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