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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정희
여름, 하민 가을, 동민 겨울, 영한 그리고 봄, 정희 작가의 말 |
趙善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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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 앞에서 하민이 동민과 따로 갈 데가 있다며 떠나고 부부만 남았을 때 정희가 중얼거렸다. “4인 가족이 이렇게 제각각인데. 대통령은 어떻게 하나. 나라를 가지런히 운 영하는 건 당최 불가능한 거지.” 정희는 멀어져 가는 남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민은 이제 추석에나 보게 되려나. 가만히 되짚어 보니 동민은 오늘 자기 아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말도 섞지 않았다.
--- p.24~25 가끔 새로운 골칫거리가 묵은 골칫거리를 밀어낸다. 어떤 이질적인 이슈가 다 른 심리적 이슈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는 일이 종종 있다. 이슈의 신진대사 라고 할까. 유난했던 봄이었다. 딸은 정희에게 뒷골이 얼얼해지는 강펀치를 날렸고 동시에 살짝 흥분되는 자유의 순간들을 선사했다. 덕분에 그녀는 윤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잠시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p.73 영한은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있는 아들 앞에 망연자실, 앉아 있다. 뭔가가 다 깨지고 다 무너졌다. 가슴속이 삭막하고 눈앞이 자욱했다. 영한은 울고 싶어 졌다. 하룻저녁 가벼운 대화로 아들과 화기애애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화통한 대화는 아들과 자신 사이에 놓인 것이 작 은 틈이 아니라 깊은 계곡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핸드폰 사건은 사소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영한은 어깻죽지가 축 늘어졌다. 혐오의 팬데믹이 우리 사이를 너무 벌려놨구나. 이걸 건너갈 수 있을까. 이걸 메우는 게 가능할까. 당장은 아니라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메워질 수 있는 골인가. 갑자기 이 사회 에 대해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 p.250 “어딘가에 아카시아 나무가 있나 봐.” 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향기는 한참 더 따라온다. “봄은 참 좋다.” “그래, 봄은 좋아.”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죽은 땅에서 아카시아를 피워낸다. 정희는 중학생 때 처럼 다시 명랑해지고 싶어진다. --- p.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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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 아니라 사과를 준비해야겠어.” (봄, 정희)
엄마(정희) 아빠(영한)의 결혼기념일 점심에 딸(하민)이 근사한 비건 파인다이 닝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다고 했을 때, 거기에 2년 전 통기타 하나만 들고 집을 나갔던 아들(동민)도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정희는 그날이 최악 의 하루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그마치 네 식구의 3년 만의 외 식이었고, 대선이 끝난 이후 지리멸렬한 이유로 해체되었던 4인 가족의 재결 합 자리였으니까. “파트너를 찾은 거 같아. 아니, 찾았어. 결혼 상대.” “얘가 정말 사람 놀래키네. 남자친구 생긴 거야?” “그게… 그런데… 남자가 아니고. 여자야.” _본문에서 “내 결혼 소동과 대통령선거, 어떤 게 엄마에게 더 큰 도전이었을까.” (여름, 하민) 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에 커밍아웃까지 했지만, 결국 엘리사 부모님의 반대 로 결혼식이 취소되었다. 이명이 심해지는 엄마(정희)도 신경 쓰이고, 동성 결 혼에 대해 쿨하게 반응했던 아빠(영한)도 마음에 걸린다. 하민은 다시 ‘그라운 드 제로’로 돌아왔다. 하민이 엘리사를 처음 만난 건 언어교환 모임이었다. 당시 엘리사는 여행 중이었고 튀르키예에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엘리사는 내일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그때, 엘리사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온다. ‘하민, 지 금 일하고 있어? 나를 만날 수 있어?’ 하민과 엘리사는 어떻게 될까? 결국 헤어지게 될까? 하지만 서른은 판타지와 결별하는 나이, 이제 내 인생 은 시시해지는 일만 남은 걸까. 책임에 가위눌리는 일 만 남은 걸까. 집과 회사 사이의 셔틀인생, 연봉과 승진 에 목을 매는 따분한 군상 속으로 스며들게 되는 걸까. 또는 워킹맘이라는 고단한 트랙에 올라타서 무면허 엄 마 노릇을 하게 되는 걸까. 발신인 불명의 선물상자 앞 에서 두근거리는 일은 더 이상 없는 걸까. 올해 일어난 일들은 길고 긴 판타지영화의 엔딩 세리머니였는지도 모른다. _본문에서 “자꾸 5.16하고 5.18이 헷갈려.” (가을, 동민) 입사지원서를 쓰고 또 쓰다가 지쳐 있던 동민은 인디 밴드 하자고 꼬시는 94(친구)의 말에 넘어가 통기타 하나만 들고 집을 나왔다. 하지만, 홍대 앞에 서 동민을 맞은 건 코로나였다. 지난봄, 미호(친구)가 밴드를 나갔고, 밴드는 해체한 것도 활동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남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 로 동민은 아빠(영한)와 자꾸만 부딪치기까지 한다. 전철을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동민은 정엽이나 한 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졸업하자마자 바로 스 타트업에 들어간 친구인데 3년째 잘 다니고 있다. 누나 얘기에 발끈했었는데 어느새 음악 접고 집에 들어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직장을 갖고서 음악은 취 미로 해도 되지 않냐? 동민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아 빠뿐이 아니었다. _본문에서 “혐오의 팬데믹이 우리 사이를 너무 벌려놨구나.” (겨울, 영한) 영한은 대학 4학년 때 노동야학을 하다가 조직 사건으로 엮여서 학교에서 제적되어 남영동 지하실을 겪고 감옥에도 다녀왔다. 1년 6개월이면 병역면제인 데 2개월이 모자라 30개월 군대를 또 갔다. 7년 만에 학교에 복적이 된 영한 은 뒤늦게 전공을 바꿔 공부해, 이름도 잘 모르던 지방대에 전임 자리를 얻어 취업했다. 하지만 수강 신청하는 학생들이 점점 줄면서 전공과목이 하나씩 폐 강되더니 결국 영한이 있던 사회학과가 없어졌다. 하지만 뒤늦게 교수가 된 영한은 사학연금 20년 기준을 마저 채우고서야 퇴직을 할 수 있었다. 은퇴 스트레스에 섹스리스 부부생활, 그리고 동시다발로 닥쳐온 갱년기 슬럼프에, 검사가 대통령이 되는 정치 스트레스까지.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가 된 어느 가을날, 영한은 아들(동민)과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아들 얼굴에 핸드폰 을 던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이겨내기 위해서 왕년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영한은 지금 책을 쓰고 있다. 제목은 ‘혐오의 팬데믹을 넘어’. 영한은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있는 아들 앞에 망연자실, 앉아 있다. 뭔가가 다 깨지고 다 무너졌다. 가슴속이 삭 막하고 눈앞이 자욱했다. 영한은 울고 싶어졌다. 하룻저 녁 가벼운 대화로 아들과 화기애애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화통한 대화는 아 들과 자신 사이에 놓인 것이 작은 틈이 아니라 깊은 계 곡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핸드폰 사건은 사소한 해 프닝에 불과했다. 영한은 어깻죽지가 축 늘어졌다. 혐오 의 팬데믹이 우리 사이를 너무 벌려놨구나. 이걸 건너 갈 수 있을까. 이걸 메우는 게 가능할까. 당장은 아니라 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메워질 수 있는 골인가. 갑자기 이 사회에 대해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_본문에서 “봄은 참 좋다.” (그리고 봄, 정희) 딸(하민)이 베를린으로 떠난 지 6개월이 지났다. 수시로 카톡과 전화통화를 하지만, 비행기 열두 시간 거리에 여덟 시간의 시차가 심리적 거리를 벌려놓 는다. 딸(하민)은 정희에게 여전히 지독한 혼란이다. 베를린에서 자신을 품어 주는 커뮤니티를 만났다는 게 흐뭇하면서도 씁쓸하다. 가족에게조차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는데 이국의 사회가 환대하고 있다는 게 마냥 박수 칠 기분은 아니다. 동민(아들)은 출근한 지 세 달째다. 사장 포함해서 다섯이 일하는 작 은 맥주 회사다. 동민(아들)이 집에 돌아왔다 했더니 다시 남편(영한)과 둘만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화장대엔 약병들이 늘어나면서 화장품을 밀어내고 있다. 남편(영한)은 한참 가위에 눌려 고생하더니 벗어난 듯하다. 불면증에 우 울증으로 남성호르몬제를 발랐던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정희와 영한은 둘 중 하나가 인내심이 조금만 모자랐어도 지금은 남남이 되 었을지도 모른다. 영한은 거의 집에 없었고, 정희는 기자 일을 하는 워킹맘이 었다. 당시에 정희는 늘 영한에게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하민이 대학생이 되고 동민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집안일이 줄자 좀 지낼 만해지더니,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부모와 심리적 물리적 거리를 벌리자 둘은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혐오의 팬데믹을 넘고 있는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겨울이 가고 나면 봄이 오듯이 이 가족은 다시 명랑해질 수 있을까? “나는 사람들 상식을 믿어. 부지런히 하루하루 살면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세상이 이상한 데로 가지는 않을 거야.” _본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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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한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과 다르지 않 다. 여기 이제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꼰대’가 되어버린 전직 교수 출신 아버지와 이명을 앓고 사는 전직 기자 출신 엄마, 튀르키예 출신 동성 애인과 독일로 훌쩍 떠나버린 딸, 그리고 망해버린 인디 밴드의 일원이었던 아들이 있다. 이들은 예전 서로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미세한 금이 가 버린 접시처럼 관계와 내면에 파열선이 그어져 있다. 정치적인 문제로 맞부닥 뜨리고, 성 정체성과 진로, 이런저런 사회현상에도 의견이 충돌한다. 다행인 것은 이 가족이 아직 혐오의 단계까지 넘어가진 않았다는 것. 순환하는 계절 을 바라보듯 서로의 처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지켜보려고 노 력한다는 것, 그 점이 이 가족의 내일을 낙관하게 만든다. 일찍이 역작 『세 여자』를 통해 지나간 역사의 어느 한 순간을 당대로 소환해 낸 작가 조선희 는 이번엔 날렵하고 예리한 솜씨로 작금의 문제를 작금의 무대 위로 끌어올 렸다. 한국 소설은 현실보다 반걸음쯤 느리고, 변혁보다 해석에 몰두하는 성향이 강한데, 조선희의 이 소설은 다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민첩하게 직진한다. 기다리지 않고 가뿐하게 먼저 달려나간다. 그 뜀박질에서 지키고 싶은 ‘믿음’을 본다. 이 소설은 그 ‘믿음’에 대한 기록이다. -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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