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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_일본의 맥아더 연구열과 하지에 대한 우리의 무지
점령이 조선을 향하여 미국의 남한 점령정책과 하지의 통치 방침 하지의 남한 정계개편 구상과 과도정부 수립 계획 신탁통치 파동과 하지: 하지와 김구, 박헌영 하지와 굿펠로의 민주의원 설치 공작 하지와 좌우합작운동: 하지와 여운형, 김규식 하지와 이승만의 애증관계 남한 단저을 향하여 하지와 한국 현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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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맥아더 연구열과 하지에 대한 우리의 무지
태평양전쟁 후 일본의 역사는 맥아더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국민에게 맥아더는 정복자라기보다는 위대한 영웅, 일본을 구해낸 은인이자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맥아더에 대한 서적이나 연구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해방 이후 한국, 특히 남한에 한정한다면 남조선 점령 미 육군사령관 존 하지의 비중은 일본에서 맥아더의 비중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미군정 3년을 통해 한국의 정치와 국가 건설에 하지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기이하게도 이 이방인 군인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변변한 전기나 평전 한 권 나와있지 않다. 하지의 점령정책이 맥아더의 점령정책에 비해 덜 성공적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카리스마가 부족했거나 한국인에게 준 실질적인 이익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한국인들이 무엇이든지 잘 망각하는 국민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가. 일본의 현대사가 미군 점령이라는 조건에서 시작되었음을 고려할 때 결국 일본 사회의 맥아더 연구열은 일본인들의 자기 역사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하지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비교됨으로써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따라서 늦었지만 해방의 달을 맞아 존 하지와 미군의 점령통치를 다룬 단행본이 나왔다는 것은 우리의 이러한 부끄러움을 다소나마 덜어주는 의미 있는 작업일 수 있다. 저자 정용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미군정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우리 나라의 미군정 연구 권위자로 오는 9월 학기부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군 점령통치의 의도와 목적, 모순을 날카롭게 분석하면서도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하지와 관련된 비화와 비사(秘史)들을 많이 발굴, 소개함으로써 전문 연구자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로부터도 깊은 관심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2.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김구를 위협한 하지의 오만 존 하지는 미국 일리노이 주의 시골 도시 골콘다에서 태어나 일리노이의 농장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는 정규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출신은 아니었다. 24세 때 고등사관양성소에 입학함으로써 직업군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태평양전쟁 당시 여러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해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4군단 사령관으로 오키나와 전투에도 참가한 하지는 일본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9일 미 육군 남조선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하지가 부여받은 임무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3.8도선을 경계로 대소련 방벽을 구축하는 것 2가지였다.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전형적인 군인 하지는 이런 미국 정부의 방침을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독립 열망에 불타고 있던 조선인들과 도처에서 충돌하게 된다.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는 해방 당시 민족의 지도자였으며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 영원한 비운의 애국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런 김구도 하지의 눈에는 자신의 점령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장기판의 말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는 1945년 11월 김구가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김구를 위대한 애국자라고 칭송하면서 그가 ‘자신이 끓일 수프의 간을 맞출 소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31일 임정이 반탁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면서 포고문을 통해 경찰 기구의 접수를 선포하자 다음날 하지는 김구를 불러들여 ‘반탁시위가 군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탁통치에 반대하기 위해 행해졌다는 것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하지는 ‘자살하겠다고 날뛰는 김구를 겨우 진정시키고’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인 정치 지도자들을 대하는 점령군 사령관 하지의 고압적 자세와 오만을 확연히 읽을 수 있다. 미군정은 한때 이승만 대신 중도 우파 김규식을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앉히려는 생각도 갖고 있었지만 이것은 미군정이 진정으로 중도파를 선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군정의 중도파 지원은 중도파를 좌파로부터 분리시켜 우파를 강화하기 위한 다분히 공작적인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김규식과 여운형의 중도파는 좌우합작을 남북합작으로 연결시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 아래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따라서 미군정 주도하의 좌우합작은 출발부터 지향점이 달랐으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3. 불운한 장군인가, 분단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인가. 하지는 본국으로 돌아간 뒤 “미군정 최고 책임자로서 나의 직책은 내가 지금까지 맡았던 직책들 가운데 최악이었다. 만약 내가 정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민간인 신분이었다면 연봉 1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결코 그 직책을 다시 맡지 않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 자신 미군정의 실패를 자인한 것이다. 하지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려서 그를 불운한 이방인 장군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을 분단시킨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사에서 하지의 위치를 평가할 때 그를 ‘조숙한 냉전의 용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는 미국 대한정책 담당자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대소 봉쇄를 추구했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한반도에서 봉쇄정책을 조기에 구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미국의 대소정책에서 봉쇄의 개념이 일반화되는 것이 1947년 봄 트루먼 독트린 발표 이후라고 할 때, 하지의 사례는 한 논자가 평했듯이 ‘꼬리가 몸통을 흔든 격’(a case of the tail wagging the dog)이었다. 하지는 입으로는 한국 정치에 대해 중립을 지킬 것이며, 모든 정파의 정치인들을 공평하게 대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점령 전(全) 시기를 관통하는 그의 한국인 정치세력들에 대한 기본적인 세력 배치 구도는 우익 부양과 좌익 영향력의 거세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는 이러한 구도에서 남한 정계개편을 통해 점령 초기의 민족혁명적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했다. 하지가 의지했던 세력들은 일제하 부역 전력 등으로 인해 식민잔재의 청산이라는 차원에서 사실은 처벌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한국 사회의 대다수 민중들을 대표할 수 없었다. 하지가 한국 정치에 남긴 또 다른 나쁜 유산은 정치를 공작과 군사작전의 차원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 민중의 건국운동 열기를 제어하고, 한국 정치를 미국의 이해관계에 맞게 재편시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취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하지는 한국 민중을 작전의 대상으로, 정치 지도자들을 공작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와 한국인 정치세력들의 관계는 대화와 설득, 타협과 동의에 기반한 상호관계였다기보다 하지의 정치적 기준에 따라 포섭되거나 배제되는 일방적 관계이자 선별의 과정이었다. 하지는 점령통치를 위해 고문회의, 민주의원, 입법의원 등을 만들었지만 그에게 이들 한국인 기구들은 모두 장기에서 이기기 위한 장기판의 말들에 불과했고, 한국인 정치인들은 그가 끓이는 국물에 간을 맞출 소금에 지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