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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조레스를 기억하다
Ⅰ.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가 Ⅱ. 자아의 발견 Ⅲ. 충만한 직업 Ⅳ. 정의와 역사에 봉사하다 Ⅴ. 통합을 향해 Ⅵ. 우리 노동계급의 수호자들 Ⅵ. 나는 산 자를 부른다.나는 죽은 자를 호곡한다.나는 천둥벽력을 깨뜨릴 것이다. Ⅶ. 그리고 지금 불이 붙고 있다 에필로그 우리는 죽은 자들을 깨우리라 연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옮기고 나서 |
Max Ga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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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모든 불행과 우리들이 저질렀거나 또는 겪었던 불의를 관통하여 진실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성에 폭넓은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느낌 그리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운명에 대한 예감이 없다면 그것은 스스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 1903년, 고등학생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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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두 암살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당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비밀결사 소속 청년이 권총으로 암살한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암살 한 달 뒤에 일어난 또 다른 암살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사실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14년 7월 31일 국가주의에 사로잡힌 라울 빌랭이라는 프랑스 청년이 쏜 권총에 암살되는 그 사람이 숨겨진 장본인이다. 유럽대륙에 드리워진 짙은 전운을 온 몸으로 막아서다 암살당한 그는, 장 조레스(Jean Jor?s)다. 프랑스 통합 사회당의 지도자이자 유명한 일간지 『뤼마니테』의 창간인인 그가 암살당하자 유럽대륙에서 반전의 목소리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고삐가 풀려버린 것이다. 지식인이자 정치가, 인본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 이 책은 프랑스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자 진보적인 역사학자로서, 국내에는『나폴레옹』,『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을 통해 소개된 막스 갈로(Max Gallo)가 역사소설의 형식으로 쓴 장 조레스의 일대기다. 역사소설의 형식을 빌었지만, 이 책의 대부분은 기록과 증언에 기초한다. 이 기록과 증언에 기초해서 보면, 그는 지식인이었다. 프랑스 남부 시골뜨기 출신인 그는 대학입학자격시험에서 후에 유명한 철학자가 된 앙리 베르그송을 제치고 수석으로 입학한다. 졸업성적은 베르그송이 2등, 조레스가 3등이지만. 그가 평생 남긴 저술이 400쪽 분량의 책으로 80~90권에 이르고 보면 그가 한시도 지식을 쌓고 연구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정치가였다. 그는 26살에 의원이 되었고, 암살당한 55살 당시에도 의원이었다. 30년 동안 6선의원으로 의회에서 활동했다. 처음 의정활동은 공화파 의원으로 시작했으나 노동자들의 파업에 개입하며 사회주의 의원으로 활동하게 되고, 암살되는 그날까지 사회주의 의원으로 남는다. 그를 다섯 번이나 의원으로 뽑아 준 ‘카르모’ 지역 노동자들은 그들의 파업에서 자신의 편이었던 조레스에게 말한다. “ 우리는 당신, 조레스 시민과 싸웠다. 그러나 다수가 당신과 함께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의 입후보에 찬성한다. 당신만 바르게 나간다면, 당신은 우리보다 더 충실하고 더 헌신적인 친구를 보지 못할 것이다.” (165쪽) 그리고 조레스는 바르게 나아갔다. 그는 인본주의자였다. 그는 수많은 서평과 저술에서 본인의 근본적인 사상적 원천이 인본주의에 있음을 밝혔고, 실제로 그런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엄청난 정치적 손해와 입지에 타격을 받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 당시,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조아 내부의 일’로 규정짓고 무관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홀로 의회 연단에 서서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 후에 레옹 블룸은 이를 프랑스 사회주의에 “새로운 도덕적 원대함”을 불어넣었다고 평한다. 그리고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주의는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혹은 완고한 사회주의자인 게드와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이견을 청취해서 ‘통합하고 종합’했다. 그에게 ‘개인주의’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사회주의는 평화’였다. 그는 암살당하기 두 시간 전 사회주의자를 대표해서 국무차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들에게 맹세합니다. 만약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당신들이 우리를 전쟁으로 끌고 가면 우리는 봉기를 일으킬 것이며 민중에게 진실을 외칠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친 후 단골 카페 크루와상에 들러 딸기 파이를 먹으며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머리에 총을 맞고 암살된다. 1914년 7월 31일 금요일 오후 9시 40분이었다. 21세기의 조레스를 기다리며 조레스는 ‘인민의 호민관’이라는 영예로운 묘비명으로 팡테옹에 안치되어 있다. 사후 90년이 지난 지금도 선거에 나오는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공공연히 존경을 표하는 정치가이다. 충분히 고민하고, 잘 조직하며, 민중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연민이 가득한 정치인, 사회주의자 조레스.. 누군들 존경하지 않을까. 오늘 이 땅에서도 조레스와 닮은 정치인을 바라는 민중은 여전히 많은데, 우리는 왜 이리 헤멜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