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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어가기 앞서
1.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던 신라인의 미소 야마추치의원의 젊은 의사가 입수한 기와조각 하나 얼굴무위 수막새가 경주로 되돌아오기까지 박일훈 과장, 그리고 오사카 긴타로 홍륜사지인가, 영묘사지인가? 2. 조선물산공진회와 야외전시유물의 수집 1915년, 그해 가을 경복궁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공진미술회관의 건립과 야외전시유물의 배치 잔치는 끝났어도 박물관은 남았다. 1916년 4월 1일 박물관수장품카드가 작성되던 날 3. 개태사 철확,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가다 너희가 연산의 가마솥을 아느냐? 개태사 철확은 과연 홍수에 떠내려갔나? 드디어 연산공으로 옮겨지다 총독부박물관의 유물수집, 그리고 반환 다시 연산공원으로 깨어진 이내 몸ㅇ 편히 쉴 곳은 어디뇨? 5. 무주 한풍루, 통속잡지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다 싸사자석등은 아니 보이고 한풍루가 나타났네! 무주의 한풍루인가, 영동의 금호루인가? 다시금 새겨보는'기록' 의 의미 마감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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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렇게 기억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게는 그것만큼 더 간절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그러니까 그 누구라도 부지런히 적어둔다는 것은 정말로 소중한 일이다. 그것이 어디였던지 간에 크게 구애받을 것도 없지 않나 싶다. 그리고 또 기억의 힘보다는 기록의 힘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본디 제 있던 곳이 어디이고 또 어떻게 지금의 자리로 흘러들어온 것인지 그 내력이라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가 겪어야 할 서러움은 조금이나마 덜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야만 혹여 제 고향을 되돌아갈 수 있는 단 한줄기 희망만이라도 버리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시 들어가기에 앞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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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석탑과 부도와 탑비와 석등과 석불과 철불들.... 역사와 기록의 힘을 믿으며 감행한 새로운 문화재 보고서
이 책의 저자 이순우는 아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증권사를 거쳐 투자자문회사에 근무하며 증권과 기업, 주식투자에 대해 꽤 여러 권의 책까지 써내며 보통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경력을 자랑한다.
그런 그가 1년 전 엉뚱하게도 문화재에 관한 책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써내 읽는 이들을 놀래키더니, 다시 1년 만에 그 두 번째 책을 들고 나타났다. “문화재에 대한 별다른 관념도 없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옛 절터를 기웃거리던 시절”을 거쳐 각자의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석탑과 부도와 탑비와 석등과 석불과 철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것들의 흔적과 이동경위에 대한 궁금증으로 인해 주말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관련 기록을 집요하게 뒤적거리고 현지 답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확인하면서 “기록 자체의 잘잘못 정도는 가늠할 수 있을 만한 눈썰미가 생겨났다”는 겸손한 고백을 했던 저자의 마음가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제 여러 매체에 자유기고를 하며 다큐멘터리 작가로도 활약하고 있는 저자는 두 번째 책을 내놓은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세월이 가고 또한 사람도 가고 나면 모든 기억의 끈도 더불어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관계의 확인은 무엇보다도 지체없이 곧장 이루어지고 또한 기록으로 남겨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대원칙이 아닐까 싶다. 더이상 물어볼 이조차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나마 덜 게으른 누군가가 남겨놓은 단 한 줄의 기록이라도 남아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고작해야 도서관의 서가를 들락거리며 그렇게 기억의 편린들을 주워모으는 것이 전부일 텐데, 그러한 사실관계의 복원은 차라리 벅차고 힘겹다.”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조사보고서, 둘』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 朝鮮物産共進會)’와 그 즈음에 수집된 ‘고만고만한’ 크기의 야외전시유물에 관한 얘기가 그 뼈대를 이룬다. 저자는 기록발굴과 자료추적을 통해 몇 가지 궁금증을 풀어나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야외전시공간을 그득히 채우고 있는 석탑과 부도와 탑비 등의 태반이 바로 그로 인해 경복궁으로 흘러 들어왔던 1915년. 1915년 가을의 경복궁에는 도대체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그 당시 야외전시구역을 장식하기 위해 제자리를 떠난 전시유물들은 과연 어떠한 연유로 수집대상에 선별되었던 것인지? 그 경위는 또 어떠했던 것인지? 그리고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 때문에 수집된 것이 분명한데 박물관의 안내문안에는 왜 자꾸 1916년에 옮겨왔다고 적어놓은 것이 수두룩한 것인지? 그 당시 야외전시유물의 수집에 있어서 두드러진 특징이나 공통점은 또 무엇이었는지? 일제는 조선지배 5년을 기념, 조선의 물산 발달과 서정(庶政)의 현황을 한 곳에 전시하여 장래의 진보를 촉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는데, 박람회라는 말이 사치경박의 악풍을 조장한다며 굳이 공진회라고 하였다. 이는 경진대회(競進大會)의 뜻으로 큰 구경거리가 생겼다고만 여기지 말고 고분고분하게, 부지런히 일하라는 뜻이란다.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 간 1,176,523명의 관람객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장소가 바로 경복궁이다. 이를 핑계삼아 경복궁 일대의 전각을 대대적으로 헐어버렸고 그 일이 결국에는 조선총독부 청사의 건립으로 곧장 이어졌으니 장소 선정 이유가 분명해진다. 행사 후 공진회 미술관은 총독부박물관이 되었다. 1990년대 이르러 경복궁의 복원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직전까지 우리가 해방 이후에도 줄곧 보아왔던 궁궐 내 야외전시유물의 풍경은 바로 이 시기에 그 골격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조선물산공진회장 전경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경복궁으로 수집되어 올라온 야외전시유물의 면면을 조목조목 살펴나간다. 세키노 타다시 일행의 1912년 <고적조사보고>에 의해 세상에 알려져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던 원주 지역의 석불과 철불 외에도 이천 향교방석탑, 이천 안흥사오층석탑, 남계원칠층석탑, 영전사 보제존자사리탑, 영천사삼층석탑, 천수사오층석탑, 경주 감산사지 불상 등 원래 있던 자리도 다르고 경복궁으로 옮겨진 시기도 제각각인 유물들의 사연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중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지의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만 보더라도 우리 유물의 기구한 운명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경복궁으로 바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충주군청 관아에서 왔는데, 추측컨대 “세키노 박사가 충주에 왔을 제에” 권위 있는 박사의 고견을 듣고 이 지방 관료들이 재빨리 관아로 옮겨 두었을 것이라고 한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경복궁 마당을 떠나 박물관 지하수장고에, 그것도 상륜부는 떨어져나간 채 들어가고 말았다. 한편 경주남산 삼릉계약사불은 테라우치 총독에 의해 경성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진열품 수집대상을 선정하는 일에 직접 개입하였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들만 있는가 했더니 그와는 반대로 용케도 제자리로 돌아온 문화재들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 책에 수록된 얼굴무늬 수막새, 개태사 철확, 무주 한풍루에 관한 얘기가 그것들이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던 신라인의 미소, ‘얼굴무늬 수막새’ -일제시대에 잠깐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영영 잊혀질 뻔했던 얼굴무늬 수막새를 일본에서 되찾아 온 것이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라는 걸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박일훈 관장의 숨은 노력 또한 얼마나 소중한지. 누군가 그렇게 기억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게는 그것만큼 더 간절한 일이 어디 또 있을까? 그러니까 그 누구라도 부지런히 적어둔다는 것은 정말로 소중한 일이다. 기억의 힘보다는 기록의 힘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그래서 저자의 이런 바람이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본디 제 있던 곳이 어디이고 또 어떻게 지금의 자리로 흘러온 것인지 그 내력이라도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가 겪어야 할 서러움은 조금이나마 덜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야만 혹여 제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단 한줄기의 희망만이라도 버리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