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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의 중국 근현대사 사색
푸른역사 200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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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이끄는 글導論
현존 일기 자료의 성격
일기의 한계
이 책의 주안점
기타 고려 사항

1부 황푸 군관학교에서 북벌까지
황푸 군관학교
중산함 사건
북벌과 국민당의 숙청 작업

2부 “국내를 먼저 평정한 다음에 외적에게 저항을”
1927년의 하야와 일본 방문
쑹메이링과의 결혼
제2차 북벌과 전국 통일
중원대전
마오쩌둥과의 대결
만주사변과 그 여파

3부 항일전쟁
지구전: 이론과 실천
상하이 전투에서 난징 함락까지
독일의 중재와 중?일의 협상
절망의 겨울, 1937~38년
타이얼좡과 쉬저우
한커우, 창사, 그리고 광저우
왕징웨이의 투항
기나긴 교착 상태를 향해
공산당과의 갈등
타락해가는 군대
진주만으로 가는 길

4부 “4대 강국”과 그 부담
스틸웰 장군의 부임
제1차 버마 원정과 그 여파
장제스의 “최후통첩”
카사블랑카에서 트라이던트 회담까지
언쟁과 궁정정치
카이로 회담
미국 여론과의 관계 악화
“그가 모든 걸 가질 순 없다”
제2차 버마 원정
이치고 작전과 헝양
스틸웰 사건
대일승전일을 향하여

5부 전후의 장제스, 그리고 결론
내전
장제스 총통의 반응
대륙에서 쫓겨나며
타이완에서의 마지막 세월
결론을 대신하여

주석
참고문헌
옮긴이의 글
찾아보기

저자 소개 2

Ray Hung,黃仁宇,황런위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 1918년 후난 성 창사長沙에서 출생하여,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 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중국군의 장교가 되어 항일전쟁에 참전했으며,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8년부터 1980년까지 뉴욕의 뉴 폴츠 대학 교수를 지냈다. 1980년대 이후 저술 활동에 집중하여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했다. 2000년 봄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에 번역된 주요 저작으로는, 저서로는 《거시중국사China: A Macro History》(1997, 까치),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資本主義與卄一世紀》(2001, 이산),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 1918년 후난 성 창사長沙에서 출생하여,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 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중국군의 장교가 되어 항일전쟁에 참전했으며,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8년부터 1980년까지 뉴욕의 뉴 폴츠 대학 교수를 지냈다. 1980년대 이후 저술 활동에 집중하여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했다. 2000년 봄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국에 번역된 주요 저작으로는, 저서로는 《거시중국사China: A Macro History》(1997, 까치),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資本主義與卄一世紀》(2001, 이산),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赫遜河畔談中國歷史》(2001, 푸른역사), 《중국, 그 거대한 행보中國大歷史》(2002, 경당),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the Ming dynasty in decline》(2004, 새물결), 《중국의 출로近代中國的出路》(2005, 책과함께) 등이 있다.
‘통념을 뒤집고 실체를 추적하는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근세사를 전공했으며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관계, 명청 시대 경제사 등을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국내를 대표하는 중국 근세사 전문가로 꼽힌다. 탄탄한 사실 증명과 정교한 논리에서 비롯된 설득력 있는 역사 연구로 주목받고 있다. 또 사료 분석과 추론을 통해 잘못된 역사 지식을 바로잡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은 책으로는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조선시대 외교문서』,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최후의
‘통념을 뒤집고 실체를 추적하는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근세사를 전공했으며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관계, 명청 시대 경제사 등을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국내를 대표하는 중국 근세사 전문가로 꼽힌다. 탄탄한 사실 증명과 정교한 논리에서 비롯된 설득력 있는 역사 연구로 주목받고 있다. 또 사료 분석과 추론을 통해 잘못된 역사 지식을 바로잡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지은 책으로는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조선시대 외교문서』,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최후의 황제들』, 『중국의 감춰진 농업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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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12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648쪽 | 932g | 153*224*35mm
ISBN13
9788994079035

출판사 리뷰

격동의 중국 근현대, 장제스는 무엇을 했는가

장제스 일기, 중국 근현대사의 공백을 메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의 항일전을 이끌었던 인물은 분명 장제스蔣介石(1887~1975)다. 그러나 우리에게 장제스는 항일전쟁의 영웅으로서보다 마오쩌둥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뒤 타이완으로 쫓겨 간 내전의 패배자로서 더 익숙하다. 격동의 중국 근현대, 장제스는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 그 격렬했던 혁명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제스가 수행했던 역사적 역할은 무엇인가.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1587 만력 1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등 “역사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역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저서들을 통해 세계 각지에 수백 만의 독자를 거느린 중국사가 레이 황은 《장제스 일기를 읽다Chiang Kai-shek and His Diary as a Historical Source》에서 이 같은 물음에 답한다.
레이 황이 장제스 일기를 꺼내든 궁극적인 목적은 칭찬도 단죄도 아니다. 쑨원은 틀렸다, 장제스는 틀렸다, 마오쩌둥은 틀렸다, 덩샤오핑도 역시 틀렸다는 식의 비난 일색인 책들을 접하며 레이 황은 질문을 던진다. “만약 각자의 시대에 중국의 대중운동을 대표하는 지도자였던 이들이 죄다 실패의 상징이라면 과연 무엇이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올바른 접근법인가?” 부정적인 비판에 몰두하는 것이 이제 막 자신감을 회복한 중국 사람들의 사기를 짓누르는 효과를 낳을 뿐이라는 생각 하에 레이 황은 장제스 일기를 토대로 20세기 초중반 중국 역사의 공백을 메우고자 한다. 장제스의 일기 자료를 훑어봄으로써, 이미 제시되고 출판된 근대 중국상의 뼈대에 살을 붙이려 한 것이다.

장제스, 상부구조를 만들어내다
장제스와 그의 일기에 대한 레이 황의 관심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웅 혹은 악한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특정 이념에 입각하여 장제스 개인의 성실성을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레이 황의 목적이 아니다. 레이 황은 주로 장제스가 중국 혁명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에 관심이 있다.
그렇다면 레이 황이 본 장제스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장제스는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과연 무엇을 했는가. 레이 황은 단적으로 말한다. 장제스가 중국의 상부구조를 만들어냈다고. 장제스와 국민당은 20세기 초 무너져 내린 중국을 조용히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애쓴다. 군대에 대한 국가의 통일된 지휘체계, 법정 통화, 중앙집권적인 재정, 새로운 행정기구, 그리고 일단의 군사학교를 포함한 통합된 교육 시스템 등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상부구조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상부구조가 효율적으로 작동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여건상 비효율과 불안정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민간 부문의 지원도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강력한 제국주의 세력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전쟁도 치러야 했다. 레이 황은 이 같은 대내외의 악조건 하에서도 장제스가 나름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장제스가 자신의 정력과 임기응변으로, 중국이 근대 세계 속에 자리를 잡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장제스,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거시적 구조 속에서 바라본 중국 근현대

이 책에는 레이 황의 독특한 중국 근현대사 인식, 약 100년 전 중세적인 왕조 국가였던 중국이 격렬한 혁명적 변화를 거쳐 20세기 말 근대 국민국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장제스,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이 수행했던 역사적 역할을 거시적인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레이 황이 장제스의 일기를 통해 확인한 중국 혁명의 결산은 다음과 같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나라를 위해서 새로운 상부구조를 창조했다.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하부구조를 해체하여 다시 꾸렸다. 경제 개혁을 통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사이의 새로운 제도적인 연결들을 시도하는 일은 덩샤오핑과 그 추종자들에게 달려 있다.” 일기를 토대로 본 장제스는 ‘항일전쟁의 영웅’이나 ‘국공내전의 패배자’라는 단순한 평가에 매몰될 인물이 아니다. 레이 황의 눈에 비친 장제스는, 때로는 무책임하고 때로는 우유부단했지만, 무너져 내린 왕조의 폐허 속에서 새로운 근대국가의 틀을 다진 인물이었다.

소모적인 이념 싸움을 경계하며
옮긴이 구범진은 이 책이 레이 황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를 위한 역사적 ‘변명’으로 ‘오해’될 소지가 없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에 깔려 있는 레이 황의 중국 근현대사 인식은 강한 현실 긍정이다. 즉 레이 황은 20세기 말 중국 근대 국가의 눈부신 발전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장제스,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 세 명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발전을 가능케 한 역사적 토대를 단계적으로 구축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 근현대사 이해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역사학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이념적으로 보이는 소모적 싸움이 격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혹 누군가가 이 책을 장제스를 위한 ‘변명’으로 ‘오해’하여 그 소모적인 이념 싸움 속으로 끌어들일지도 모르겠다. 구범진은 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레이 황의 현실에 대한 강한 긍정은 자칫 과거에 대한 비판의 마비로 이어질 우려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결과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러한 결과를 낳기까지의 과정에서 발생한 유혈과 희생을 모조리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점을 항상 되새겨야 할 것이다.

태평양전쟁, 장제스의 모습들

1920년대 초, 모든 것이 무너진 중국

황제에게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부여했던 제국 질서는 1911년의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남성이 여성 위에, 연장자가 연소자 위에, 그리고 교육 받은 엘리트가 무식한 대중 위에 자리한다는 사회의 원칙은 1917년에서 1921년의 기간에 무효로 선포되었다. 국민 가운데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대략 10퍼센트 미만에 불과했다. 조세 수입은 지방 관아만을 근근이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중국은 더 이상 조직화된 국가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 서양을 모델로 한 새로운 헌법과 의회가 진지하게 수용되기는 불가능했다. 레이 황은 군벌의 등장만이 이러한 상황에 너무나도 잘 들어맞았다고 말한다. “당시의 특수한 상황 아래에선, 개인에 대한 충성의 원칙 위에서 작동하고 마구잡이식의 수탈에서 재원을 얻는 사적인 군사력만이, 이 과도기 동안에 이렇다 할 만한 권위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벌과 같은 권력은 일개 성의 범위를 넘어 확장할 경우 더 이상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또한 그런 권력은 외국으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할 힘도 없었다. 전체 국가를 지탱해왔던 중앙의 황제가 붕괴되고 하부구조를 받치던 원칙마저 무너진, 그리하여 각 성에서 사적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득세했지만 권력을 성 너머로 확장시키지는 못했던, 이것이 바로 1920년대 초 장제스가 정계에 등장했을 때의 전체적인 상황이었다.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수단에 의지해야 한다
1887년 저장 성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장제스는 젊은 시절 잠깐의 방황 후 1923년경부터 스스로를 당대 중국 역사의 일부로 만들기 시작한다. 쑨원의 지시로 황푸 군관학교 설립에 나서고, 1926년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북방군벌 타도의 깃발을 든다. 그러나 장제스에게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국민정부는 좌우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군벌들의 세력은 막강했다. 북벌 기간 여러 군벌들과의 협력과 배신, 공산당과의 합작과 분열, 공산당의 위협 등을 경험한 뒤 장제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수단에 의지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작동 상태에 있는 기계가 없었던 상황에서 장제스는 감정에 호소하고, 금전으로 유혹하고, 강제력을 동원하면서 자신만의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임시변통의 수단을 쓰고 상황을 조작하며 남에게 부당한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1927년 4월 청당을 건설, 북벌을 함께 했던 공산당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장제스는 스스로를 새로운 중국과 동일시하게 된다.

국내를 먼저 평정한 다음에 외적에게 저항을
청당 이후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10년간의 “난징 시대”에 들어간다. 이 기간 동안 장제스는 두 번이나 하야하는 등 수많은 반대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장제스는 국민정부의 기둥으로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새로운 국가 지도자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1927년 12월 평생의 반려자인 쑹메이링과 결혼한 장제스는 1928년 2월 제2차 북벌을 감행한다. 그리고 결국 1928년 말 전국을 통일한다. 그러나 통일은 각 지역과 각 성의 강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일시적인 합의였을 뿐이다. 1930년 군비 감축을 둘러싸고 북벌을 함께했던 펑위샹-옌시샨 연합과 벌인 중원대전은 이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장제스에게는 마오쩌둥과 공산당이라는 강력한 내부의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제스는 네 차례의 위초 원정을 통해 마오쩌둥과 공산당이 대장정에 오르도록 만든다. 강력하고 통일된 중국을 향한 장제스의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라도 죽음에 구애하고 어디서라도 생존의 기회를 추구한다
1937년 7월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중국군과 전면전을 벌인다. 그러나 장제스는 일본군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방어 계획도 없었고, 재정도 넉넉하지 않았으며, 동맹국도 없었다. 병사 충원을 위한 징병령도 전쟁 발발 후에 공포되었을 정도였다. 1937년 8월 이후 10주 동안 지속된 상하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수도 난징까지 함락당한 것은 이 같은 중국의 상황에 대퇇 단적인 증명이다.
1937~38년 절망의 겨울을 지나면서 장제스는 미국의 루스벨트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양쯔 강 중류를 따라 방어선을 강화한다. 그 결과 타이얼좡 등 일부 지역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모든 전선이 일본의 강력한 압박 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할 만큼 장제스에게 외교는 장기가 아니었다.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진행했던 공산당과의 합작도 갈등 때문에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부족한 군수물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적으로 군자금을 빼돌리는 장교도 많았다. 그런 가운데 1941년 12월 일본군은 미국의 진주만을 습격한다. 이는 8년 동안의 중일전쟁 전체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4대 강국”과 그 부담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중?미 관계는 장제스에게 최고의 관심사가 된다. 서구 열강이 대일 전쟁을 개시하면서 중국은 미국, 영국, 소련과 함께 “4대 강국”의 하나로 격상된다. 일본 견제의 전초기지로서 중국의 위상에 대한 재조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장제스에게 대단한 명예였지만 동시에 막중한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장제스의 전체적인 전략은 “버티기”였다. 적보다 더 오래 버티겠다는 모호한 생각 외에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도 일정표도 없었다. 구체적인 전쟁 방법의 결여는 동맹국들을 괴롭혔고,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멸시를 초래했다. 특히 장제스가 버마에 파견한 중국 원정군 총지휘관으로 임명한 스틸웰은 장제스와 여러 면에서 갈등했다. 1943년 일본 폭격을 위해 건설한 청두 비행장의 건설 비용을 둘러싸고 장제스가 과도한 요구를 하자 루스벨트는 딕시 사절단을 보내 공산당 지원 방안을 찾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황은 초기의 불리함을 딛고 연합군에 유리하게 돌아가다가 결국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막을 내린다.

전후의 장제스, 그리고 결론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은 내전에 휩싸인다. 장제스는 헐리의 중재로 마오쩌둥과 충칭에서 회담을 진행한다. 장제스는 공산당이 자신의 헌정 정부 안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얻는 것을 대가로 무장 반란을 포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협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은 계속 전투를 벌였으며, 결국 국?공 내전이 발발한다.
내전은 장제스가 대륙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장제스는 정복자, 통일자, 그리고 중국 대륙의 수호자로서 첫 번째 시기를 통과했다. 하지만 두 번째 시기는 한 때 포모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큰 섬, 타이완에서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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