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압도적인 스타일, 매혹적인 이야기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유럽 만화의 정수 만화가 프랑수아 스퀴텐과 시나리오 작가 브누아 페테르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탄생한 ‘어둠의 도시들’은 1983년에 시작되어 총 16권이 출간되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작업되고 있는 판타지 그래픽 노블 연작으로 유럽 전역에 번역되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시리즈는 SF적 세계관인 반(反) 지구 이론에 기반을 둔 그래픽 노블이다. 거대한 건축물들이 빼곡하지만 음울하고 우수에 찬 분위기 속에서 어쩐지 거대한 폐허처럼 보이는 이 도시들에서는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파국으로 치닫고, 그것을 목격한 이들은 혼돈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어둠의 세계는 책 속에 실재하는 한 행성의 공간인 동시에 우리의 실제 세계에 대한 은유적 공간이다. 건축 양식, 과학과 진보에 대한 태도로 볼 때 이 도시들은 20세기 초 유럽이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면모를 드러내며 마치 살아 있는 캐릭터처럼 작품의 중심에 서 있다. 작가들은 ‘브뤼셀Bruxelles’을 ‘Brusel’로 변형시켜 쓰는 등 실제 지명을 활용하고, 보고서, 신문 기사 등 각종 자료를 등장시키며 마치 이 세계가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이런 도시들을 배경으로, 회화적인 아름다움과 혁명적 스타일을 고루 갖춘 그림, 예술, 신화, 건축, 고고학 등 인류의 문명을 집대성한 소재가 불러오는 철학적 성찰, 책 속 세계의 정교한 설정은 지적 호기심에 충만한 독자들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이 때문에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새로운 세대 독자들의 요구에 반응하고 있는, 살아 있는 고전이다. 2010년 세미콜론에서는 『기울어진 아이』 외 『우르비캉드의 광기』, 『보이지 않는 국경선』 등 시리즈 중 세 권 출간을 시작으로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 열두 권을 선보인다. 3년 여의 준비 기간을 거친 이번 시리즈 출간은 유럽 현대 만화의 진면목을 선보이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유럽 만화의 황금기를 거쳐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다 아이들을 위한 매체로만 여겨졌던 만화는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실험의 결과가 축적되어 성인을 위한 매체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이 과정에서 68 혁명 이후 만개한 자유와 저항의 분위기로 인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문화가 큰 전환점을 맞게 되면서 만화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많은 만화 잡지가 창간되었고 작가들의 그룹도 많아졌다.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시도하고 다른 장르와 접합되기도 하면서 만화는 점점 문학의 경지로 발전해 갔다. 에르제의 ‘땡땡’ 시리즈 이후로 프랑스에 한참 뒤처져 있었던 벨기에 만화계에서는 선배 만화가들을 그저 전통을 모방하고 따르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지만, 어느 한 쪽에서는 그 판도에 작은 균열을 만드는 대담하고 색다른 실험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로 브뤼셀 생뤽 미술학교의 클로드 르나르 아틀리에의 만화 작업들이었다. 유럽 만화의 황금기였던 1970년대 후반 생뤽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이 흐름을 체험한 프랑수아 스퀴텐은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만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브누아 페테르스와 함께 하나의 시리즈를 기획한다. 건축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스퀴텐의 배경과 그가 체화한 만화 실험이 브누아 페테르스의 철학적 배경과 글솜씨를 만나면서 방대한 세계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토피아적 상상력과 건축적 야심이 빚어낸 벨기에 산 판타지 대작 유럽 만화의 팬들이라면 2000년 교보문고 출판부에서 나온 〈기울어진 아이〉를 기억할 것이다. 다른 천체의 중력이 작용하여 몸이 기울어진 채로 살아가는 한 소녀의 기이한 체험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만화 독자들만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과 이야기에 갈증을 느끼던 문학 독자들에게도 호응을 얻으면서 화제의 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약간은 난해한 소재와 이야기 전개,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상징들로 인해 ‘다소 난해한 유럽 만화’로 기억되었고, 2000년대 초반에 불었던 유럽 만화 붐이 사그라지면서 잊힌 상태였다. 『기울어진 아이』가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한 어려운 책으로 인식된 것은, 이야기 자체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방대한 시리즈 중 한 권인 이 책이 단독으로 우리 독자들에게 소개된 탓도 있었다. 『기울어진 아이』는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의 일부이면서 시리즈의 전반적인 설정과 세계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주요한 책이다. 그러나 한 권만 소개되면서 시리즈 전체의 설정에서 다소 어긋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상태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세미콜론의 시리즈 출간 기획으로 퍼즐의 한 조각이 드디어 다른 조각들과 맞추어지면서 독자들은 어둠의 대륙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전체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형식으로 만화의 틀을 뛰어넘다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로 총 16권의 책이 출간되었고, DVD 한 편이 출시되었다. 이 외에 관련 전시, 세미나 등을 합하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표된 작품의 목록은 꽤 길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세미콜론은 우선 열두 권을 출간할 예정이다. 열 권은 만화나 그림책 형식으로 된 이야기책이고, 한 권은 설정집 성격인 『어둠의 도시들 가이드북』, 나머지 한 권은 두 작가의 다양한 작업을 정리한 번외편이다. 이들 중에는 컷으로 나누어진 일반적인 만화도 있지만, 마치 형식 실험을 목적으로 한 작품인 것처럼 동화책, 신문 기사 모음집, 그림책, 여행 가이드북 등 예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형식의 책들이 선보이고 있다. 두 작가들은 만화의 틀을 벗어나 연극, 영상, 소리극, 전시 등 책의 형태를 벗어난 다른 매체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확장하기도 했다. 한 시리즈를 위해 다양한 양식을 혼합하고 매체간의 교차를 시도함으로써 책 속의 세계를 더욱 확장하고, 책 바깥의 현실과 적극적으로 만나게 한 것이다. 이는 그림과 이야기가 만나 만들어지는 만화의 본질적인 특성인 혼합성을 작품의 형식에 가장 극단적으로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조각난 이야기, 깊어지는 독서 등장인물이나 설정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각 권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있고 ‘스핀 오프’ 격에 해당하는 외전들이 있다. 그러나 중심과 외전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고, 중요도의 차이도 없다. 작가들은 “일련의 욕구와 우연한 만남, 사건들을 가로지르며 발전되는” 모험의 특성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하듯 비선형적 구성으로 이야기를 분산시켰다. 그들은 마치 어둠의 대륙 구석구석을 패닝하면서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들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듯하다. “전체적인 구상을 고집하기보다는 시리즈를 진행시키면서 계속 일종의 탈출책을 찾아야 한다.”는 의도가 강력히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이 시리즈의 독서 과정에서는 독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순서도 없고, 전체를 아우르는 명확한 줄거리도 없고, 각 권들이 느슨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독자들이 한 권씩 읽어나가며 퍼즐 조각을 맞추듯 상상력을 동원해 전체 세계의 모습을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 권 사이에 놓인 보일 듯 말 듯한 통로를 따라가며 ‘어둠의 도시들’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완성해 본다면 이 시리즈를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잘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은 ‘어둠의 도시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설정을 다른 프로젝트에도 슬쩍 끼워 넣는 등 또 다른 탈출 시도를 감행한 바 있다. 그리고 인터넷의 연결성과 인터랙티브한 특성, 예측불가능성에 일찌감치 매료되어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 공식 사이트(http://www.urbicande.be)를 개설해 두었다. 여기까지 손을 뻗어본다면 그야말로 독자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세계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건축, 만화와 만나다 『어둠의 도시들』은 벨기에 만화가인 프랑수아 스퀴텐과 작가 브누아 페테르스가 1983년부터 작업하고 있는 매력적인 건축 만화이다. 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어둠의 도시들’은 작품 전체가 공간과 건축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색적인 테마를 갖고 있다. 실제로 그림을 맡은 프랑수와 스퀴텐은 브뤼셀의 건축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이유인지 그의 그림은 실제 건물의 모방이 아닌 순수한 상상력에 기대어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데 건물을 표현한 섬세한 선과 표현, 밀도감 넘치는 섬세한 채색으로 마치 3D입체 영화를 보는 것 처럼 완벽하게 건물의 존재감을 표현해낸다. ‘어둠의 도시들’ 세계의 각각의 도시들마다 다른 양식의 건물들이 하나의 주인공으로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브뤼셀의 아르누보 건축부터 20세기 초반 뉴욕의 마천루 풍경처럼 도시마다 특징적인 각각의 주인공이 존재하는 것이다. 상상으로 쌓아올린 계획도시의 치밀함과 압도적인 배경을 통해 이미 이 작품은 유럽의 건축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전공학생들의 필독 도서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는 이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몇 예술가들의 자취를 정리해본다. 어둠의 도시들이 유적에 비치는 피라네시의 환영 ‘어둠의 도시들’의 과거의 영광, 현재의 폐허를 묘사하는데 분명한 영향을 준 예술가로 지오바니 바티스타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 1720-1778)를 들 수 있다. 18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생의 조각가, 판화가이자 고고학자, 건축가였던 이 재능 넘치는 예술가는 고대 로마의 폐허와 유적을 열정적으로 동판에 새겨 유럽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18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한 그랜드투어(Grand Tour)와 관련해 유럽 미술의 중심지이자 아름다운 풍광으로 널리 사랑받던 베네치아에서는 관광기념품이 쫇요했고, 그러한 요구로 생겨난 것이 이탈리아어로 ‘전망’을 뜻하는 ‘베두타(veduta)’란 정밀풍경그림이었다. 오늘날 기념사진이나 관광엽서 같은 베두타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귀족들의 필수품으로 담겨갔다. 피라네시의 작품은 고대 로마 예술의 사실주의적 묘사가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해석을 덧붙여 ‘베두타 이데아테’를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그의 ‘로마의 베두타’ 연작을 보면 마치 고대 어둠의 도시들을 그리기 위한 원화 스케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낯선 행성에 등장한 빅토르 오르타의 마을 이 시리즈에 담긴 스퀴텐의 그래픽 표현과 건축학적 스타일은 상당 부분 19세기 벨기에의 아르 누보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의 영향을 받았다. 1890년대 유럽에서 응용미술과 순수미술 내에 확립되어 있던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아르누보 운동이 융성했는데, 빅트로 오르타는 브뤼셀의 타셀 저택, 솔베 저택, 반 에트벨데 저택 등을 설계해 브뤼셀을 단숨에 아르누보의 수도로 만들었다.(빅토르 오르타의 주택 중 하나는 현재 브뤼셀 만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시리즈에서 정교하게 묘사해놓은 아르누보 양식의 주택들은 개방적인 설계와 조명, 건물의 구조, 현란한 곡선의 장식성 등 19세기 말 시대를 앞서갔던 오르타의 천재성에 바치는 헌사처럼 보인다. 빛의 도시의 구현, 클로드 니콜라 르두의 이상향 어둠의 도시들의 명망높은 건축가들은 자신의 도시를 건축적인 이상향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몰두한다. 때때로 이상주의자로 시대에 앞서간 건축가들은 광기에 사로잡혀 어둠의 도시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어둠의 도시들의 모델은 클로드 니콜라 르두(Claude Nicolas Ledoux, 1736-1806)의 아르케 스낭(Arc-et Senans)으로 보인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활동한 이 천재 건축가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의뢰로 브장송 근처에 왕립제염공장을 건립한다. 한가운데 제염소를 중심으로 일꾼들의 숙소가 고리모양으로 둘러싼 방사상으로 된 동심원 형태의 배치도를 마련했다. 그가 남긴 설계를 보면 방형, 입방체, 원, 구 등 기하학적인 형태를 적용해 경제 생산 활동은 간편하게 하면서도 노동자들에게 건강하고 안락한 생활조건을 보장하기 위한 건축적으로 이상적인 계획도시를 건설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계획안은 반도 채 완성되지 못했지만 현존하는 건축물만으로도 지금껏 지어진 어떤 건축물보다 미래의 도시에 와 있음을 느끼게 한다. 르두의 걸작 중 설계안 만 남아있는 농장관리인 주택 디자인과 공동묘지 디자인은 어둠의 도시들에서 벽과 공간이 있는 건축물로 다시 탄생한다. 두 세계에 펼쳐진 꿈의 구현, 쥘 베른 건축가는 아니지만 한 사람의 영향을 꼭 넣어야 한다. 그는 바로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 20세기의 과학은 쥘 베른의 꿈을 뒤쫓아 발달해왔다. 그는 증기 열차가 달리는 시절에 원자력 잠수함을 상상했고, 비행기가 태어나기 전에 로켓을 타고 달나라를 여행할 꿈을 꿨다. 지구에서는 과학의 발전이 쥘 베른이 소설에 묘사한 대부분을 현실로 실현시키고 발전시켰다. 그리고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의 한 권인 『기울어진 아이』에서는 쥘 베른이 고안한 로켓으로 지구를 방문한다. 어둠의 도시들 세계에서는 아직도 쥘 베른이 상상한 여러 도구들이 산업화와 대량생산을 거치지 않은 채 수공업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실현되어 있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의 증기 기관 열차와 범선을 보는 것처럼 이 세계의 모든 기구, 도구들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자인으로 가득하다. 우아하고 철학적인 유럽 SF의 신천지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는 ‘반(反) 지구’(counter-Earth, 태양을 공전하는 지구의 궤도 정반대 건너편에 존재한다고 여겨진 지구와 꼭 닮은 행성) 이론에 기반을 둔 그래픽 노블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필롤라우스(Philolaus)가 지구중심설에 반대하는 자신의 우주론을 옹호하기 위해 도입한 이 이론은 태양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행성이 동일 궤도 위를 공전하기 때문에 상호 간에 관측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로 많은 SF 작가들을 매료시켰다. 20세기 들어 다른 행성들로 무인탐사선을 보내는 등 우주탐사가 본격화 되면서 반 지구에 대한 의혹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존 노먼(John Norman)의 『고르(Gor)』시리즈와 폴 케이폰(Paul Capon)의 장편 『태양 반대편(The Other Side of the Sun)』 등, 과학 소설에서는 이러한 가설을 받아들여 지구와 거의 동일한 문명이 발달하고 있는 반 지구를 가정한 작품들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 그 작품 목록에 거대한 시리즈 하나가 추가된다. 바로 ‘어둠의 도시들’ 시리즈이다. 고대 그리스를 닮은 도시 국가들의 문명 ‘어둠의 도시들’의 세계는 이러한 반지구 행성에 존재한다. 그 곳에는 우리와 닮은 인간들이 마치 고대 그리스를 연상케 하는 독립적인 도시 국가에 살고 있으며, 각각의 도시는 독특한 건축학적 스타일에 맞춰진 개별 문명을 이루며 발전해왔다. 지구와, 지구에 비해 현저히 작은 이 행성은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의외로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두 행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이란 때로는 미미하며(이름이나 건물들, 혹은 지역 전체가 두 행성에 거의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때로는 엄청나다(어둠의 도시들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는 특성들이 지구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이 행성에서 건축은 단연 최고의 예술로 대접받으며, 건축가들이 그들의 도시에서 누리는 명성은 지구에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책이야말로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자 다른 어떤 전통적인 종교보다도 강렬하게 삶의 일부를 이룬다.(그러니 도서관 설계 공모 프로젝트가 이 세계에서 갖는 권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도시들의 별에서 가장 발달한 학문은 수학, 식물학, 의학, 점성술과 천문학(이 두 분야는 사실상 거의 분리되어 있지 않다)이다. 특정 분야, 이를 테면 대중교통 수단 같은 분야에서는 혁신적인 기술이 대거 동원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어둠의 도시들의 행성은 지구에 비해서 기술면에서는 뒤지고 있다. 기계 장치 분야에서만큼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이 행성에서는 기계의 무게가 곧 정밀함과 비례하며, 기계의 미적 완성도가 높을수록 품질도 보장된다. 윔홀로 연결된 두 세계 여행가들의 풍부한 기록이 ‘또 다른 지구’의 설명을 듣다보면 독자들은 익숙한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바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볼테르의 『깡디드』,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 같은 환상문학의 걸작들이 떠오르진 않는가? 흥미롭게도, 어쩌면 이 위대한 철학자, 소설가들은 어둠의 도시를 방문했을지도 모른다. 기록상으로 보면 노발리스의 『하인리히 폰 오프더딩켄』, 마테를링크의 『말렌공주』, 쥘리앙 그라크의 『길』『시르트의 바닷가』는 어둠의 도시들 행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 발터벤야민, 이탈로 칼비노, 이스마일 카다레 또한 이 행성의 조재를 모르지 않았다. 한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는 일생 동안 자신들이 지닌 정확한 정보들을 통해서 ‘어둠의 도시들’ 이야기를 전파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지구와 어둠의 도시들 세계는 어디선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딘가의 공간이 휘어졌든지, 혹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시공간의 틈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행성에도 지구인이 방문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는 바로 프랑스의 소설가 쥘 베른. 그는 어둠의 도시들을 수차례 방문했고 자신이 본 것을 소설로 묘사했다. 그가 쓴 ‘경이의 여행’ 연작은 지구뿐만 아니라 어둠의 도시들 세계에서도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허구의 소설이 아닌 지식서와 해설서로 읽히는 점이 다르지만. 지구 반대편, 어둠의 도시들, 인류의 또 다른 미래 모습 『어둠의 도시들』의 원제는 ‘les cites obscures’이다. ‘모호한/ 어둠의’를 뜻하는 프랑스어 ‘obscure’에서 이 시리즈를 지배하는 몽환적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행성이 있고, 그 세계는 마치 지구의 역사와 뿌리는 같으나 어느 순간 갈라져 버린 것처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 세계는 수수께끼와 비밀들이 존중되며, 해답보다는 질문이 언제나 환영받는 ‘모호한’ 도시이자 지구에서와 같은 계몽사상과 이성의 시대를 거치지 못한 ‘어둠의’ 도시이다. 종교는 민속연구의 한 분야 정도로만 존재하고, 과학자들은 상상력 풍부한 발명가처럼 보인다. 확실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시선으로 보면 ‘어둠의 도시’가 속한 세계는 비합리적이고 패러독스의 논리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에 ‘만약’이 존재한다면? 수많은 역사가들이 평가했듯이 732년 푸와티에 전투에서 이슬 람대군이 기독연합군에 패하지 않았다면 지구의 역사도 이들의 세계와 유사하게 변했을지 모를 일이다.(유럽은 종교 전쟁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그리스 철학을 덤으로 얻었을 것이다.) 『어둠의 도시들』 연작은 SF 세계관에 유토피아적 상상력, 판타지 역사관이 결합된 최상의 결과물이다. 예술, 신화, 건축, 고고학, 서지학, 지도학 등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꽃피운 인류의 문화가 책 속의 정교한 설정 속에 그들만의 미래의 모습을 그려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