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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사람과 사람 사이
가을, 해질녘 외딴집 시인의 나라 아는가, 강은기 선생을 거대한 술독 할아버지 김대중 여인의 힘 진관 스님이 달려가는 까닭은? 효순이 미선아 고독, 깊고 푸른 또 만나요, 지구 위에서 제2부 흙의 노래 슬픈 산양 자연의 분노 그리운 고요 생명의 논 무엄한 시대의 기도 영혼을 헹구는 숲 왜 무지개는 뜨지 않는가 山이 무너지고 있다 생명의 눈으로 보라 쌀의 종말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다시 부석사에서 제3부 시간의 무늬 편지 누이들의 한가위 新유목민의 전사들 울지 말아요, 베트남 교회여, 내려오라 화장 세계화, 그 야만의 얼굴 행복했다, 붉은 6월은 475세대의 노래찾기 그대들, 비릿한 웃음 5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제4부 문명의 눈물 느리게 산다는 것 문명의 배신 新유목민사회의 가족 욕도 가벼워진다 위대한 발명, 지우개 카드의 진화 등 굽은 고향 비만의 아동 풍요의 그림자 복제인간 사람 만세 제5부 책의 힘 책의 꿈 존재의 되새김 최명희와 혼불 남자는 볼수록 초라하다 그래도 읽자, 즐겁게 잃어버림을 준비하라 숫자의 무한 팽창 블루, 천년의 기다림 날자, 비평이여 사랑은 우주의 힘이다 동화의 힘 처음과 끝이 있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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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우화>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문명과 사회에 대한 비판은 시원하고 아프다. 무분별하게 뚫은 길로 인해 무너지고 있는 산의 운명을 통해서 도시의 포식성에 대한 저항감을 드러내고, 물과 물이 몸을 섞는 갯벌에서 ‘인간의 눈’이 아닌 ‘생명의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을 주문한다. 한국 교회는 엎드려 기도하기에는 배가 너무 나왔다는 진단을 하기도 하고,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지구화’일 뿐이라며 비꼰다. 세계 제일의 휴대전화 왕국에서 ‘휴대폰이 크게 울릴수록 인간은 약해진다’는 경고하면서,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인간이 소외받는 안타까움이 행간을 채운다. 요즘 여성들의 인위적인 미에 대해 ‘여자의 아름다움은 남몰래 태어난다’고 귀뜸하고, 40대들이 불혹(不惑)이 아닌 미혹(迷惑)의 거리를 헤매고 있음을 고백한다. 40대의 나이에 70년대에 학교를 다니고 50년대에 태어난 무리 475세대, 그들은 누구인가? 가난에 쫓겨 밤차 타고 무작정 상경했던 사람들이다. 사회 구석구석에 독재의 살기(殺氣)가 스며들어 숨쉬기조차 어려웠던 시절, 날마다 자신의 비겁을 내리찍으며 울분을 삭여야 했던 사람들이다. 머리카락이 길다고, 치마가 짧다고 경찰서에 끌려가 무릎을 꿇어야 했다. 엄마?아빠?동생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미싱을 돌려야 했고, 누구는 자취방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싸늘한 주검으로 귀향을 해야 했다. 추석 귀성열차를 서로 먼저 타려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짓밟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돈 벌러 사우디로, 독일로, 미국으로 떠나갔던 사람들. 그래서 김포공항은 늘 목이 메었다. 머리카락이 길다고, 치마가 짧다고 경찰서에 끌려가 무릎을 꿇어야 했고, 고향이 그리워 자취방에서 머리를 고향으로 향하고 지친 몸을 쉬던 사람들이었다. 호치민(사이공)공항 대합실의 눈물바다와 만나는 1960, 70년대 우리네 풍경, ‘귀성객 압사사건’이 일어났던 1974년의 용산역, 가슴 아픈 이별의 현장과 사람이 사람에 밟혀 다치고 죽는 현장에서 가졌던 분노와 무서움조차도 이제는 시린 기억으로 간직하고, IMF란 거대한 물길에 가장 먼저 수몰된 사람들. 40대는 이 시대의 ‘퇴출세대’이다. 늙은 부모를 모셔야 하고, 아이들은 어리다. 은퇴하기엔 너무 젊고, 도전하기엔 늙은 사람들.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해 가슴 저미면서,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지 못해 미안해해야 하는 40대. 그들이 지나온 장면들이 우리 시대의 우화(寓話)가 되고 있다. <편지 그리고 질문> 우리가 맞고 있는 21세기는 확실히 편안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굶주려 있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이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문명’이라는 이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돌아볼 시점에 이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책은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다. 편지는 보낼 때는 익지 않았더라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그리고 시간을 지나가면서 발효된다. ‘시린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가슴에 구멍을 뚫고 통과해야 했던 우리들은 ‘편지’를 읽으며, 고향을, 자신을 찾아갈 것이다. 편지를 띄워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마지막 편지를 누구에게 언제 보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고뇌와 야망, 사랑과 눈물이 스며있던 편지들은 간절하고 애틋했다. 그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살까? 그들은 아직도 나를 잊지 않았을까? 그리고 내가 쓴 편지가 세상에 단 한 장이라도 아직 남아있을까? 있다면 누구의 책갈피에 숨어있을까? 그 중 몇 구절은 누구의 가슴에 희미하게나마 남아있을까?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한번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그리운 것들을 불러보자. 숨가쁘게 살아온 삶에, 마음에, 몸에, 혼에, 세월에...... 아주 오래된 것. 낯익은 것. 슬픔이 배어나고 추억이 스며있는 것에 체온이 전해짐을 느낄 것이다. 가을이 깊을수록, 가슴이 시릴수록 사람이 그립다. 아무리 찾아도 나는 보이지 않고 까닭없이 슬퍼진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대답을 만들어가야 할 근원적인 질문과 대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쓸쓸함, 떠다님, 흘러감… 덧없음, 소용없음, 의미없음…. 생은 볼수록, 태울수록 남루하다. 가을은 잊혀진 이름과 얼굴들을 불러온다. 문득 주위를 돌아본다. 나 홀로 가을 한복판에 서있다. 늘 껴안고 부비고 어루만졌던 것들은 어디로 흘러갔는가. 비워 내면 빈 곳이 아린 가을. 온갖 풀벌레 소리가 자란다. 인간의 울음도 자란다. 더듬이로 자란 생각이 그리운 것들을 불러 모은다. 사람이 그립다. 왜 가을은 우리를 외딴 곳으로 끌고 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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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 산문집 『뿔난 그리움』은 사람, 자연, 세상, 문명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의 글은 단문이다. 거침이 없다. 군더더기가 없이 곧바로 본질에 접근한다. 그리고는 정제된 아픔을 풀어놓는다.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인간의 탐욕을, 문명의 야만성을 통렬하게 꾸짖지만 느낌은 따스하다. 이 따스한 느낌이 도대체 무얼까? 그것의 실체는 아마 그리움일 것이다. 그의 글에는 책제목처럼 그리움이 간절하여 뿔이 돋아나 있다.
소위 ‘압축적 근대’를 통과해 온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특히 6/25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은 더욱 그렇다. 저자는 그 반세기의 발자취를 현장에서 확인한 증인이다. 그의 삶 속에는 지워진 흔적에 대한 기억이 명확하게 남아 있다. 살아온 내력이나 방식과는 상관없이 등장한 ‘새로운 가치’ 앞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그는 아직 가슴에 품고, 그것들에 체온을 나눠주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대량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유의 것, 우리만의 것, 선조의 얼이 깃든 것, 대대로 내려오는 것들이 버려지고 있다. 실로 무엄한 시대이다. 그의 글은 이 무엄한 시대에 당신들은 행복하냐고 묻는다. 그의 시적 산문들은 우리네 삶의 무늬이거나 시대의 우화인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신문기자이면서 시인이다. 기자의 눈에 비친 사물이나 사건은 이내 시인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간다. 그가 기록한 글에는 아픔과 그리움이 스며있다. 그러면서도 화살촉과 같은 강함과 예리함을 유지한다.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날카롭다. 저자는 머릿 글에서 고백한다 아픈 삶에, 멀어져간 것들에게 내 체온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물론 아주 작은 소망이다. 하지만 내 글이 누군가의 실체가 없는 고독에, 까닭없는 분노에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체온을 함께 나눈 것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무엄한 시대를 건너가고 싶다. 독자들은 그의 문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형용사를 최대한 배제시킨 그의 단문형의 글들은 느슨하게 풀어지는 법이 없다. 긴장감이 계속 이어지고 그 긴장감을 좇다보면 그의 글에 사로잡히는, 유쾌한 포로가 되고 만다. 그의 문체는 에세이의 한 유형을 창출했다는 세간의 평을 받고 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우리가 살았던 초가집에는 우리 산천의 모습이 들어 있었고, 강물은 낮은 곳을 찾아 자신의 몸을 뉘며 흘러갔다. 집이나 강이나 꼭 그렇게 생기고 흘러야하는 곡절이 있었다. 그것을 무시하고 사람들은 굽은 강은 곧게 만들었다. 강만이 아니다. 산을 깎아 도로를 만들고, 갯벌을 메워 육지를 만들었다. 그 곳의 생명을 무참하게 살육하면서 말이다. 그 결과로 우리의 내면에는 불안과 외로움이 깃들고, 자연이 보여주는 무저항의 침묵 속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었다. 자연을 경외하고, 우주의 신성을 느꼈던 시절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저 먼 산까지 불러 모이도록 하는 부석사는 그래서 가장 큰 정원을 가진 사찰이다. 저 거대한 풍광을 이렇듯 간단히 뜨락에 가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인간은 자연 속으로 달려가고, 자연은 부석사로 달려와 경배하게 만드는 저 지혜와 힘은 누구의 것일까.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자연을 경외하게 만들고, 우주의 신성을 느끼게 한 그들은 누구일까. 마구 달리기만 하면서 놓쳐버린 것들 투성이인 시대를 사는 우리는 허기져 있다. 먹다가 허기진, 아니 너무 많이 먹어서 허지진 인간들은 영악해지고, 나약해져 있다. 우리보다 먼저 이 땅을 사랑할 줄 알았고, 땅의 귀함을 알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 부석사라는 사찰에 ‘거대한 풍광을 가둔 사람들’, 그 풍요로운 가난이 그립다. <신바람과 설레임이 사라진 고향> 저자의 고향은 ‘광활’이라는 지명을 가진 남도의 농촌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새끼들의 목구멍으로 음식 넘어가는 소리가 가장 좋다”는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누구랑 누구랑 연분이 났고, 누구는 헛것을 봤고, 누구네는 노름빚을 갚지 못해 야반도주를 했다는 등 자고 나면 쏟아지던 온갖 풍문’과 ‘동네 어귀나 골목마다 그득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활기찬 고향은 찾을 수 없었다. 마을도 길도 사람도 낡고 늙고 작아진 고향이 있을 뿐이었다. 들녘은 일손이 모자라 논과 밭을 묵히는 경우가 많다. 옛날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논두렁 밭두렁은 꼴을 베지 않아 잡초가 어른 키만큼 자라난다. 이제 농촌에서도 소나 말은 할 일이 없다. 기계와 비료와 농약으로 농사를 짓는다. 힘이 빠진 땅은 약으로 농작물을 키운다. 새참은 자장면을 시켜먹고, 막걸리대신 맥주를 마시고, 논두렁에서 휴대전화로 다방에 커피를 시킨다. 지나가는 사람까지 불러다 밥을 대접하던 넉넉한 인심이 사라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들녘에서의 신바람과 설레임도 사라지고 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넓어졌지만, 그 곳을 찾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우리의 고향이 비어가는 것이다. 이제 그 곳을 지키는 ‘늙은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의 고향은 그것이 가장 잘 어울리는 풍경이기라도 한 것처럼 비어버릴 것이다. 울타리 가에서 술렁이던 밤나무 숲과 개울을 채운 반딧불의 불빛과 개구리와 풀벌레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던 그 곳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그 곳의 사라짐이 저자는 가슴 아프다. 희디흰 피부에 행복한 미소를 배어 물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음들아, 너희가 할머니를 아느냐? 고향을 아느냐? 고향은 이제 너무 늙었다. 고향집에서는 어머니가, 객지에서는 불효자가 서로를 생각한다. 세월은 흐르고 그 어머니들마저 세상을 뜨면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